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나누어요

경향잡지에 연재하고 있는 교부들의 신앙」 내용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 :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김현 안셀모 신부

 

비대면 사회로의 전환 이후 교우들의 발걸음이 뜸해진 성전에 홀로 머물러 봅니다. 이곳을 가득 메우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활력을 불어넣었던 교우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 어마한 일이다. ··· 한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는 시구가 오버랩 되면서, 희로애락이 서린 각자의 삶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음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코로나가 창궐해서 제도적 비대면이 되고나서야 사람 얼굴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사람의 깨달음은 어찌 이리 더딘가라는 누군가의 뉘우침처럼, ‘팬데믹’(Pandemic, 전염병 세계적 유행) 시대의 거리두기비대면 접촉’(Untact)이라는 새로운 일상’(New Normal)을 맞이 하고나서야, 이웃의 소중함을 깨달아 가는 것 같습니다.

 

신학생 시절 아가페 시간 말미에 늘 동료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즐겨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형제의 손 맞잡고 ···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 됨을 위하여”, 김남주 시인의 시에 안치환씨가 노래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는 노래입니다. 요즘 들어 이 노래가 자꾸 흥얼거려지는 걸 보니, ‘더불어 살아갈 수 밖 에 없는인간의 본성()을 다시 돌아보라는 뜻인가 봅니다.

 

그래서 이 번호에서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Nazianzus, 329-390)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De pauperum amore이라는 작품을 통해 어려움에 처해있는 이웃형제들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우리의 본성을 자각해서 역경과 환난 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며 이 위기를 함께 극복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신학자’(theologos)란 별명을 지닌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습니다. 그리고 세계 보편 공의회로서 그리스도교 역사상 두 번째로 열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의 의장이기도 했습니다. 이 공의회를 통해서 카파도키아의 삼총사인 대 바실리우스(Basilius Magnus Carsariensis, 329/30-379), 니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Nyssenus, 335?-395)와 함께 삼위일체에 관한 참된 신앙을 굳게 지켜내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짧고 아름다운 기도문인 영광송이 바로 그 결과물입니다.

 

위대한 신학자였기에 그레고리우스는 무엇보다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말장난에 빠지지 않기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의 현존을 늘 뜨겁게 선포하며, 사회적 약자들의 존엄과 권리를 지켜내는 데 앞장섰습니다. 이 번호에 소개해 드리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에서도 하느님의 마음으로 피조물을 바라보고 피조물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얼굴을 읽어 내는 그레고리우스의 따뜻한 마음을 만나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이며, 모든 덕목 중에서 가장 으뜸이자 위대한 계명은 사랑입니다 사랑 중에서도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가지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슬퍼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라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과부나 고아, 유배를 당한 사람과 이방인, 갑질을 당한 사람, 불공정한 판결을 받은 사람,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 도둑과 강도의 피해를 입은 사람,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 등에게 마음을 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한 몸의 지체들이 서로 연결되어 움직이듯이, 우리 모두도 서로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공공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건강하다는 사실에 기뻐할 것이 아니라 고통 중에 힘들어 하는 형제들 때문에 아파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의 영혼과 육신의 구원은 형제를 아끼고 사랑하는데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가난에는 끔찍한 질병이 따라다닙니다. 그 병은 또 다른 악이고, 너무나 참혹해서 온갖 혐오의 대상이 됩니다. 게다가 많은 이들은 그들에게 다가가려 하지도 않고, 쳐다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피하고 두려워하고 혐오하게 만듭니다. 자신들의 불행 때문에 거부당하고 미움 받는다고 느끼는 것은 질병 자체보다 더 참혹합니다. 저는 그들의 비참함을 눈물 없이 바라볼 수 없으며, 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집니다. 저는 여러분에게도 이런 연민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눈물로 눈물을 없애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친구이자 가난한 이들의 친구인 여러분이 이 슬픔에 공감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자비의 선물을 받은 여러분이 바로 고통 받는 이들의 산증인이 되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가시며 고통을 짊어지셨습니다(이사 54,4참조).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당신의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참조). 이처럼 그리스도의 이름을 따서 위대한 새 이름으로 불리는 우리는 선택된 겨레이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며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 2,9참조). 그리고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사람들이며(티토 2,14 참조), 온유하고 겸손한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입니다(마테 11,29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위대한 자비와 은총을 받은 우리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며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그들을 마치 죽은 사람인 것처럼, 뱀이나 야생동물 보다 못한, 혐오스러운 사람들인 것처럼 취급해서 그들을 외면해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멸시해야 되겠습니까?

 

형제여러분,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시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양에게는 원기를 북돋아 주시는(에제 34,16참조)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결코 그런 짓은 우리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또한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비와 동정심을 베푸는 것을 연민의 정으로 여기는 인간의 본성과도 거리가 먼 행동입니다.

 

저는 저들이 고통 속에 있는 동안 더 이상 제 자신을 위해서 부를 축적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지 못한다면 저만 건강해지기를 바라지 않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쉴 곳을 제공해 줄 것이며, 비로소 그 때 저 역시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편안한 보금자리에서 쉼을 누리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어깨 위에 짊어진 십자가를 진심으로 지고 예수님과 함께 저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를 얽매고 있는 지상의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된 마음으로 희망을 가지고 가난함으로 하늘에 재물을 쌓을 때 우리는 썩어 없어질 세상의 재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재물을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들과 함께 재물을 나눌 때 우리의 소유도 의로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체하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의 삶을 희망해야 합니다. 세상이 가져다주는 풍요로움을 멀리하고 그 속에 있는 유익함만을 취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선과 나눔을 통해서 영혼의 구원을 얻어 천국에서의 풍요로움을 꿈꿔야 합니다. 그리고 육신의 풍요로움만이 아니라 영혼의 풍요로움을 위해서도 애써야 합니다. 세상의 것에만 애쓰지 말고 하늘나라를 위해서도 헌신해야 합니다. 육신의 채움이 아니라 성령과의 일치를 위해서도 노력해야합니다. 이 세상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위해서도 애써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이며 형제이며 공동 상속자인 여러분, 만물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주님께서는 수만 마리의 살찐 양보다 빈곤한 이들과 억눌린 이들에게 행하는 우리의 자선을 더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엎드려 누워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느님께 우리의 선한 마음을 보여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들이 먼저 나서서 영원한 안식처로 우리를 안내하여 그리스도를 마주 뵙게 해 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광 속에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심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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