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일 강론)

 

탈렌트의 비유

 

제가 중시하는 사목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봉성체입니다. 지난 주 화요일 모니카 자매님을 하느님 품으로 떠나보냈지만, 어떤 분들에게는 그날의 봉성체가 생의 마지막 성체, 즉 노자성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몸이 불편해서 성당에 나와서 주일미사를 드릴 수 없지만, 한 달에 한 번 봉성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분들에게는 은총이며 죽음을 준비하는 거룩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머무는 시간으로 보면 짧은 순간이지만, 성체를 모시는 그분들의 태도와 자세를 보면 그 누구보다도 간절하고 진지합니다. 그리고 사제의 방문에 얼마나 감사하는지 어떤 분들은 빠지지 않고 교무금과 주일헌금과 함께 꼭 음료와 음식을 내어 줍니다. 그리고 어떤 할머니는 홀아비 마음은 과부가 안다고 저에게 기가 막힌 선물을 합니다. 바로 효자손입니다. 등 긁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혼자 살아봐서 잘 아시는 게지요. 죽음이 가까울수록 사람은 착해지고 따뜻해집니다.

오늘은 연중 제33주일이며 올해의 전례력도 마지막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교회는 종말을 어떻게 맞아야 하는지 거듭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탈렌트의 비유 역시 종말을 준비하는 신앙인들의 여러 유형을 소개합니다. 일단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종들은 우리들입니다. 또 탈렌트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시는 천부적인 재능을 말합니다. 주인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종들에게 각각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달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고 하는데, 이는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재능이 서로 다르며, 그 크기에 비례하여 관리 책임도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 그 당시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에 해당하는데, 이는 노동자가 16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종들에게 맡긴 재산의 규모는 상당하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만큼 종들을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자신의 재능은 그 종류가 무엇이든지 스스로 성취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것이고 잠시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 재능으로 어떤 이들은 부자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박사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예술가가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 재능을 주신 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헤아리고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공동선을 위해서도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한 탈렌트를 맡긴 종의 최후처럼 탈렌트를 활용하지 못하고 그대로 썩히면 심판 때에는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인데, 그것을 자기 것인 양 여기고 살았는지, 아니면 하느님께 돌려드릴 것으로 알고 살았는지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해도, 그것을 외면하고 자기만을 위해 살았는지, 아니면 하느님께서 재능과 함께 내려 주신 지상과제를 열심히 하였는지가 관건입니다. 그 지상과제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가정을 위해, 본당을 위해, 이웃을 위해, 사회를 위해 하느님께서 저마다 맡겨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본당 사제는 신자들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 파견된 사람입니다. 외적인 교세 확장보다 중요한 것이 신자 하나하나를 어버이처럼 사랑하고 살피는 것입니다. 이것을 등안시 하면 제가 받아야 할 벌은 일반 신자들보다 훨씬 큽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하느님께 받은 소명이 있습니다. 부모로서의 소명, 배우자로서의 소명, 직장인으로서의 소명, 공직자로서의 소명, 그리고 신앙인으로서의 소명 말입니다. 특히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는 위치와 역할이 막중한 정치인, 기업인, 공무원 등은 더 청렴하고 희생정신이 투철해야 합니다. 비유컨대, 대통령이 무단횡단한 것과 일반 시민이 무단횡단 것은 같은 죄목이라도 그 형량이 다릅니다. 권한이 많은 사람에게 주어진 책임이 더 크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심판관으로 만날 때는 살아생전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재산을 얼마나 모았는지, 치적과 공로가 얼마나 큰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성 요한은 그 심판의 기준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에 대하여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심판의 기준 또한 사랑이겠지요. 따라서 직업 소명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고 살았는지, 재산의 규모가 얼마이든 가난한 이웃과 나누었는지, 치적과 공로의 목적이 나의 영광이 아니라 공동선에 있었는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살아생전의 능력과 재산, 그리고 활동들은 다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 능력과 재산, 그리고 여러 활동들을 통해 누군가를 진정 사랑했다면 그 가치와 의미는 영원히 하느님 나라에서 빛날 것입니다. 달란트를 두 배로 늘린 종들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최초 맡겨진 달란트는 나의 재능과 소유, 그리고 건강이라면 배로 늘어난 달란트는 바로 하늘나라에 쌓는 사랑의 보화일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애덕 실천의 방법은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또 내가 배가 시킬 수 있는 달란트가 무엇인지 묵상해 보십시오. 금전이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노력봉사도 훌륭한 탈란트입니다. 누군가를 위한 기도와 따뜻한 칭찬 한마디도 훌륭한 탈란트입니다. 돈이 없어서 실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없어서 실천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음 주면 그리스도왕 대축입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과 탈렌트를 셈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보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