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05 16:17

가정교리 46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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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리 제 46 과 - 마지막 날, 하느님은 무서운 심판관으로 나타나시나요?

 

《하느님은 정의롭고 자비로운 심판관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분이에요.

 

하느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날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요. 하느님은 언제나 사랑이시며 자비로우시기 때문이에요. “하느님이 우리를 심판하신다.”라는 말은 세상의 기준이 아닌 당신의 정의로 우리를 심판하신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올바르게 살지 않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거에요. 왜냐하면 하늘나라에는 악이 더 이상 있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어요. 하느님은 오로지 우리가 그분께 용서를 청하기만을 기다리고 계셔요.》(『Youcat 프렌즈』p.86)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자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16-21)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주님의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설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호의를 남용하며 자신들의 죄를 더욱 키우고도 무서운 줄 모르는 많은 경솔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옥이란 없다. 미래의 벌이란 없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 오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한 번은 이미 지났고, 한 번은 장차 이루어질 것입니다. 첫 번째 오심은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두 번째 오심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심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분께서는 첫 번째 오심과 관련하여 ‘나는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하여 왔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두 번째 오심에 관해서는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오면,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마태 25,31.33)하고 말씀하십니다. 양들은 생명으로 들어가고 염소들은 영원한 벌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한동안은 심판하시는 대신에 용서하십니다. 만일 그분께서 곧바로 심판을 하셨더라면 모든 사람이 멸망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기’(로마 3,23) 때문입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분의 사랑과 호의를 모르시겠습니까?”(『요한 복음 강해』28,1)

 

성 요한 23세 교황님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그분을 일컫는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며, 우리의 가련함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어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황님은 시편 89편 2절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저는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Misericordias Domini in aeternum cantabo.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자비’를 하느님의 절대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은 더 높은 권위를 지닌 존재가 제정한 법을 올바로 적용하는 재판관이나 부하 직원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절대적 주인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만든 법의 지배를 받지 않으시며, 자신의 선물을 제약 없이 나누어 주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임의로 선물을 나누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고유한 자비에 따라 행동하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자비는 그분의 ‘정의’에 모순되거나 그것을 무력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정의를 이루는 것이고, 그분의 정의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비’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히브리어 단어는 ‘헤세드’로, 이는 ‘거저 베푸는 호의와 친절’을 뜻하며, 더 나아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의미합니다. ‘헤세드’는 곤경 중에 있는 사람에 대한 단순한 동정이나 슬픔을 뛰어넘는 것으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유롭고 너그러운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과 관련하여 ‘헤세드’는 모든 상호 신뢰 관계를 넘어서며 예기치 않게 주어지는, 하느님 은총의 선물을 의미하는데, 그 선물은 인간의 모든 기대와 범위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은,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곤경을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불쌍한 인간의 고통을 굽어보시며, 인간의 탄식을 들으시고, 인간에게 몸을 기울여 인간을 편드시며, 곤경 중에 있는 인간에게 내려오시어 그들의 모든 불성실함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받아들여 주시며, 인간이 벌을 받아 마땅한 짓을 저질렀음에도 그를 용서하시고,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통상적인 경험과 기대, 인간의 상상과 생각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서 하느님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있든 바로 지금 이 순간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그분과 만나려는 마음, 날마다 끊임없이 그분을 찾으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도록 권고합니다. 그 누구도 이러한 초대가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시는 기쁨에서 배제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길로 나서는 이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우리는 그분께서 언제나 그곳에,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이 바로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때입니다. ‘주님, 제가 잘못 생각해 왔습니다. 저는 수없이 주님의 사랑에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서 주님과 계약을 새롭게 맺고자 합니다. 저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 저를 다시 구원하여 주소서. 구원하시는 주님의 품 안에 다시 한 번 저를 받아 주소서.’

 

우리가 길을 잃을 때마다 주님께 돌아갈 수 있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거듭 이렇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데에 결코 지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데에 지쳐 버립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을 ‘일흔일곱 번’(마태 18,22) 용서하라고 말씀하시고 몸소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일흔일곱 번 용서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매번 우리를 당신 어깨에 짊어지십니다.

 

이 무한하고 확고한 사랑으로 우리가 받은 존엄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언제나 우리의 기쁨을 되찾아 주시는 온유함으로, 우리가 고개를 들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도망가지 맙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맙시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우리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끕니다!”(『복음의 기쁨』3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