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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가는 나그네를 읽고...

윤기선 글라라

    

몇 해 전 월간 가톨릭 다이제스트를 정기 구독할 때 김길수 교수님의 한국 천주 교회사강의가 연재된 적이 있었다. 매달 한편씩 실려 온 이야기들이 너무 아름답고 감동적이어서 매번 눈물바람을 하였다. 연재가 끝나고 하늘로 가는 나그네라는 제목으로 상, 하 두 권의 책으로 나오게 되었을 때 얼른 인터넷으로 주문하였다. 책이 오자마자 단숨에 읽어 내려가며 눈을 뗄 수가 없었고 가슴이 아파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책장 속에서 살아남아 있다가 순교자 성월이 되면 다시금 꺼내어 읽곤 한다. 이 책은 한국 천주교회가 형성된 배경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주며, 한국 천주교회의 특징인 평신도에 의해 세워진 자생교회인 점과 가성직 제도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세계 유래가 없는 이런 특징들을 통해 우리 신앙선조들의 신앙에 대한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책을 읽으며 우리를 반기는 성인들을 만나본다.

북경에 가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 베드로, 천주교 서적을 구해 수 개월간 두문불출하며 탐독한 뒤 마침내 발견한 진리를 이웃에게 전하고자 한 광암 이벽의 환희에 찬 발걸음을 느낄 수 있고, 사제를 모셔오기 위해 천리 길을 마다않으셨고, 외국 신부를 잡으려는 포졸들을 따돌리며 대신 매 맞아 순교하신 회장님들을 만날 수 있다.

당시의 신분제도와 성 차별 속에서도 최초의 여회장으로 주문모 신부님의 사목을 돕고 전교 활동에 힘쓰신 강완숙 골롬바, 하느님 나라를 본적도, 글을 읽을 줄도 모르건만, 성령께서 주신 지혜로 당당히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도 만난다. 하느님께 받은 모든 재능을 오직 하느님 사업에 전력투구하신, 보장된 신분과 부와 명예를 버리신 황사영 알렉시오를, 장미향기 가득한 동정부부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의 이야기까지.. 뭇 사람들에게 천주교가 무엇이기에 이들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믿을까?’ 라는 의문을 던지게 하고, 인간으로서 도저히 살 수 없는 감옥 속에서도 천주교 신자들이 서로 아끼고 돕고 나누는 모습으로 전하는 복음, 사제가 없는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사제 영입운동을 계속하며, 교우촌을 형성하여 신앙을 지키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에서 숙연함을 느끼게 한다. 또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낯선 조선이라는 나라에 하수구를 통해 기어 들어오신, 상복과 방갓을 착용하고 사목하신 외국인 신부님들, ‘맨 바닥에서 자는 잠, 영양가 없는 식사, 건조한 기후 속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잠도 못자면서 일하고 배고픔에 시달리는..’ 순교하기 전에 이미 죽음의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으신 신부님들의 이야기 앞에서는 얼마만큼의 용기가 있어야 이런 선교를 할 수 있습니까하고 되뇌기도 하였다. 사제는 신자들을 목숨 바쳐 지킬 양떼로, 신자들은 사제를 믿고 따를 목자로 여기며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등불은 꺼지지 않는다. 조선 왕조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육신 성삼문과 성 김대건 신부님의 죽음의 모습을 통해 우리 신앙이 추구하는 가치관을 알 수 있다.

절개를 지킨 성삼문이 새남터에서 사형당하기 전 마지막 남긴 시 한 구절을 살펴본다.

둥둥둥 북소리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고

고개 돌려보니 해가 서산으로 저무는 구나

황천 가는 곳 주막하나 없다는데

오늘밤 나는 어디서 머물고

이 절명시를 통해 저무는 황혼에 생을 마감하면서 느끼는 허무를 느낄 수 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똑같이 순교하신 김대건 신부님은 죽음의 마지막 칼날을 받기 전에

모였던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나는 지금까지 주님을 위해 일해 왔고 이제 이 목숨을 바치려 합니다. 바야흐로 나를 위한 새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나처럼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느님을

