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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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포성당이 이루어져 온 이야기

고문헌에 전선등이라 불리었던 샘물터산 동편 기슭에 자리잡은 석포성당 자리는 대연성당 초대 주임신부이셨던 이탈리아 범덕예(프란치스코) 신부님(1961.4월 대연성당 부임, 2007. 8. 15. 이탈리아 바르보짜 요양소에서 선종)께서 성당터를 조성하여 이루어졌습니다.

1983년 12월 성당 가건물(현재 대강당)이 준공되었고, 1984년 1월 사제관(지금의 성전터) 준공에 이어서 대연성당과 동항성당 관할구역 일부에서 분리되어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래된 지 2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인 1984년 2월 7일 천주교석포성당을 설립하였습니다.

초대주임신부로 김두완(아우구스티노) 신부님께서 부임하셨고, 한국의 순교성인이신 현석문(가롤로)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게 되었으며, 1985년 봄에 석포성당 건립준비위원회가 발족되어 당시 사목회장을 역임하던 박우춘(다미아노) 초대 본당회장님께서 위원장을 맡으셨고 사목위원들이 준비위원직을 맡았습니다.

성전건축에 관련된 모든 사항은 대부분 김두완(아우구스티노) 신부님과 당시 건축을 담당하신 김정길(파우스티노) 형제님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졌습니다.

본격적인 성전공사는 1985년 10월 건축허가를 득하여 동년 10월에 착공식을 갖고 4년 1개월에 걸쳐 공사를 진행하여 1989년 11월에 준공하였고, 성전 축성식은 1990년 5월 2일 당시 교구장이셨던 이갑수(가브리엘) 주교님을 모시고 기념미사와 함께 축하식을 개최한 이후로 3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본당에는 항상 열정과 사랑이 넘치는 신부님이 부임하여 솔선하여 참여하고 가꾸는 신앙의 모습으로 사목하여 왔으며, 본당 출신 여섯분의 사제와 한분의 수사 그리고 네분의 종신 수녀님이 배출되어 주님의 사목자로서의 길을 가고 있으며, 스물한번째 본당회장님과 사목위원들 그리고 평신도들이 땀과 정성을 모은 사랑의 실천으로 지역사회에 믿음의 씨앗을 뿌리고 결실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출처 : 『석포성당 설립 30주년 발자취(2014년)』 인용

♣ 석포 지명의 유래

석포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 옛날에는 경남 동래군 용주면 석포리이고 용주골이라 불리었다. 용주골이라 함은 지금의 용당 신선대에서 동명불원과 동국제강 앞(현 남구 운전면허시험장)까지를 용같이 생겼다하여 용주골이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바닷물이 지금의 시립박물관 앞까지 올라 왔으며 그 당시 우리 성당이 있는 쪽을 돌이 많은 포구(浦口)라 하며 돌개(石浦)라 하였으며 그 후 농부들이 간척지를 개간하여 현재의 마을을 이루었다.

1960년대 초에 돌개 마을(현재 대연4동 동사무소 인근) 위쪽으로 360호의 난민주택이 건립되어 주택지가 형성되었으며 오늘날의 대연동과 남구 일대가 주택가로 발전되기 시작한 것은 1965년 9월에 문현동과 대연동을 잇는 고개(대연고개)가 절개되고 범일동과 해운대간의 포장도로가 신설되면서부터이다.

출처 : 『석포성당 설립 30주년 발자취(2014년)』

♣ 석포마을 | 대연동

석포(石浦)마을은 현재의 대연 4동에 있었던 마을이다.

1740년에 간행된 『동래부지』에 의하면 남촌의 관내에 있는 석포리로서 관문에서 27리 거리에 있었다. 

석포란 마을 이름은 이 곳의 등하천에 돌자갈이 많아 ‘돌개’라고 불렀는데 한자로 돌을 가리키는 석(石)과 포구를 의미하는 포(浦)를 합하여 ‘석포’라고 불렀다. 옛날 석포 마을은 천제등(天際燈:부산공고 뒷산 일대)과 전선등(戰船燈:부산외국어대학교 뒤산 일대)사이에 있었던 한적한 포구였다. 193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폐어선의 잔해가 수상교(水上橋:동국제강입구에 있는 다리) 부근에 산재해 있었다고 한다. 1950년대에도 비사등(飛蛇燈:부산시립박물관 근처)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포구였으며 등하천에 선착장이 있어서 어선이 왕래했다고 한다. 

석포마을의 입향조는 470여 년 전 동래성 수문장을 하던 정복덕 씨의 아들인 정춘세 씨이다. 현재 동래 정씨 재실인 석산재에는 정복덕씨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자손도 번성하여 석포마을에만 206세대 800여 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석산재 옆의 솔밭에서는 옛날에 활을 쏘았다는 터가 지금도 소나무 몇 그루와 함께 남아 있다. 또 이곳은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보면 석포목장이 있었다. 현 남부면허시험장이 있는 곳까지 목마성을 쌓아서 말들을 방목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대동여지도』에도 ‘석포목장’이라는 지명이 있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 「남구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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