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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노 곱비 신부와의 대담(1987년)

성모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들 사제들에게

이 글은 1987년 9월 28일에서 9월 30일까지 한국 인천 샤미나드 피정의 집에서 있었던 스테파노 곱비 신부님과의 대담 내용입니다. 시간이 많이 경과된 글이긴 하지만 다락방 메시지와 마리아사제운동을 이해하는데 여전히 많은 도움을 주고 있기에 소개합니다.

 


신부님이 성모님의 메시지를 받으실 때 묵상 속에서 어떤 영상을 보시는 것인지 혹은 어떤 글자를 보시는 것인지 메시지를 받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해주십시오.

그 질문은 이 책 (성모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당신 사제들에게 )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 질문의 뜻도 밝히고 나의 대답도 밝히는 의미에서 몇 가지 전제를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파티마에서 성모님으로부터 내가 받은 메시지를 돌이켜 보면 이렇습니다.
성모님은 내게 세 가지 요구를 하셨습니다. 첫째는 기도하고 둘째는 고통을 참아 받으며 셋째는 당신이 이 일을 하도록 당신께 맡기어 두고 선전 같은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선전을 하다 보면 당신이 시작하시는 이 운동이 밀라노 교구 밖으로도 퍼져 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도 그 말씀에 동의하면서 위안을 가졌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선전 사무실이 따로 필요 없음을 생각하면서 나 자신을 위로하였습니다. 정말 하늘나라에는 선전 사무실이 따로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성모님이 하시고자 하신다면 그분이야말로 선전 없이도 이 일을 해내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성모님은 이 운동을 전 세계에 퍼져 나가게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이 운동을 넓게 확장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깊이 있게 만드셨습니다.

성모님은 사제들의 생활을 내적으로 변혁시키셨습니다. 이 운동을 하는 데 있어서 성모님은 하나의 연장을 쓰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책 「성모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당신 사제들에게」입니다. 하느님의 사업이 모두 그렇듯이 이 책도 역시 반대받는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에 대한 몇 가지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세계 여러 나라말로 이 책이 번역되었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운동에 자원해서 참여한 사람들의 돈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하는데는 어떤 다른 인간적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지 않았습니다.
바티칸에서 어떤 추기경님은 이 일을 놓고 한번 조사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 운동의 배후에는 분명히 어떤 재정적인 후원자가 숨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추기경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운동의 재정 문제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 운동을 후원하시는 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재정적 후원자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에게는 은행이 따로 없습니다. 바티칸 은행도 그분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분의 은행에 우리가 입금한 것은 매우 큰 가치가 있습니다. 그 재정적 후원자는 바로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입금한 것은 다름 아닌 기도하고 보속하는 것뿐입니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하느님의 섭리에서 오는 돈으로 출판된 것입니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 중국어 등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운동이 전 세계에 퍼져나갔고 그 정신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확실히 반대받는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모님께서 내게 주신 메시지를 모아놓은 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사제들은 이런 일반적인 메시지에 그다지 큰 열성을 내지 않습니다. 자발적으로 그러한 메시지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책을 한 두 페이지 읽고 그 메시지란 것을 보고는 그 다음에는 바로 쓰레기통에 넣어 버립니다. 그렇지만 성모님은 그러한 메시지의 형태를 택하셨습니다.

이제 성모님의 메시지를 받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모님은 말씀으로 내게 당신의 메시지를 듣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우리가 서로 음성을 듣듯이 귀에 들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떤 생각의 형태로 받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인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내가 만난 어떤 신부님은 이 책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모두가 나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고 묻더군요.
그것은 내 생각이 아닙니다. 성모님은 마음에 느끼는 그러한 말씀으로 내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하고 물으시겠지요. 여러분도 한번 그것을 해보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마음으로 느끼는 말씀이기 때문에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것은 내적 담화, 하나의 신비적 현상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영성신학에서 설명하고 있는 그런 현상입니다.
나는 먼저 마음 속에 성모님의 말씀을 느낍니다. 그리고 내 머리 속에서는 인간의 지성으로 그와 같은 표현이 더욱 명시적으로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나는 내 지성에서 나오는 것보다는 마음 속에서 느끼는 말씀을 기록합니다. 내 지성으로 마음 속에서 느끼는 그것을 판단할 때 그것이 덜 완전한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그것을 나타냅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우리가 어떤 사실을 지성에 의해서 기록하려 할 때 우리의 지성은 우리가 기록하는 것보다 먼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먼저 기록하고 그 내용을 그 다음에 깨닫습니다.

