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는 우리가 잘 아는 분의 죽음을 암시해 주는 듯 보이고,
의인을 싫어하는 이들의 모습을 그려줍니다.
그리고 복음은 독서에서 말하는 그 의인을 잡으려고 안달이 난 사람들이 등장하며,
또 다른 한 무리는 그저 의심만 해대고 있습니다.
의심과 폭력이라는 어두운 분위기의 한 가운데 서 계신 그분을 잡으려고 했으나,
복음은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말로써 손을 대는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공관 복음에서는 그 이유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즉, 그렇게 의심하고 있고, 폭력의 가운데 놓여 있었지만
예수님의 기적을 믿고 그분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사순 시기를 지내며, 지금의 나는 어느 편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의심과 폭력! 표징만을 요구하는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가?
의인으로써의 모습이 명확해질수록 악인으로써의 낙인의 당위성,
그 메커니즘을 씌우려고 애를 씁니다
구약의 희생양과 지금의 희생양과 예수님이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부분은
이전의 의인과는 차이가 나는 의인의 모습이라는 것이 악인들도 감당하기 힘든 부분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마지막까지 자기 모습을, 자기 자존심을,
고수하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