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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변수필과 철학 / 金時憲

 

 

한국에서 쓰이고 있는 수필은 대부분이 신변수필입니다. 주부들의 수필은 더욱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변수필이라 하지 않고 신변잡기라고 합니다. 수필과 잡기의 구별도 못하면서 잡기라고 하는 데는 신변수필을 격하시키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수필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수필은 체험을 중심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신변의 이야기를 떠날 수 없습니다. 운명적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도 신변수필을 많이 씁니다. 쓰면서도 자신에게 불만을 가집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신변수필을 많이 쓰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수필에 대한 안이(安易) 때문입니다. 주제에 대한 고민, 소재의 선택, 철학의 부여 등에 안이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는 붓 가는 대로 쉽게 써내려 가는 것입니다.

 

독자의 불평도 있습니다. 어느 수필도 내용이 그게 그것 같더라는 것입니다. 읽을 흥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신변수필의 약점을 극복하느냐? 이 문제를 두고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의 방법은 가족과 가정의 이야기에서 떠나 보자는 것입니다. 가족과 가정 이야기는 이미 많이 써 보았습니다. 작가 자신도 싫증이 날 때가 되었습니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야겠습니다. 구름도 있고, 나무도 있고, 차바퀴에 깔린 비둘기 시체도 있습니다. 종교 이야기도 있고, 미(美)가 무엇이냐 하는 예술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체험의 범위가 넓지 않기 때문에 신변 이야기를 떠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체험의 범위와 체험의 소화와는 별개입니다. 작은 체험도 소화의 깊이에 따라 넓고 큰 소재로 확대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신변 이야기가 아닌 것은 다루기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절실한 체험, 싸움을 벌인 체험이라야 쓸 이야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쉬운 생활 주변의 이야기에만 매달려 있으니 말썽이 생깁니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신변수필을 쓰더라도 이왕이면 사상이 있는 수필을 쓰자는 것입니다. 사상이라고 하면 우선 대단한 것으로 생각되기 쉬운데, 문학이 뭐냐고 물었을 때 "사상과 감정을 문자로 표현한 것"이라고 흔히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수필에는 필수조건으로 사상이 들어가야 합니다. 만약 사상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것은 알맹이가 빠진 문학이 됩니다.

 

모든 예술은 '사상과 감정'의 표현이라고 했을 때 문학은 다른 어느 예술 분야보다 사상을 깊게 구체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모습이 분명합니다. 어떤 때는 설명을 통해서 직접 전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실과 행위를 묘사하면서 간접적으로 전달하기도 합니다. 예술은 간접적인 표현에서 더 효과를 얻습니다. 직접적인 설명은 예술이 아니고, 철학이거나 과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필은 때로 사상을 직접 설명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문학은 다른 예술보다 사상을 문장 안에 깊게 묻고 있습니다. 그 사상이 빈약하거나 없을 때 독자는 수필에서 신문 기사와도 같은 껍데기만 얻습니다.

 

그러면 '사상이란 무엇이냐'에 이르게 됩니다. 사상과 철학은 어떻게 다르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만 그것은 우선 두고 생각해 봅시다. 민주주의 사상, 공산주의 사상, 실존사상 했을 때의 사상은 한 시대를 흔드는 세계적인 조류를 이야기합니다. '주의'가 붙으면 어느 기간 동안 사람들의 머리 속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이 가지는 사상은 누구에게나 있는 의지나 신념 같은 것입니다. 독서와 체험과 사색과 환경은 사상을 만드는 조건들입니다.

 

인생을 20년, 30년, 40년씩 살고 있으면 때로 어려운 문제와 부딪힙니다. 해결하기 위해서 생각하고 고민하다 보면 문제 해결되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내면에 신념 같은 것이 만들어집니다. 신앙과도 같은 사상이 생깁니다. 그것을 철학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하지만 철학보다는 더 힘이 있는 정신적인 어떤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유교 전통을 지키는 가정에서 자란 소년이 있었다고 합시다. 소년은 어른이 시키는 대로 예의바른 아이로 커 갈 것입니다. 삼강오륜의 도덕을 몸에 익힐 것입니다. 한문도 배울 것입니다. 어른을 만나면 공손히 인사를 하고 물을 마셔도 어른부터 먼저 마셔야 합니다. 어른이 방에 들어가면 소년은 앉았다가도 벌떡 일어나야 하고, 외출할 때는 갔다 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와서도 인사를 해야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소년은 유교 사상에 물들어 갑니다.

 

그러한 훈련을 받으면서 자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생깁니다. 유교 사상을 몸에 익힌 사람은 자신이 그 규율에 맞게 행동할 뿐 아니라, 사물을 보는 눈에도 그 사상의 색깔이 생깁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봅시다. 두 남녀가 지극한 사랑을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주위의 악조건으로 결혼을 못하고 헤어졌습니다. 가슴 안에 사랑의 한(恨)을 품은 채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한 부부 사이가 행복하다면 그 한의 부피가 조금은 얇겠지만 그러나 옛 애인에 대한 생각이 때로 살아날 것입니다. 그때 사랑의 한은 더욱 가슴 깊은 속에서 고개를 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은 생각을 만들고 낭만과 고뇌와 고독과 허무 같은 것을 동반할 것입니다. 그 고독과 고뇌와 허무를 통해서 그에게는 사상이 자라납니다.