따라서 이 책에 대한 진정성 문제가 자연히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어쩔 수 없이 그것을 교회에 품신할 수밖에 없고 교회만이 그에 대한 공식인정을 해 줄 수가 있습니다.
외적 형태로 교회라고 하면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영적 지도신부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책도 내가 출판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메시지를 지도신부에게 전해 주면 그가 알아서 출판합니다. 나는 순종하는 뜻에서 그에게 모든 것을 맡깁니다. 그리고 그것의 열매로서 그 진정성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책은 수많은 사제들의 삶을 변혁시켰습니다. 뉴욕에서 만난 30세된 한 젊은 사제는 이 책이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 사제는 결혼을 해서 아이를 둘 데리고 와서는 "내가 예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나는 아직 사제직에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티 없으신 성모성심께 대한 봉헌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가요?

그것은 봉헌 예식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행사입니다. 성모님께서 내게 알려주신 하나의 기도 형식이 있는데 그 기도문을 바치면 되는 것입니다.
이 봉헌에는 두 가지 중요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것을 행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것을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봉헌 예식을 하고서 그것을 생활화하지 못 한다면 그 봉헌은 무익한 것이 됩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생활에 옮기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모님께서 메시지를 통하여 사제들이 보속행위로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성모님께서는 보속행위로서 5주간을 요구하시고 있습니다. 그 5주간의 첫 토요일에 드리는 신심은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신심이라고 봅니다.
사실 그것은 파티마의 메시지에도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사제들의 보속행위보다는 봉헌에 더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 운동의 본질은 교황님과의 일치를 이루게 하고 신자들을 티 없으신 성모성심께 대한 봉헌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봉헌은 생활의 체험을 요구합니다, 그 체험은 우리 생활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 사제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러한 봉헌의 체험적 생활을 하도록 성모님께 초대받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와 성모님신부님이 1972년부터 마리아 사제운동을 시작하시면서 체험한 성모님과의 특별한 신심은 어떤 것이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기억으로는 어릴 때부터 나는 성모님께 대한 각별한 신심을 지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평상적인 신심이었고 특별한 것이었지만 예외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내가 환시를 보거나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내게 주신 소명도 신심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제가 된 후 나는 나의 사제직을 티 없으신 성모성심께 봉헌했습니다. 역시 다른 사제들처럼 그렇게 신심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본당을 맡아 일을 하고 공립고등학교에서 정규 학과목을 가르치기도 했지요. 처음 파티마의 체험을 했을 때는 그 체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이해하게 되었지요. 그러고 보면 나도 상당히 합리주의적인 사제였던가 봅니다. 나 역시 그런 메시지를 읽으면 계속 읽기보다는 쓰레기통에 처넣는 그런 성품이었지요. 그래서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 체험을 한 후 성모님과 나의 관계는 바뀌었습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자주 성모님을 뵙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봉헌을 생활화함으로써 성모님과 친밀해지도록 노력했기 때문이지요. 나는 지금 그분이 내 삶 속에 현존하심을 느낍니다. 성모님은 당신을 믿고 신뢰하도록 나를 북돋아 주시지요. 이제 그분과 나의 관계는 깊어졌고 마치 그 관계는 어머니와 아들과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별한 관계는 나하고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제와도 이루어진다고 나는 봅니다.

 

성모님의 메시지는 사제들에게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실천방식을 제시하고 있는지요.

이 메시지는 사제들에게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행동방식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과업이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이지요. 여러 가지 운동을 통해서 각자는 자신이 원하는 실천 방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이 운동으로서 요구하시는 것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다락방 모임 」입니다. 다락방 모임을 통해서 이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이 모임은 사제들 사이에서도 신자들 사이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메시지 가운데에도 다락방 모임과 관계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모님은 사제들이 다락방에 모이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몇 명이 모이는가 하는 숫자는 문제가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같이 모여서 예루살렘 다락방에 있었던 일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함께 모여서 토론이나 주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과 함께 있으며 기도하고 서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락방의 3가지 요소입니다.

