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4일에 올린 글입니다.
여러분 노사연의 '만남'이라는 노래 아시는지요?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운명 이었기에
바랄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말아 후회하지 말아
아 바보같은 눈물 보이지 말아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돌아보지 말아 후회하지 말아
아 바보같은 눈물 보이지 말아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라고 하는 내용의 노래입니다.
대중 가사의 노랫말에도 등장하듯 만남이라는 것은 소중한 것입니다.
거기에 강조라도 하듯 3월 매일 미사 중에서도
‘만남’에 대한 얘기를 묵상으로 풀어내기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왜 이런 얘기를 꺼낼까요?
얼마 전 제가 몸담고 있는 대학에서 학과 신입생과 교수와의 만남,
신입생 학부모와 교수와의 만남 등의 행사에 참석하며
‘만남’이라는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고
소중한 뜻을 부여해야겠다는 의지에서입니다.
3월 첫날 매일 미사의 묵상 내용 중 아래와 같은 부분이 실려 있습니다.
조금 풀어서 써 보겠습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라는 사람의 책 중에 『나와 너』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인간의 만남을 설명하며 두 종류의 만남을 얘기하고 있지요
하나는 ‘나와 그것’의 만남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나와 너’의 만남이랍니다.
‘나와 그것’의 만남이라는 것은
비인격적인 만남으로 필요에 따라 이용하려고 갖게 되는 만남을 말합니다.
이것은 사용 가치가 없으면 사라지게 되는 만남입니다.
이를테면 학생이 볼펜과 책, 가방 등을 만났을 때
그것은 ‘나와 그것’의 만남이 되죠.
또 다른 만남인 ‘나와 너’의 만남은 인격적인 사랑의 만남입니다.
함부로 상대를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사랑을 주고받음으로써
그 만남이 풍요롭게 되고, 발전하며, 아름다워져 가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와 자식, 연인들의 만남, 스승과 제자의 만남은
‘나와 너’의 만남입니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은
‘나와 너’의 만남이 점점 더 ‘나와 그것’의 만남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돈 버는 기계로, 자식을 공부하는 기계로,
엄마를 밥해 주는 기계로 생각하여
상대를 이용 가치에 따라 만나는 풍토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은 어떤 기계로 알고 있을까요?
점수 올려주는 기계? 아니면 점수 깎는 기계?
저는 이런 마음으로 다잡으려고 합니다.
새 학기 개강을 앞두고 과연 학생들과의 새로운 만남이
‘나와 그것’의 만남이 아니라
‘나와 너’의 만남, 즉 인격적인 사랑의 만남으로
함부로 상대를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과 선생 사이의 서로의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게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래야 그 만남이 풍요롭게 되고 발전하며, 아름다워지겠지요?
어릴 때 어른들께서 “공부해서 남주냐?”라고 하신 말씀..
저는 이렇게 지금 답하고자 합니다.
“네, 남(학생들) 주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3월 첫 주일에는 예비신자가 하느님과 첫 대면을 하는 시간을 가지지요?
그들과 하느님의 첫 만남이
서로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봄이 어떨까요?
하느님과의 만남이 풍요롭게 되고 발전하며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우리가 예비 신자들에게 관심을 가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