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8 14:17

가정교리 39과 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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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20,19-29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예수님과 토마스’

 

이 복음은 토마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두고서 대체로 토마스를 ‘불신앙’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해왔습니다. 왜냐하면 토마스가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연 이 말이 단순히 불신앙을 표현한 것인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토마스의 이 말이야말로 제자들 가운데서 가장 인간적이고도 솔직한 신앙의 표현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라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내가 본 만큼, 내가 들은 만큼, 내가 아는 만큼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단순히 보이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해서 그냥 이론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나의 체험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그 체험이 크면 클수록 믿음도 그만큼 커지고, 그런 체험이 적거나 없을수록 믿음도 그만큼 적거나 없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토마스도 처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도 못했고 그 어떤 체험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라고 말씀하시자, 곧바로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여드레 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하셨기 때문에 토마스는 여드레 전 자신이 그분을 보지 못했던 그 순간에도 예수님께서 살아계셨음을 분명히 깨달은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 신앙은 그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이론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체험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아무리 주님 부활 대축일을 성대하게 지낸다 할지라도 우리는 별로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그리 큰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성야 미사 때 사제는 부활초에 불을 붙인 뒤 “그리스도 우리의 빛!” 이라고 외칩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하느님, 감사합니다.” 라고 응답합니다.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가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라고 했던 말씀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믿기 때문에 하느님께 감사하다고 응답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전 불을 다 꺼놓은 어둠의 상태에서 부활초의 밝은 빛을 보고 그렇게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내면의 어두움의 상태에서 또 우리 삶의 어두움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당신의 밝은 빛으로 우리의 어두움을 비추어 주셨음에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어두움을 알지 못하거나 자신의 내면의 어두움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빛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베드 1,8-9) 이 말씀을 토대로 우리 각자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하는가? 나는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는가? 나의 신앙생활의 목적은 정말 내 영혼의 구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