모임을 갖는 방법은 로사리오 기도를 한 단 바치고 그런 다음 메시지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봉헌을 생활화하겠다는 뜻에서 로사리오를 바칩니다. 또한 이 다락방 모임은 고립을 느끼는 사제들의 형제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제들은 고립을 느끼고 절망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의 고유한 문제가 있습니다. 누구한테 그 문제를 얘기하겠습니까? 우리가 형제들처럼 함에 모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도울 수가 있습니다.
나와 같은 문제를 가진 다른 사제의 문제를 내 문제처럼 느끼며 서로 사랑을 나누며 모든 면에서 서로를 돕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봉헌을 드립니다. 이것이 운동으로서 요구하시는 성모님의 뜻인 다락방모임입니다. 이 운동은 기도가 적은 우리 사제들에게 기도하게 해주기 때문에 특히 유익한 것입니다. 정말 오늘날 우리는 성모님과 함께 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알려진 성모님의 메시지라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 모든 메시지들을 우리가 전적으로 믿어야 하는지요.

메시지들 가운데는 참된 것도 있고 거짓인 것도 있습니다. 우리가 메시지를 판단할 때는 세 가지를 놓고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공적 계시와 상합하는 지에 대한 여부입니다. 둘째는 교회에 대한 순종입니다.
왜 메시지에는 진짜와 가짜가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인류가 정말 성모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따라간다면 회개에 이르고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거짓 메시지는 성모님의 참된 메시지를 받아들여 행동하는 데에 균열을 이루게 합니다. 오늘날 사탄은 그럴듯한 많은 메시지를 만들어 내어서 소위 메시지 홍수를 이루어 놓고 있습니다.
발현도 무한하게 많이 일어나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사람들은 메시지와 발현이 너무 많으므로 그것들은 분별하기보다는 못 믿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메시지와 발현마저도 그 목적을 이루지 못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사제들은 마땅히 분별의 정신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두 극단을 피하고 전부를 받아들여서도 안되고 또 전부를 배척해서도 안되겠습니다.

 

「성모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당신 사제들에게」의 책에는 신문도 보지말고 TV도 보지 말라고 했는데 이것이 곱비 신부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인지 모든 신부에게 해당되는 것인지 듣고 싶습니다.

그러한 문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는 그 책의 서문에 썼습니다. 상식적인 선에서 성모님의 말씀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나 자신도 자구적으로는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도 신문을 보지요. 그것은 필요한 것입니다.
나는 사실 그 문장에 대한 성모님의 뜻은 이렇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제들이 너무 많은 시간을 TV 앞에서 허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사제들의 기도와 묵상과 공부의 시간을 훔치는 일이기 때문이 때문입니다. TV는 큰 중요성을 지닌 사회 홍보매체에 속합니다. 그것은 사람을 세뇌시킬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고방식을 주입시키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사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몇 년 전 이태리에서는 낙태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있었습니다. 물론 교황님을 비롯하여 모든 주교님들은 큰 범죄로 규정짓고 모두 반대의사를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간 내내 어떤 TV에서는 정당과 정치인들이 나와서 그것을 찬성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그 결과 62%가 찬성투표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TV를 통해서 우리의 사고방식을 형성하지 말라는 것이 성모님의 뜻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성모님의 그 메시지를 자구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문제를 지혜롭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이 메시지는 내게 곤란한 문제를 많이 야기했습니다.

 

곱비 신부님께서는 한 달에 3번 정도 메시지를 받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신부님이 한국에 오시어 한국교회와 사제들을 위하여 받으신 특별한 메시지가 있는지요.

