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9주일<전교는 이웃을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2020. 10. 18 이사 2,1-5; 로마 10,9-18; 마태 28,16-20)
오늘 복음은 열 한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과 작별하던 현장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런데 그중에는 더러 주님을 “의심”하는 이가 있었다고 전합니다. 세 해를 꼬박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 공을 들이신 주님 마음이 어땠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복음 사가는 주님께서 누가 진심으로 “엎드려 경배”하는 ‘진짜’인지, 속으로 의심하는 ‘가짜’인지를 따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짜 진짜 구별없이 똑같이 누구에게나 복음전파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 앞의 ‘경비병들의 매수사건’은 마태오 복음서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날 주님의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로부터 주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한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그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얼마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사건 조작을 위해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뭉쳤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의 위선을 생각하고 그들이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혈안이었던 지를 백번 감안해 보아도 자꾸 솟아나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힘듭니다.
이런 마음으로 들춘 성경에서 경비병들이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무덤으로 다가가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 그 위에 앉는 것”을 목격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기적의 현장에서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쳤다”는 표현까지 만나니, 아연실색할 지경입니다.
단 돈 몇 푼에 양심을 팔고 진리를 수월히도 왜곡해 버리는 우리의 뒷모습 같아 마음이 참담해 지는 겁니다. 값싸게 세상의 지론에 “설득” 당하는 믿음의 모습들이 아른대어, 마음이 아픈 겁니다.
그럼에도 남들은 모두 휴식을 취하며 곤히 잠들어 있는 밤중에 눈을 부릅뜨고 ‘무덤을 지키는’ 험한 일을 해야만 겨우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그들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많은 돈”을 건네며 ‘딱 한 번’ 거짓말을 해 달라는 유혹이 얼마나 거절하기 어려웠을 지 공감해 봅니다. 더해서 직장에서 해고되지 않도록 조처해 주겠다는 단단한 약속을 들었을 때, 너무 고마워 눈물겨웠을 것도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이 약해서 전교를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전교는 믿음이 좋은 사람만 할 수 있다고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우리 생각이 잘못이라는 지적이 아닐까요?
믿음이란 그저 이 한 몸, 주님을 믿는 것으로 끝낼 수 없는
절대절명의 사명임을 알려주는 게 아닐까요?
물론 세상에 주님을 알리는 일은 녹록치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두 눈으로 확인했던 제자들도 마음이 오락가락하고 오죽하면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도 긴가민가했으니까요.
그러나 어렵게 여기지 맙시다.
그저 하느님께서 아끼고 사랑하시는 세상에게 그분의 사랑을 전하면 됩니다. 그분께로부터 받은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고
사랑하는 그분의 멋진 면면을 소개하면 됩니다.
그러노라면 사랑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입으로 당신의 발로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선교는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많이 주님의 이름을 잊고
나를 내세우며 얼마나 흔히 주님의 뜻을 버리고 내 생각을 따르며
얼마나 자주 주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살아가는지 살피도록 합니다.
세상은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지켜본 것처럼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그분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탄복하며 바라기를 원합니다. 온 세상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는 일이 그리 복된지 묻고 “주님의 이름 덕분에” 누리는 평화를 탐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궁극적으로 전교는 아직 그분을 모르는 이들에게
그분을 전하는 삶이야말로 천국을 살게 합니다.
주님을 모신 그곳이 바로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고
천국을 널리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