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지주일 미사 전에, 교회는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식’을 거행합니다. 즈카르야서 9장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팔마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을 외치며 그분을 구세주로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미사 중의 <수난복음>에서, 예수님을 환영하던 바로 그 군중은 며칠 만에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사람들로 변하고 맙니다. 무슨 이유로 그들이 180도 변하게 된 것입니까? 예수님을 세속적인 구세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현세의 온갖 문제들을 해결해 줄 분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나약하게 붙잡혀 온 그분을 보고 마음이 돌아서 버린 것입니다.
군중의 이런 이중적인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잘 되어 갈 때에는 봉사도 하며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어떤 계기로 마음이 틀어지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느님을 멀리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성당에 와서는 참회하며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열심히 바치다가도, 일상생활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세속적인 것들만 추구하며 산다면, 이런 삶이야말로 한편으로는 박수치며 환호하다가,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의 모습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권력과 재물과 화려한 영웅을 숭배하는 세상은 십자가의 약함을 조롱합니다. 마치 십자가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며 “당신이 진정 메시아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비아냥거린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다. 십자가 안에 부활의 길이 있고 참된 구원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음악가 바흐는 마태오복음 26-27장의 ‘수난복음’을 주제로 마태오 수난곡을 썼습니다. 우리가 흔히 ‘마태수난곡’이라고 부르는 합창곡입니다. 거기 나오는 한 대목이 가톨릭성가 116번의 “주 예수 바라보라.”라는 곡입니다. “주 예수 바라보라. 정성된 맘으로. 거룩한 머리 위에 피땀이 흐르며, 지존한 주의 몸에 상처 가득하다. 목석과 같은 자야 눈물도 없느냐?” 이 성가의 가사처럼, 우리가 눈물도 없이, 자신의 죄를 통회하는 마음도 없이, 목석과 같은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가 연장되면서, 파스카 성삼일과 부활대축일도 개인적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열심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이 구원의 신비를 따라가는 은혜로운 한 주간을 보내시기를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