일정하게 한 달에 3번 정도로 메시지를 받지는 않습니다. 평균적으로 3번 정도 받는 것이지요. 1년 통틀어 보면 21-28번 정도로 메시지를 받습니다. 76년 이후로는 공적인 메시지와 사적인 메시지를 함께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공표가 가능한 공적인 메시지와 사적인 메시지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번 여행 중에는 메시지를 4번 받았는데 그것은 출판이 가능한 공적인 메시지들입니다. 처음은 9월 8일 동경에서. 다음은 9월 15일 아끼다에서 그 다음은 9월 27일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오늘 인천에서 받았습니다. 서울에서 받은 메시지는 한국과 상당히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곱비 신부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신부님의 메시지는 현재의 절박성을 얘기하는 종말적인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하느님의 정의의 잔이 가득 차서 넘치려 하고 있다. 정의의 심판이 내릴 단 계에 들어섰다.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멸망의 문턱에 들어서 있다"는 등의 시간적으로 겁을 주는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메시지에는 세상의 종말이라는 얘기는 절대 나오지 않으니 확실히 해주시길 바랍니다. 먼저 그 책 전체를 읽어보라고 권고하고 싶습니다. 오늘 나는 1975년 1윌에 받은 메시지를 다시 한번 읽어보았습니다.
그 메시지의 내용에는 그 후에 받은 메시지의 발전된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메시지 속에는 앞으로 언젠가 복음의 내용들이 마치 지어낸 얘기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나에게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라는 말씀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인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포기하고 무신론적 문명을 건설하는 것이지요.
인류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와 실천적 무신론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공산주의는 이데올로기의 무신론적 세력으로서 존재합니다. 북한, 중공. 러시아 등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실천적 무신론이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는 하느님의 자리에 우상들이 놓여 있습니다, 쾌락, 돈 이것들이 우상입니다. 그야말로 쾌락주의적 문화를 돈, 그것이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인류가 하느님 없는 무신론 천국을 건설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느님이 없이는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인류가 사랑할 능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소위 기독교 국가라는 모든 나라들이 인공유산을 합법화했습니다. 수천만의 아기들이 엄마의 태중에서 살해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무죄한 아이들의 학살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웃사람의 선을 더 이상 존중하지 않습니다. 사방에서 절도, 폭력, 납치 등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저녁을 먹고 밖에 나가기가 무서울 정도입니다. 이기주의와 증오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것들에 의해 가끔 국가들 사이에 분쟁이 생겨 전쟁을 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인류자체가 자기 손으로 인류를 멸망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그러한 인류를 보고 내내 걱정을 하시고 계십니다. 악이 증대해 가면 위험도 그만큼 더 커집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을 보상하는 가치있는 행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가 바로 우리가 시급히 해야할 과제이지요. 메시지에서 성모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 여러 나라에 발현하실 때마다 반복하신 말씀입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인류가 하느님께 돌아오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하느님께로 돌아오면 평화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인류가 하느님에게로 돌아오지 않는 한 평화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성모님의 메시지에는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모님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시대의 종말이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시대라는 것은 세상이라는 말과는 다르지요. 성모님은 세상이 끝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시대가 끝난다고 말씀하시고 있지요. 그 시대라는 것은 악의 세력이 횡포를 떨치고 있는 그 시기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시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머지 않아 티 없으신 성모성심이 승리를 이루어 그리스도께서 다스릴 시기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통치가 온 세상을 쇄신시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문명이 거기에 건설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이기주의와 증오입니다. 앞으로 다다를 새 문명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바울로 6세를 비롯하여 많은 교황님들이 사랑의 문명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령이 주시는 선물이 되겠습니다. 아마 그것은 처음의 그 오순절보다 훨씬 큰 형태로 세상에 퍼져 나갈 것입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영을 보내시면 땅의 얼굴이 새로워질 것이라는 말씀처럼 온 세상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사실 여러 교황님들은 앞으로 다다를 새 시대를 새로운 성령강림으로 이미 예고하신 바 있습니다.
처음의 그 오순절 성령강림은 많은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토론에 그쳤던 것도 아닙니다. 다락방에 모였던 사도들이 무슨 학술대회를 하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성령강림은 사도들이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던 가운데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성령강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모님은 우리에게 그 다락방 모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다락방에 모여 당신과 함께 기도를 올리자는 것이지요. 다시금 성령강림을 맞이하기 위해서이지요. 또한 교황님께서도 그러한 모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온 성교회가 성모님을 모시고 다락방 안으로 들어 갈 것을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저희들의 다양한 질문에 곱비 신부님은 서슴없이 명쾌한 대답을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성모님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고 계신지요.

성모님은 어떤 메시지에서 내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나 내 사업에 필요한 빛을 비추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 사업에 관한 대답을 할 때는 성모님께서 나를 비추어 주시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사업이 아닌 다른 분야의 질문을 받을 때는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내 힘이 미치는 데까지 그 대답을 하려고 모색합니다. 그러나 이 운동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는 성모님으로부터 특별한 도움을 얻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아니고요. 꼭 필요한 만큼만 주시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모인 사목하는 모든 사제들이 공통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일이 있는데요. 베이사이드에서 나온 메시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 메시지에 대한 신부님의 생각과 그 대처 방안을 듣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곱비 신부의 이름을 들어 베이사이드 메시지는 진짜가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발현은 거짓된 것이었습니다. 1983년에 뉴욕에 갔던 일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는 주교님을 만났습니다. 처음 그 발현이 있었다는 몇 년간은 진짜인 듯한 사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발현을 본 사람이 영적 지도신부의 지도를 받지 않음으로서 그것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지요. 그리고 그 발현이 거짓으로 확인되는 이상한 메시지들이 나타났습니다. 구원의 원반이라든가 어떤 도시에 재앙이 쏟아져야 한다든가 하는 것 등입니다. 무서운 징벌을 예고하는 이런 식의 메시지는 성모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성모님이 공개하실 수 없는 악담이지요. 그것은 공적으로 퍼뜨릴 수 있는 얘기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두고 공적으로 험담을 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성모님이 그런 모범을 보이실 까닭이 있겠습니까? 베이사이드의 발현은 가짜인 것입니다.