 

사랑과 관계있는 어떤 사물에 부딪히면 그에게 잠자고 있었던 사랑의 한이 눈을 뜹니다. 따라서 그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한이지만 그 눈 속에는 낭만도 고뇌도 허무도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그가 만약 글을 썼다고 합시다. 사랑과 관련되는 소재에 부딪혔을 때 어떤 철학이 그 소재에 부여되겠습니까? 신변수필에 사상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와 같은 철학이 없거나 빈곤한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상의 눈은 예민합니다. 그것이 문제의식이 되어 사물 위에 항상 그물을 칩니다. 독특한 자기 색깔로 대상을 관찰합니다. 그리하여 소재가 포착되면 다는 아니지만 대개는 사상의 빛깔로 의미화의 작업이 일어납니다.

 

이은상은 <무상>이라는 제목의 수필을 썼습니다. 그는 젊고 유능한 동생을 잃었습니다. 동생을 잃은 슬픔과 인생의 허무를 짙게 체험하고 그 수필을 썼을 것입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죽음과 만나는 것인데 이은상이 <무상>이라는 수필까지 쓰게 된 데는 그 이전부터 인생무상의 사상을 내면에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상이 동생의 죽음을 만나자 고개를 높이 든 것입니다.

 

사상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인생의 부산물이기 때문에 없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자기 안에 있으면서도 숨어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수필을 쓰는 사람은 소재를 만나서 의미를 부여해야 하기 때문에 사상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어떤 사상이 있느냐는 자기만이 아는 세계입니다. 금광은 땅을 파고 바위를 파서 깊게 들어가야 맥이 보입니다. 은광도 그렇고, 동광도 그럴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있는 사상도 금맥을 찾듯이 자기 안에 있는 사상의 맥을 찾아야 합니다. 찾아 들어가면 반드시 맥이 나옵니다. 묻어 둔 채로 놔두니까 먼지도 앉고 녹도 슬어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갈고 닦고 키워서 활용해야 합니다. 보물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찾아보지 않는 사람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문학과 관련이 없는 사람은 무관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창작을 하겠다는 사람은 그 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상을 새로 만든다기보다 숨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찾는 일입니다. 찾아서 수필 속에 깔아야 합니다.

 

최근에 나는 <작품 외적 작품>이라는 수필을 읽었습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의 단행본도 읽었습니다. <작품 외적 작품>은 도자기 굽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흙으로 빚은 도자기를 고열의 굴속에 넣어 구운 후에 꺼내면 어떤 때는 예상외의 우수 작품이 나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우수 작품이 곧 '작품 외적 작품'이란 것입니다. 사람의 힘이 아닌 다른 힘에 의해 만들어지는 우수 작품에 대한 감탄을 쓴 것입니다. 신비라고 할까, 신의 솜씨라고 할까. 그리하여 도자기뿐만 아니라 시도, 수필도 그럴 수 있고, 신의 작품이라고 하는 인간도 그렇게 태어날 수 있다는 일종의 예술론이었습니다.

 

그 수필은 소재도 신변을 좀 떠났지만 소재에 부여된 주제와 철학이 남다른 데가 있었습니다. 단행본을 읽고 비로소 그의 사상이 어느 광맥과 연결되어 있는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예술 예찬자였습니다. 평생을 예술과 더불어 살아왔고 그 속에서 인생의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수필의 대부분이 그의 예술론과 관련을 맺고 있었습니다. 사상은 그와 같이 인간성의 바탕을 이루기도 합니다. 무슨 일에 골몰해 본 사람은 어느덧 그 문제에 대한 사상을 마음속에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작가의 생애를 더듬는 일은 사상을 알아내는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인생을 30년, 40년 살면서 어떤 사건들과 만나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있겠습니까? 설사 무위도식을 해도 그 생활 속에서 생각하고 고뇌한 문제는 있을 것입니다. 그 생각하고 고뇌한 사실들이 용광로에서 쇠를 녹이듯이 가슴 안에서 한과 고독과 환희와 열락으로 승화가 되어 자기 사상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상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심각하고 진지한 인생 사건이 없었거나, 독서도 사색도 없었던 사람일 것입니다. 사상은 사색과 체험의 산물입니다. 그것은 한번 만들어지면 생명을 가집니다. 제2의 자기 역할을 합니다. 사람은 대개 자기가 믿는 대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수필을 쓸 때, 사상은 자기 빛깔을 어느덧 글 저변에 깔게 됩니다. 그것이 무의식적일 때도 있고, 의식적일 때도 있습니다. 사상이 없는 수필 또는 철학이 없는 수필을 우리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문학이 아닐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 사상을 산만하게 흩어 놓고 정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없는 듯이 보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상이 있는 글을 쓰자면 먼저 자기 사상의 광맥을 찾아야 합니다. 먼지를 털고 녹을 닦아서 자기 사상이 어디에 숨어 있는가를 찾는 일입니다. 찾아지면 그 안경으로 사물을 보게 되고 의미화도 되어집니다. 그때 신변수필이든 신변수필이 아니든 뿌리가 있는 건실한 수필이 씌어질 것입니다.

 

 

▲필자 소개

수필가(1925∼). 경북 안동 출생. 호는 무원(無圓). 중·고교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음. 1965년 《現代文學》지에 <私談>을 발표하면서 등단. 수필집으로는 《멋을 아는 사람》, 《두만강 푸른 물에》, 《오후의 思索》, 《해질 무렵》, 《생각하는 사람》 등이 있고, 평론집으로는 《수필을 말한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