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 주간(9월 1-7일)
순교자와 증거자
전수홍 안드레아 신부 (토현성당 주임)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는 몽 마르뜨(Mont martre)라고 불리는 ‘순교자의 산’이 있다. 초 세기부터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쌓아둔 언덕이었다. 여기서 ‘마르뜨’(희랍어로는 마르투스, μαρτυς) 즉 순교자란 용어는 본래 ‘증거자’(증인)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초 세기에는 증거자라는 통일된 의미로 사용되던 이 용어에서 언제부터 순교자란 말이 분리되어 나왔으며, 오늘날 증거자와 순교자라는 말은 어떻게 구분될 수 있을까?
신약성경에서는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요한 18,37), 사도 바오로가 스테파노를 지칭하여 “당신의 증거자”(사도 22,20)로 사용하고 있으며, 예수를 “충실한 증거자”(묵시1,5; 3,14)로 또는 “나락에서 올라오는 짐승에게 살해된 두 증인”(묵시 11,3)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오늘날 의미의 순교자로 표현하지 않고 증거자로 사용하고 있다.
교부시대에 와서도 초기 대부분의 교부들은 아직 증인, 증거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2세기 중엽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르푸스가 순교하고 나타난 ‘폴리카르푸스 순교록’(2장 2절)에서 마르투스가 처음으로 ‘피의 증인’(순교자)을 뜻하는 낱말로 사용했다.
우리 교회는 전통적으로 순교의 개념을 다양하게 써왔다. 먼저 순교는 목숨을 바쳐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로서 ‘붉은 순교’,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려고 감옥에 갇히거나 고통을 감수한 사람들은 ‘녹색 순교’라는 단어로 묘사되었다. 중세기 아일랜드 지역의 수도자들은 자신들의 정결한 수도생활을 ‘백색 순교’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 순교자를 규정할 때는 좁은 의미로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곧 순교는 실제로 죽임을 당해야 하고, 그 죽음이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진리를 증오하는 자에 의해서 초래되어야 하고, 그 죽음을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진리를 옹호하려고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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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3주간(9월 8-14일)
한국천주교회의 성모 신심 역사
전수홍 안드레아 신부 (토현성당 주임)
성모 신심은 한국교회의 창설 때부터 형성됐는데, 1791년 모친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운 진산사건으로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현 야고보는 순교하기 전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여러 번 불렀다. 1798년 순교한 이도기 바오로와 다음 해 순교한 방 프란치스코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했으며, 1801년 순교한 홍낙민 루카는 매일 묵주기도를 바쳤고, 김광옥 안드레아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큰 소리로 묵주기도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초기 신자들의 성모 신심을 확연히 보여주는 증거는 동정녀의 존재였다. 윤점혜 아가다를 비롯한 많은 동정녀의 출현은 정결을 강조한 주문모 신부와 당시 널리 보급된 서학서 ‘칠극’*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동정에 대한 인식의 확산은 바로 성모 신심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836년경에는 성모님 특별히 공경하고 그분의 전구를 청하기 위해 묵주기도를 바치는 평신도 신심단체인 ‘매괴회’와 교우들이 자신을 성모님의 종으로 봉헌하며 특별한 보호를 청하는 ‘성의회’(聖衣會)가 설립되었다.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는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를 조선교회의 주보로 정해줄 것을 교황께 요청해 184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로부터 승인받음으로써 조선의 성모 신심은 더욱 활성화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광복절이 성모 승천 대축일과 겹치면서 그것이 곧 한국교회의 주보인 성모 마리아가 보살핀 결과라는 인식 아래 성모 신심이 특별히 강조되었다. 아울러 기존의 마리아 관련 단체와 더불어 외국으로부터 새로운 신심 단체들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1953년 3월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셀 기도)에 이어 그해 5월에는 레지오 마리애가 도입되었다. 1976년에는 이탈리아로부터 마리아 사제 운동(다락방 기도모임)과 성모의 기사회가 도입되었으며, 이처럼 역사와 전통 속에서 성모 신심은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신심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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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4주간(9월 15-21일)
현대적 의미의 박해와 순교
전수홍 안드레아 신부 (토현성당 주임)
오늘날 종교의 존재 필요성이 의문시되고, 수많은 신흥종교와 반 그리스도적인 가치관들이 기승을 부리는 이 신앙의 위기 시대에 현대적 의미의 순교를 생각해 본다.
