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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07월호
이달의 훈화
연중 제16주간 - 연중 제19주간

최종훈 토마스 신부 광주대교구 사목국 부국장

연중 제16주간(7월 17-23일)
봉사에 대하여

초대교회의 이야기 속에는 서로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나눔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나눔을 공평하게 할 봉사자 7명을 선출합니다(사도 6,1-4). 봉사자를 선별하면서 사도들은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 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라고 할 수 있는 ‘디아코니아(διακονία: diakonia)’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번역됩니다.
첫 번째는 2절과 4절에서 ‘봉사’라는 단어로 번역됩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며 힘들고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교본에서는 인내와 용기 없이 이 사도직을 실천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반드시 노고와 고통을 짊어져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레지오 교본, 제4장 레지오 봉사).
하지만 이 단어는 1절에서 ‘배급’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봉사는 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받기 위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은총과 축복을 받기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기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없음에 공감하고 같이 아파하고 같이 기뻐하는 마음이 바로 봉사입니다. 또한 디아코니아는 3절에 ‘직무’라고도 번역됩니다. 봉사는 우리에게 선택이 아닌 의무입니다. 시간이 남아서 하고 넉넉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특히 성모님의 군대인 우리는 ‘기도’와 ‘봉사’라는 무기로 완전히 무장해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르타가 마리아의 몫을 시샘했던 것처럼 다른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시기하고 질투하지 말아야 합니다(루카 10,38-42).
봉사는 힘든 일입니다. 봉사는 나만 쌓아놓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며 기뻐하는 일입니다. 봉사는 우리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고 희생하고 봉사하셨던 그 사랑을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 다른 이에게 보여주는 사랑이여야 합니다. 봉사의 기쁨과 행복을 찾으시길 기도합니다.


연중 제17주간(7월 24-30일)
성가정 묵상(루카 2,22-40)

우리들은 누구나 ‘함께’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 ‘함께’라는 의미는 다툼과 불화의 의미가 아니라 행복과 나눔, 희생과 인내, 그리고 사랑과 신뢰의 의미일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의 성가정은 이 함께함을 살아가기 위해서 제일 먼저 법에 따라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하느님께 감사하였고, 또한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바라면서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였습니다.
함께함의 시작은 바로 이런 봉헌일 것입니다. 감사함의 봉헌이고 축복의 봉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바라보는 그 사람이 아홉 가지를 해놓고 한 가지를 하지 않았다고 그 사람에게 짜증부리고 하나를 또 다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때문에 오해하고 미워하고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아홉 가지에 대한 감사함과 고마움으로 살아가는 것일 겁니다. 아니 아홉 가지를 하지 않고 한 가지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 한 가지에 감사하는 것이 함께함을 배워나가는 것일 겁니다. 또한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살아가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함께함이란 그를 하느님의 축복으로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내 의도로, 내 뜻으로, 내 무엇인가로만 생각하고 판단하고 다루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으로, 축복으로, 그리고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습에 내어 맡겨드리며 기다리는 우리들의 인내입니다. 급하지 않게, 그리고 섣부르지 않게 그를 바라봐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감사함의 봉헌과 내어 맡김의 봉헌은 고통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며 언제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루카 2,35) 아픔을 맛보셨습니다. 내가 희생해야 하고 내가 인내해야 하기 때문에 아마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함은 고통입니다. 아픔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지금도 충분히 그 함께함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을 때, 우리의 함께함은 “자라나게 되고,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지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을 것입니다.”(루카 2,40). 바로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연중 제18주간(7월 31일-8월 6일)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일까요? 누군가를 용서하고 그들과 화해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용서하기 보다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자리를 피하거나, 무관심의 눈빛으로 마냥 쳐다보기만 합니다. 아니면 내가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립니다. 또한 그 미움들을 내 가슴의 일부분인양 안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가끔 그 미움의 수치가 올라갈 때면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 그들을 헐뜯고 상처를 내면서 또 다시 무관심의 힘을 얻고 살아갑니다.
왜 우리는 용서하지 못할까요? 아마도 다른 사람을 가엾은 마음으로,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나에게 상처 주었기에, 나를 아프게 했기에 우리들은 그들을 미움으로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길을 떠나 엘리사벳을 찾아가셨던 성모님의 모습을 묵상하여 봅니다. 엘리사벳은 먼 길을 걸어온 어린 마리아를 바라봅니다. 초라하고 나약한 여자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엘리사벳은 그 안에 있는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고,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이도 복되십니다.”(루카 1,42)라고 인사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도 엘리사벳의 태중에서 뛰놀고 있는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했을 것입니다.
겉모습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관이 아니라, 또한 그 사람에게서 나의 억울함과 나의 아픔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신비와 은총을 바라보아야합니다. 내가 상처 받고, 내가 아파하고, 내가 슬퍼할 것만 같은 두려움 속에서는 절대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용서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바라보기 보다는 나처럼 이들도 하느님의 은총과 신비를 지니고 있음을, 그들도 사랑받고 있음을 알아가는 것이 우리가 걸어가는 용서의 첫 걸음 일 것입니다. 화해하십시오. 그들의 안에 있는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더욱 사랑하십시오.


연중 제19주간(8월 7-13일)

길은 목적지가 아닙니다. 길은 머물러 있는 곳이 아니고 어디론가 향하는 곳입니다. 길에서 살아갈 수도 없으며 길을 통해 우리들은 누군가에게, 그리고 무엇으로 도달하게 만들어 줍니다. 또한 그 길은 목적지로 향하게 하는 과정이지 목적지는 아닙니다. 우리의 삶들도 어쩌면 그 길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을까요!!
우리들의 삶은 행복을 향하여, 그리고 사랑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려 노력합니다. 때로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잘못된 길을 가다가 가까운 거리를 멀리 돌아오기도 합니다. 어쩔 때에는 이 길이 아니다 싶어 다른 길을 찾기도 합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보면서 기뻐하기도 하고 눈물짓기도 하면서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희망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삶이라는 길을 걷고 있는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그리고 무엇인가를 향해 끊임없이 멈추지 않고 걸어갑니다. 그럼 여러분은 무엇을 향하여 지금 걸어가고 있습니까? 아니 신앙인으로서 예수님과 같이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예수님과 같은 목표와 가치로 나의 삶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나의 욕심과 나의 성공만을 향하여, 누구 하나 아랑곳 하지 않고 나만의 행복을 위해 걸어가고 있지 않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만의 욕심을 채우는 그런 길을 걸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파하고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 ‘가장 나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향해 걸어가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로 향하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분명 나만 배부르고 나만 행복하고 나만 사랑받는 나라는 아닐 것입니다. 함께 배부르고, 함께 행복해 하며, 함께 사랑받는 그런 나라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런 길을 걷기를 두려워합니다. 귀찮고, 아프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수고스럽고, 부족함만 느끼고, 아등바등 살아가야하기 때문에 그 길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길을 걸어가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바라보셨던 그 길을 걷고 계십니까? 아니면 나만의 행복을 바라며 하느님의 나라와 정반대인 길을 걸어가고 계십니까? 예수님과 함께 힘들고 어렵지만 그분의 길을 따라 걷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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