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는 이야기

<종말에 대한 묵상>

by 박데레사 posted Dec 27, 202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종말에 대한 묵상>
 

 삶을 살아가는 동안 인간은 죽는 순간에 내려야 하는 존재의 결단을 올발 게 내릴 수 있도록 실적 결단에 대한 훈련을 계속해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심 서적에서는 깨어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우리의 관점으로 볼 때 인간은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아무도 우리가 죽는 순간 궁극적인 생명의 를 말한다고 보장해 줄 수 없다. 이 결단의 출발점은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결단이 진솔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척도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는 것밖에 없다.

인생의 의미덕을 쌓으며 살아가는 것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을까?

덕행이라는 말은 인간 존재의 성취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저기서 불쑥 이루는 성취가 아니라 오히려 본질적 인 것을 지속적 정향(定向)으로서 인간 존재 안에 결단을 통해 받아들여진 성취를 말한다.

인간 본질에 속하는 것이며, 이 세상에 있는 것 가운데 관습과는 가장 먼 것, 황당무계한 것이고,

복음 증거의 모습을 띠고 자기 자신의 노력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

인생 및 체험의 중심이 자기 자신보다 우선 남에게 잇는 사람들 안에 숨겨져 있다. 그런 사람은 정신을 잘 가다듬을 줄 알고, 자신을 기꺼이 건네 줄 줄 알며, 속셈 없이 사람들을 대하고 개방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 다. 자기 자신 보다 진지하게 이웃을 위해 투신하며 쏟을 줄 안다. 그런 사람의 인생 안에는 헌신적 희생이 그 심층과 본질을 이루고 있다.

헌신적 희생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 마음의 가난이라고 부르신 잊지 못할 자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가 실현된다. 오직 이 자세만이, 인생이 끝날 때 비어 있는 우리 손을 하느님께 남김없이 내맡겨드릴 수 있고, 그 가운데 하느님 선물의 풍요로움, 곧 하늘나라를 채워 받을 수 있다.

인내할 줄 모르는 마음, 거친 자세와 말투, 남의 말하기를 일삼고 남의 결점을 헐뜯기 좋아하는 습관, 사소해 보이는 일상의 일들 속에서 드러나는 속 좁은 이기심, 한 번 틀어지면 좀처럼 용서할 줄 모르는 꽁한 마음, 거짓과 가식, 다른 사람과 그들의 영적 삶에 대한 경외심 상실, 질투와 악의, 변덕스러움, 무질서한 생활, 마음에 드는 사람만 편애하는 성향, 성급한 판단,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에게 실제로 귀기울일 용기를 가지지 못하는 거짓된 자기만족 같은, 우리가 쉽게 소죄라고 하여 무시하는 일상의 죄들이 삶의 습관이 되어 우리 존재의 밑바닥으로부터 이미 하느님을 거부하고 있을 수 있다는 말을 성찰하게 된다.


우리가 큰 죄를 지었을 때 그 사실을 시인하는 것, 그 죄를 통회하고 고해성사를 보고 그래서 이제 모든 것이 말끔히 정리되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더 중요하고 더 부끄러운 것은 소위 소죄(小罪)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자주 사람을 완전히 녹초로 만들고, 대죄(大罪)를 짓는 것만큼 많은 것을 요구한다. 살면서 보면 실존적 나약함으로 인해 전적으로 투신하거나, 자신의 내적 기본 결단을 실전에 옮기거나, 자신의 전반적인 의무밖으로 드러내어 이행하지 못하는 인생 상황과 순간들이 있다.

이런 경우 개별 인간의 내적 인격적 핵심, 개별 인간의 운명이 담긴 근원적인 부분이 드러나는 것인데도 우리는 망설일 것도 없이 그것을 소죄(小罪) 개념 속에 편입시키기 일쑤이다.

그러나 순간들은 어쩌면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등을 돌리는 행위, 갈 데까지 가버린 비겁, 은폐된 사랑 부재 의 약한 표현에 불과할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존재의 밑바닥으로부터 이미 하느님을 거부하고 있는 지 모른다. 우리는 인생의 기본 결단을 이미 하느님 반대쪽으로 내렸는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비록 윤리 교수들이 예전에 순진하게 생각하던 시절에, 그런 삶도 별로 나쁠 것이 없다고 보장해 주었는지 몰라도, 근본을 보면 완전히 거짓으로 덧칠된 삶을 사는 것인지 모르며, 완전히 자기 자신만의 철옹성에 갇혀 사는 것인지 모른다.

성공과 권력과 재물에 대한 유혹을 이겨내신 그리스도의 유혹 이야기를 복음서(마태 4,1-11)에서 읽고 우리 삶에 적용시켜 본다.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셨다.

악마는 세 가지 유혹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였다.
극도로 주린 상태임을 이용하여 돌로 빵 만들어 보라는 시험,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뛰어내려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라는 시험, 그리고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악마의 세 가지 시험 중 내가 약한 부분은 무엇일까?

예수님은 유혹을 받을 필요가 없는 분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마는 예수님을 시험하였다.

유혹이 절대로 필요 없는 예수님에게도 유혹이 있었다, 따라서 당연히 우리들에게도 유혹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일깨워 주시는 말씀이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는 특별히 조심하고, 그 중에서 대단한 일, 위대한 일, 중요한 일을 하고 무언가 성취했을 때 이럴 때는 더 각별히 조심하라는 것이 아닐까?

죽는 순간 철두철미한 고독 속에서 인간이 자신의 비본래성을 벗고 자기 마음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을 연옥이라고 라디슬라우스 보로스(신학자) 교수는 설명한다.

