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8 14:16

가정교리 39과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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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21,1-14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이 장면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난 일화들 가운데 저에게는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따듯한 사랑이 깊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만찬 직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때에 느껴졌던 그 사랑으로 예수님께서는 손수 제자들의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 아침식사는 그저 단순히 스승님께서 밤새 일하느라 고생한 제자들을 위해 준비한 식사가 아닙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밖으로 나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시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처음으로 받던 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지만, 버렸었던 그 배와 그물을 가지고 같은 호숫가에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간 것입니다.

 

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면서도 그분의 부활을 세상에 선포하는 대신에 정반대로 옛날 삶의 방식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던 것일까요? 제자들의 이 모습은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광야로 나왔으면서도 끊임없이 이집트 노예 생활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해방시켜 주셨지만, 그들은 해방의 삶을 살려고 하기 보다는 그저 익숙한 노예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만나서 삶의 모습이 완전히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스승님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겪고 나서, 스승님의 부활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사건을 경험하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오히려 뒤로 돌아가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허탕이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3년 동안 그물을 손에서 놓는 바람에 실력이 녹슬어서 그랬던 것일까요? 단지 그런 이유였다면 굳이 요한이 자기들이 허탕친 이야기를 복음서에 적었을 리가 없습니다. 요한이 그 이야기를 복음서에 적은 이유는 아마도 예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자신들의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해야 했지만, 오히려 거기에서 도망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히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모두 도망쳐 버렸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또 도망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셨는데, ‘너희들이 정말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는 단 한 마디 말씀 없이 오히려 밤새 허탕친 그들을 위해 손수 음식을 준비해 놓으시고, 직접 그 음식을 제자들에게 주시는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스승님의 이 큰 사랑 앞에서 제자들은 이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아니, 도망칠 이유가 사라진 것입니다. 스승님을 버리고 배반하고 도망쳤을지라도 자신들을 향한 스승님의 사랑이 한결같고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자들은 이 아침식사를 통해 깊이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훗날 그의 편지에 이런 말씀을 적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1베드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