사제의 주일 말씀 당겨 읽기

부활 제3주일 <, 자꾸만 똑같은 질문을 하시나요?>

(사도 5,27-32.40-41; 묵시 5,11-14; 요한 21,1-19)

 

우리들이 일궈내야 할 진정한 부활의 삶을 일깨우는

사도 요한의 이야기가 무척 포근합니다.

티베리아스 호숫가의 아침햇살,

주님께서 마련하신 소박한 식탁에

옹기종기 둘러앉은 제자들 곁에 슬며시 끼어 앉아봅니다.

손수 음식을 건네시는 주님의 따뜻한 표정이 떠오릅니다.

 

사도 요한이 그날 제자들의 명단 중에

두 명을 익명 처리한 의도가

그 자리에 스스로의 이름을 대입시켜 보라는 권고로 들으니,

모든 정황이 낯설지 않습니다.

느긋이 함께한 제자들의 면면을 생각하는 여유를 갖게 됩니다.

 

그날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그분께로부터 사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껏 옛 삶으로 회귀했던 모습이 딱하게 여겨졌습니다.

흉을 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마음도 일었습니다.

아마도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탓이라 싶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주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별리의 괴리감이

그들에게 견디기 힘든 상처를 안겨주었을 것도 같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짙어지는 그리움에

지쳤을 마음이 가늠되었습니다.

 

그날 베드로는 무거운 분위기를 전환시키려고 불쑥

고기 잡으러 가네라며 딴청을 부렸을 것도 같았습니다.

내 아픔이 상대에게 전이될 것이 두려워

서로 속을 감추고 괜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던 까닭에

모두 스스럼없이 베드로를 쫓아 고기잡이에 나섰던 것이라 싶었습니다.

이 널찍한 이해심은

필시 주님을 믿으면서도

수시로 긴가 민가의심을 해대는 심보 덕일 수도 있고

주님을 사랑한다면서도

스스로의 방식에 사로잡혀 고집했던 저이기에 가능할 것도 같았습니다.

 

순간,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거푸 똑같이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배신했던 까닭이라던 강론이 떠올랐습니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

세 번이 아니라 서른 번도 더,

서른 번이 아니라 삼백 번도 더,

주님을 배신했다는 것을 따져보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주님께서는 얼마나 숱하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셨을 것인지, 헤아려져 아득했습니다.

 

그 질문에

과연 무엇이라고 답을 해 드렸는지 살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떳떳하고 진솔하게 사랑을 고백해 드린 적이 얼마나 될지,

스스로 몸서리가 났습니다.

얼마나 많이 주님의 호소를 외면했는지,

딴전을 피우며 무시하고 모른척했는지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오늘 주님의 물음은 우리를 매우 곤란하게 합니다.

차라리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코린토 13장에서 정확한 답을 베껴서 백점을 맞을 것도 같은데,

굳이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시니

뻔히 아시면서 무엇이 더 궁금하시냐?”

즉답을 피하게 됩니다.

왜 자꾸만 물으시냐?”고 귀찮은 표정으로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뚱하게 무시하며 지나쳐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방법을 깨우친 믿음인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는 수월하고

편안한 안락을 추구하는 부활이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사실을 아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부활로 나아가는 길에는 반드시 십자가가 놓여있으며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나아가는 일만이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고난 없이 부활로 건너 뛸 수 있는 방법은 도무지 없으며

결코 아픔과 고통을 외면한 채로

부활의 열매만 달랑 딸 수는 없다는 걸

입으로 달달달 외울 수 있고

머릿속에 좌르르 꿰어 놓고 지냅니다.

사랑도 용서도 화해도 성경에서 배운대로

정답을 적을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발표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내 삶 안에서는

부디부디 부활의 공식이 무시되기를 원합니다.

영광의 부활만 쏙 챙기고

고난이나 역경은 생략되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이번만은, 이일만큼은, 이라고 조건을 달며 흥정하기 일쑤입니다.

 

오늘도 이 허약한 우리 모습에

애간장이 녹는 주님께서는

다시 거듭, 쉼 없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날 제자들처럼

그분의 뜻과는 동떨어진 일에 매달려 딴 짓을 하며

헛수고를 하느라 기진해 있는

우리 이름을 간절히 부르십니다.

우리 모두가 참으로 부활하기를 원하시며

당신의 영광을 함께 누리기 원하시기에

이제와 항상 영원히당신 식탁에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또 새로이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 우리의 응답이

부활하신 주님의 기쁨이 되는 진실이며 진심이기를 참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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