헌신적인 희생을 하며 자신 안에 담아둔 본래적인 것이 꽃핀다. 희생의 순간들이 농축된다. 예를 들면 병과 고통으로 시달리는 친구 곁에 함께 머물러 준 시간들, 자신을 돌보지 않는 사랑의 체험들,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을 때 느끼던 행복의 순간들,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는 사람들과 함께 웃겠다는 단호한 결단 등이 있다. 이렇게 인간이 자기 마음 자세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을 저는 그냥 연옥이라고 부른 다. 그것은 사랑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체험하는 과정으로서, 궁극적으로 겸손해지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연옥을 우리는 우리 전 실존이 붉게 달아오른 자신의 모습을 향해 농축되어가는 과정이고, 죽음의 심연 속에서 본래의 자기 자신이 되는 순간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시는 마태 25,31-46을 읽고,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우리 인간 존재의 은밀한 영역눈에 띄지 않는 매일의 일들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심판은 우리가 이렇게 행하는 행동 차원을 제시해 주게 된다는, 이때 그런 행동들은 임시성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 안으로 직접 흘러든다는 보로스 교수의 말은우리의 체험, 우리의 희망, 우정과 공생에 대한 우리의 동경 등의 마지막 깊이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다.

우리 실존 안에 담겨 있는 이러한 숨겨진 그리스도 차원을 신앙교리를 통해서 밝혀내고,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신심을 위해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교 사상가의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심판은 사물들의 본질이 무엇이고 사람의 기본적 마음자세가 무엇인지 계시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근거들의 근거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은 영원한 타당성을 지니는 자신의 존재 앞에 서게 되고, 거기서 살면서 간직했던 좋은 충동들이 이미 그리스도의 한 부분이었고,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나오는 충동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단 한 가지가 그가 꿈꾸고 갈망해 오던 모든 것의 중심부에서 옛날부터 빨갛게 타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 단 한 가지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리스도이 시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모두 떨어져 나간다. 그런 것은 인간이 기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저 이상 방해하지 못한다. 이것이 심판이다. 근본적으로 얼마나 단순한 일인지 모른다.

심판, 그것은 기쁨에 대한 선포이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사랑의 현상을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에 적용하여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곧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가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그분과 존재를 주고받으며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존재는 우리 자신의 존재가 된다. 나는 나 자신을 그분으로부터 선물로서 선사 받는다. 그러한 일은 그분이 나에게 내 사랑의 당신이 되심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그 분은 하느님이시다.

이러한 사실에서 이제 우리가 감히 말로 언급할 수 없는 일이 나온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 자신의 삶을 바치는데, 이때 그것을 동시에 그분으로부터 돌려받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가 된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나도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다.

하느님께 대한 나의 사랑은 그리스도가 아버지께 대해 가지셨던 사랑과 같은 사랑이며, 그것은 곧 성령이시다.

본질상 썩어 없어질 위험 속에 있는 내 존재는 이렇게 하느님의 삼위일체 안으로 던져진다.

성부와 성자가 계시고, 사랑으로고 불리는 분이 우리 생각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분으로서 그분들 사이에 계신다.

동일한 하느님이시면 성부는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시며, 성부와 성자가 하나로 성령의 사랑 안에 계시다는 사실 안으로 우리는 이끌려 들어간다. 신적인 우리 자신에 대한 이러한 의식, 이러한 신비를 몸에 담은 상태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권능에 힘입어 어둠을 헤쳐 나갔던 것이다.

불사불멸, 부활, 세상심판, 심지어 하늘나라 같은 표현들을 잊고, 그 대신 우리 신화의 본래 내용,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내용에 귀기울여 본다.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이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은, 도래할 나의 죽음을 불러내기도 한다.

죽음 앞에서 상실감과 함께 공포감도 느끼기도 했다. 부모님의 죽음 앞에서, 형제자매들 중에 먼저 하늘나라로 가신 분들의 죽음을 보면서, 죽음을 불가피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재발견하고, 배우기도 한다.

가끔은 명시적으로 성찰을 하게하고, 선종하실 분들께서 자신의 죽음 때문에 슬퍼할 우리를 위로하여 주기도 하였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죽음이 올 때 견디기 쉬워질 것이다. 인간만이 죽음이라는 확실한 가능성을 인식할 줄 알고 그것에 대해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알게 된다.

죽음을 잊고 그로부터 도망쳐서 결국 일상적인 것들에 매몰되고 마는 비본래적인 태도를 버리고, 죽음을 늘 의식하면서 그것에 근거해 삶의 의미와 그 방향을 고민하는 본래적인 태도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죽음과 세상의 종말은 분명히 하느님의 심판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심판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기에, 깨어 준비하며 산 사람에게 심판은 구원이며 심판 날은 기쁜 날이기 때문 이다. 반면에 하느님 뜻보다는 내 뜻만을 찾으며 준비하지 않고 산 사람에게 마지막 날은 멸망의 날일 것 이다.

우리 모두는 천국을 향한 순례자들이다. 우리가 이 지상에 머물 시간이 많지 않지만, 우리가 한 말과 행동 이 어쩌면 우리가 사랑하는 이에게 하는 마지막 말과 행동이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너무 늦을 때까지 미 루지 말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을 지금 하기로 한다. 살아있음을 가장 큰 축복으로 여기고, 매일 매일을 충만한 기쁨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겠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 때, 부질없는 애착을 버리고 본질적인 것을 붙잡는 근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며, 마지막이라는 분명하고도 변하지 않는 사실 앞에서 그릇된 애착을 버릴 때 올바른 투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교리신학원 신학편지 / 202311월 리포트 중에서>


Articles

1 2 3 4 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