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고종 1년)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와서 통상하기를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요인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조선에 와 있던 몇몇 가톨릭 교도들은 대원군에게 건의하기를 한.불.영 3국 동맹을 체결하게 되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 하여, 대원군으로 부터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으니 당시 지방에서 포교하고 있던 다블뤼 주교와 베르뇌
주교가 서울에 돌아왔을 때는 조정에서 이미 러시아인의 월경과 통상요구가 시일이 경과하여
한낱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을 때 였다.
그리하여 3국 동맹이 체결되면 포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선교사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그들은 지둔(遲鈍)과 무책임한 주선(周旋)의 발설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톨릭교를 서학(西學), 사학(邪學)이라 하여 배척하던 당시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학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조대비(趙大妃)이하 정부 대관들이 가톨릭 교도의 책동을 비난하자 대원군은 이들 가톨릭 교도를 탄압하기로 결심하였다.
1866년 가톨릭교 탄압의 교령(敎令)이 포고되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학살당한 것을
필두로 불과 수개월 사이에 국내 신도 8,000여명이 학살 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직도 체포되지 않은 3명의 프랑스 신부의 행방을 찾고 있었고, 이 사건으로 산 속에 피신하여 쫓겨 다니다가 병으로 죽고 굶주려 죽은 부녀자와 어린이가 부지기수였다고한다.
이때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가 톈진(天津)에 있는 프랑스 해군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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