믿으시오. 믿고 봉헌 하시오.“

부활 신앙에서 오는 삶과 죽음의 가치관을 살펴 볼 수 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어떻게 순교 할 수 있었을까? 그분들은 현세의 팍팍한 삶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희망을 본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진리와 선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한 분들이었다. 천주교를 진리로 우선 받아들인 양반과 지식층들은 교회를 떠나갔지만 중인, 서민, 아녀자들은 남아서 교회는 계속 유지되고 성장해 나갔다. 자신의 기득권을 우선시하는 사람들보다도, 하느님을 가장 우선으로 모신 충실한 이들이 뽑힌 것이다. 나는 그동안 책을 읽거나 순교자의 삶에 대해 묵상하며 곧잘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하게 퇴색되어지고 나의 일상은 같았으며 인내심에도 변화가 적었다.

그래서 올해는 순교자 성월을 맞아 책을 읽고 어떻게 순교자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묵상하며 사랑에 대해 자주 생각해 보았다.

또 다른 책 쿼바디스에서 네로 황제 시대 교회 공동체의 모임을 묘사한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다. ‘신을 떠받드는 것은 무엇인지 이익을 얻고자 하거나, 신의 노여움을 살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진심으로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제껏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 어떤 종교 의식도 이렇게 거룩하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거기에는 진리를 알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숭고함이 있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순교자들이 드린 미사의

모습이라고 생각되어졌다.

사랑이 무엇인가.‘

나 하나를 세상 무엇보다 귀하게 여겨주며 살과 피를 나누어주신 말없는 부모님의 사랑

내가 어릴 적 처음 주일학교 첫 영성체 교리반에 들어갔을 때 받았던 사랑들

내가 자녀를 낳았을 때, 내가 이전에 만난 어떤 인연에게도 다 주지 못한 온 마음을

나의 아기들에게 쏟을 수 있었던 것

내가 살면서 느꼈던 애정, 존경, 연민, 감사 그 모든 감정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나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에 대해 묵상해보았다. 비할 데 없는 황송함이었다.

순교자들은 그 무엇보다 하느님께 충실함, 갈림 없는 사랑을 하느님께 드리고 그분께 신의를 지키며 죽는 것을 충신의 도리로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과 함께 하느님의 사랑을 영적으로 깊게 체험하신 그 순교자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나는 이해한 것일까? 요즘 사랑과 함께 내 마음을 맴도는 말은 삶이 틀리면 영성도 가치가 없다.’라는 말이다. 어떤 한 부분에서만이 아니라 신앙은 내 삶 전체에서 조화를 이루어야함을 깨닫는다. 성실하고 상냥한 신앙인의 내 모습과, 작은 손해에도 금방 발끈하는 옹졸한 내 마음, 상처를 간직한 채 부정적인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는 나의 나약함도 하느님 안에서 치유되고 성장하기를, 하느님을 향해 걷는 나의 발걸음이 쉬지 않기를 기대하며 기도한다.

하루 일과를 마치면 고단한 몸을 씻어내고 저녁미사를 간다. 미사에 집중하며 내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목소리와 단정한 몸짓으로 참례하려 애를 쓴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기보다는 긴장감이 유지된다. 또한 나의 작은 기도 소리와 함께 미사를 드리는 교우들의 기도소리가 합해지는 것이 들리고, 미사를 집전하시는 신부님과 우리의 소리가 하나의 기도가 되어 하느님께 전달되어진다고 느끼게 된다.

태풍이 오기 전 날 미사를 마치고 나오며 다들 엷게 미소를 짓는데, 거세지는 바람 속에 한 자매님이 하느님 없이 못살지.’하신다. 그 말을 들으며 내게 신앙생활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힘들고 어려울 때나, 기쁘고 감사하고 가슴 벅찬 일들, 위로가 필요할 때,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일들 그 모든 것을 들어주시고 함께 해주시는 하느님께 의탁해서 살아가는 삶이다.

하느님을 만난 것은 나에게 다행이고 기쁨이고 자랑이고 위안이고 위로며 영광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사랑이신 주님,

욕심이 많은 저, 당신께 끊임없이 특별한 사랑을 갈구하는 철부지, 제가 여기 있나이다.

언제나 저와 함께 계시고, 무엇보다도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허락하소서.

하느님, 저를 당신께로 이끄소서. 저의 모든 것이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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