오늘날은 칼을 들이대는 박해는 없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 쉬고 있다. 특히 우리 한국교회에서 세례받은 신자 중 주일미사를 꾸준히 드리는 신자는 약 20%가 채 안 될 정도라고 한다. 나머지 80%가 냉담 아니 배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박해도 없는데 왜 이렇게 많은 이들이 냉담, 냉동(?)을 할까? 잘 생각해 보면 현대에도 박해가 있다.
우리 신앙인으로 하여금 성당에 나가지 못하게 하거나 미사에 빠지게 하는 모든 요인이 바로 현대적 의미의 박해들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신자들 간의 갈등과 무관심, 경제적 문제, 감염병 확산 같은 천재지변, 제도교회에 대한 불신, 성직자의 권위주의, 지인의 결혼식, 여행, 등산, 부부싸움, 자녀교육 같은 요인들을 들 수 있겠다. 이처럼 다양한 현대적 의미의 박해 요인들이 주일미사를 빠지게 하고, 또 미사를 거르면 고해성사를 해야 하는 부담으로 다시 쉬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현대적 의미의 박해 요인들은 과거 박해시대에 신자들이 겪었던 신앙에 대한 위기 못지않게 위협적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박해 요인들을 극복하고 더 우선으로 내 신앙을 앞에 둘 수 있다면, 그래서 관에 들어갈 때까지 주님을 따르는 확고한 신앙을 간직하고 지켜갈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현대적 의미의 순교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에는 꼭 피를 흘려야만 순교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심을 생각하고 우리가 관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 자신의 묵주와 십자가를 쥐고 살아갈 수 있다면 이미 우리는 훌륭한 현대적 의미의 순교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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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5주간(9월 22-28일)
성모님께 의탁하며
최재현 베드로(레지아 지도신부)
병에 술을 담으면 술병이 되고, 물을 담으면 물병이 됩니다.
통에도 술을 담으면 술통이 되고, 물을 담으면 물통이 되고,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그릇도 마찬가지입니다. 밥그릇도 되고, 국그릇, 찬그릇이 됩니다.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자주 자주 씻거나 소독까지 철저히 하여 좋은 대접을 받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소독은 커녕 대충 씻어 쓰다가 그냥 버려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럼 우리 마음에는 무엇을 담아야 하겠습니까?
특별히 우리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의 마음에 성모님을 담으려고 입단하였습니다.
성모님을 닮은 생활로 자신의 성화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대열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본에서는 우리들 마음에 담겨 져 있던 자기 현시, 이기심, 자만심, 아집 등 여러 가지 자기가 뱀의 머리를 솎아내고, 성모님의 참된 신심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성모님의 정신으로 채워진 마음의 그릇에서 깊은 겸손과 온전한 순명을, 천사 같은 부드러움, 용기와 희생으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우리 이웃들에게 나누는 봉사를 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도들입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점차 우리들 마음에 채워져 가는 성모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데 최선을 다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성모님께 자기 자신을 의탁하는 레지오단원이 되어
성모님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받는 사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연중 제26주간(9월 29일 -10월 5일)
사랑
최재현 베드로 (레지아 지도신부)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
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
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
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
입니다.”(1코린 12,31. 13,4-8ㄱ.13)
코린토 1서에 나오는 바오로 사도의 사랑에 관한 말씀입니다. 참 아름다우면서도
우리 삶을 깊이 있게 돌아보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교우들에게 사랑에
관한 말을 한 이유는, 주님께 받은 은사를 서로 자랑하며 자신을 은근히 내세우는
잘못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언을 하고, 지식이 많고, 믿음이 강하고,
병을 고칠 수 있고, 신령한 언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을 자랑하면서 내가 남보다
능력이 좋고 우월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본 바오로 사도는 그들에게 이런 은사보다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주겠다.’
고 하면서 사랑을 제시하였고, 사랑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참고 기다리는 것, 친절한 것, 시기하거나 뽐내거나 무례하지 않는 것,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것 등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를 향한 사랑이지, 자신이 받은 은사를 자랑하고 스스로를 높이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 말씀은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은사가 빛이 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과의
관계를 잘 해야 한다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아무리 좋은 은사를 받았다 해도
사람과의 관계가 좋지 않거나 인성이 부족하면 그 은사는 빛을 잃고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우리가 레지오 단원으로 활동하는 것도 더 사랑하고 겸손히 살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은 다른 모든 은사보다 뛰어난 길입니다.
오늘 나의 삶을 돌아보고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