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사순 제2주간 훈화)
사순시기 숙제
어떤 신자가 사순시기 본당 신부님께서 내어주신 숙제가 많아서 힘들다고 건의했습니다. 물론 제가 의무적으로 『사순시기 프로그램』을 다 실천하라고 한 적은 없지만, 신부님의 말씀이라면 어명(?)으로 이해하는 옛날 신자들에게는 ‘주보 공지 사항이 권고가 아니라 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극기와 보속을 짐을 지는 마음으로 억지로 행하기를 바라실 리가 없겠지요. 십자가는 결코 짐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사랑과 기쁨으로 바치는 거룩한 희생입니다. 그렇다고 십자가의 무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삶이 고달프고 힘겹지만, 세상을 구원하고 인간을 살리는 희생이기에 감내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선출되신 바로 그다음 날 미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없이 걷고, 십자가 없이 뭔가를 짓고, 십자가 없이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주교일 수도 있고, 사제일 수도, 추기경일 수도, 교황일 수도 있지만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희생도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라면, 그리고 칭찬과 보상을 받기 위한 실적 과시라면 그것은 허위이고 위선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령 지금 우리가 숙제처럼 여기고 있는 『사순시기 프로그램』을 완벽하게 실천하더라도 그것이 종교적 허영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결국 남는 것은 십자가 없는 자신의 업적일 뿐입니다. 사순시기 재계의 본질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사순시기의 분위기는 외적으로는 어둡고 무겁지만, 내적으로는 밝고 가볍습니다. 십자가 나무에서 사랑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기 때문입니다. 사순시기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꼭 기억하십시오. 내가 숙제를 잘하든 못 하든 상관없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넘치도록 사랑하십니다. 한 편의 시를 소개합니다.
<사랑>
바닷가에 서면 조가비만한 나
치악산에 가면 여치만큼 작은 나
그런데 하느님은
나를 산보다 바다보다
더 크대요
더 크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