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나누어요
2019년 10월 17일 목요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미사 강론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한국인들의 종교 심성의 기저에는 종교는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는 막연한 이미지가 있다.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마칠 종(宗)에 가르칠 교(敎)가 합쳐져서, 마지막 것에 대한 가르침, 우주의 최고 원리에 대한 가르침, 올바른 인생을 살기 위한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수양을 쌓고, 내공을 기르는 것이 종교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한국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개종이나 종교 버리기를 쉽게 한다. 또, 한번 갈아타기만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다른 종교들을 갈아타기도 한다. 이러한 한국인들의 종교 심성의 기저에는 이 땅의 역사가 함께 하고 있다. 5천년이 넘는 이 땅의 백성들은 900번이 넘는 외적의 침입을 받아 왔고, 내적으로는 신분제도의 차별로 말미암는 억압 구조 속에서 살아 왔다. 때로는 백성들이 하나되어 봉기했던 적도 있었다. 그럼으로써 왕족을 갈아 엎은 적도 있었고, 왕조를 아예 멸망케 한 적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5천년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힘 있는 자들에게 당하면서 살아왔던 백성은 뭘 해도 안 바뀐다는 패배의식 속에서 목숨을 연명하며 살 수 밖에 없었다. 눈에 보이는 평화는 너무나도 요원하고, 세상은 안 바뀌고, 하다못해 자기 가족들이라도 바뀌었으면 하고, 손발이 다 닳도록 빌고 빌어도 안 바뀌니, 모진 것이 목숨이라고, 이 바뀌지 않는 세상, 나를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하고, 열불 터지게 하는 세상을 살기는 살아야겠고, 그래서 이 땅의 풀 뿌리 민초들은 종교가 가지고 있는 특징들 가운데 하나를 극대화시키면서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 냈다. 그 특징이라는 것은 바로 세상과 거리 두기이다.
무릇 모든 종교는 세상에 지나치게 간섭해서도 안되고, 세상에 지나치게 동떨어져서 섬으로만 존재해서도 안 된다는 «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 »이라는 원칙 아래,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이 일정한 거리 두기가 영성으로 드러나면, 대개 심신 수양으로 발전한다. 그런데, 심신 수양이 과도하게 강조되면, 결국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 닦기, 어떠한 자극에도 무심해지기와 동일한 의미인 « 내공 쌓기 »가 종교생활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와 같은 현상은 한국의 3대 종교라고 불리는 천주교, 개신교, 불교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천주교와 개신교에서는 내공을 쌓는다는 것이 십자가를 받아 들이고, 십자가를 사랑하라는 말로 나타난다. 불교에서는 내공을 쌓는다는 것이 부처님 마음을 닮아서 모든 만물을 자비로이 대해야 한다는 말로 나타난다. 이러한 논리가 도를 지나치게 되면, 십자가가 가지고 있는 세상의 악에 대한 승리로서의 세상 구원의 의미나, 중생계도를 위한 부처님의 자비심은 사라지고, 세상을 등지거나, 세상과는 무관한 탄탄한 내면 세계의 건설에만 매달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각 종교에서 녹을 받아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신부, 수도자, 목사, 스님들은 그저 세상과 단절된 내면 세계를 건설하는 건설자가 되거나 감독자가 되거나 설계자가 되어 버리고 만다. 이러한 이야기는 오늘날 종교 사회학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강론시간에 하는 것일까 ?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비판하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세상과 단절하고, 오직 내공을 쌓는 것만이 종교라고 사람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이 로마제국의 식민통치로 인한 괴로움에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613개 조항의 율법이 얼마나 백성의 삶을 옭아매고, 옥죄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시대의 암울함과 모순에 정면으로 맞섰던 예언자들을 죽여버렸던 자신들의 선조들에 대해서, 그저 과거에 죽어 버렸으니, 무덤이나 잘 만들어 주면 그만이라고 여기고,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언제나 자기들 편이었다. 하느님의 뜻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드러난 것으로 믿어졌던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고,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율법을 제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기존의 율법 조항을 해석하는 거룩한 임무까지도 자신들이 도맡아 했으니, 그들은 스스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여기면서, 참으로 교만한 삶을 영위했었다. 율법이 왜 나왔는지, 그 발생 배경에 대해서는 일절 관심도 없고, 그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내공을 쌓는 길이고, 그 어디에도,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신앙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목놓아 소리지르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지키고 싶어도 삶의 지난한 조건들 때문에 지키기가 어려웠던 사람들을 깔보고, 그들을 업신여기며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교만의 극치를 달렸던 이들이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적어도 나는 그런 바리사이는 아니라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가 ? 체면이나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생명을 먼저 생각하고, 그들과 연대하며, 아무리 법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약속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지만, 그 법이 사람을 옭아매고, 옥죄일 때, « 그건 아니야 »라고 말하는 삶을 살아 가고 있는가 ? 힘이 없고, 용기가 없어서 못 본 체하고, 내가 혹은 내 가족이 불편을 겪게 되고, 고통을 겪게 될까 봐 앞에 나서지 못하고, 익명의 군중으로 남고자 한 적은 없었는가 ? 그래 놓고도 « 하느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는 그래도 세례도 받았고, 신앙생활도 하고 있고, 간혹 순교자들의 무덤도 참배하고, 성지순례도 하나이다 »라고 감히 말하지는 않는가 ? 사람이 죽어가는 데도, 사람이 아파 울고 있는데도, 목놓아 억울해 하는데도, 나는 내공 쌓기에 더 열중해야 한다고 한다면, 부끄럽지만, 이미 나도 바리사이요, 율법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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