 

신부님은 1972년부터 성모님의 메시지를 받기 시작하셨다고 했는데 성모님께 봉헌하셨을 때 성모님과 어떤 단계에 있었는지요.

이해를 돕기 위해 4단계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굳이 4단계로 구분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그러한 단계는 시간적으로 구분되는 그런 과정들은 아닙니다. 성모마리아와 함께 기도하기 위해서 모이는 그 순간부터 성모님은 이미 우리를 변모시키는 그런 작업을 시작하십니다.
벌써 성모님은 우리 마음에 들어와 당신과 친교들 이루고자 하시고 우리 안에서 살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므로 첫째 단계에 이르면 우리는 이미 다른 단계의 생활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나의 경우는 그 때에는 초기 단계에 있었고 지금은 그 강도가 훨씬 커졌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곱비 신부님은 성모 마리아께 생활 전체를 봉헌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봉헌을 하면 어떤 어려움이 있고 또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첫 단계부터 어려움이 있습니다. 봉헌을 하고 헌신적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어려움이 닥쳐옵니다. 항상 어떤 저항에 부딪혀서 거기에 맞서 대항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단 그런 장애를 극복하게 되면 다른 나머지 문제들은 훨씬 쉬워집니다.
성모님은 매우 단순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우리가 보통 살고 있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당신 현존의 표지를 우리는 볼 수 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에 너무 복잡하게 얽혀들지 말아야 합니다.

 

「파티마」「바뇌」「루르드」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의 모습이 각각 다르고 또 각지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이 서로 다른 것처럼 믿고 있는 신자들이 있는 듯합니다. 사실 저희 사목자들도 때로는 혼동될 때가 있습니다. 신부님이 생각하시기에 성모님의 그러한 발현과 메시지가 교회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각지에서 나타나신 성모님은 서로 다른 그런 자매들은 아닙니다. 같은 한 분의 성모님이시지요. 따라서 「어디의 성모」 라고 할 그 둘째 마디의 「성모」라는 단어에 모든 중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파티마」「바뇌」「루르드」「아끼다」 등의 첫째 마디의 단어들은 발현하신 지명을 따서 붙여진 이차적인 것들입니다. 첫째 마디의 단어들에다가 너무 강조하다 보면 그 파당이 만들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시샘을 내는 자매들처럼 루르드의 성모는 파티마의 성모하고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것처럼 취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운동에서 우리가 왜 파티마의 성모님께 봉헌을 드리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봉헌을 파티마의 성모님께 드린 까닭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 운동이 바로 파티마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은 파티마에서 주신 그 메시지와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티 없으신 성심의 승리를 이룰 것이라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파티마에서 예고된 것이지요. 그러나 일정한 것은 「동정녀 성모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원한다면 다른 곳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을 택하여 봉헌을 드려도 상관없습니다.

 

성령이 운동은 사제들을 위한 운동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요즈음 마리아의 공경에 있어서 사제들에게 어떤 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제들이 어린 시절 교회가 너무 지나치게 성모님의 공경을 강조한데서 그것에 대한 반감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신부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항상 과장이라는 것은 균형을 벗어나게 합니다. 그렇지만 주 예수와 성모는 언제나 우리를 조화와 균형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로마 가까운 곳에 성모 성지가 한군데 있는데 바울로 6세께서는 그 성모님을 "전구를 필요로 하는 시대의 성모"라고 말씀하시고 그 성모님의 명칭을 「균형의 성모」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성모 마리아는 "오늘 우리가 하는 매사의 일에는 죄가 깃들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확실히 부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는 죄가 있거나 또 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또 이 시대에 와서 젊은이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우리를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곳으로 이끄십니다.
매사를 죄라고 해서도 안되고요. 죄인 것을 죄로 보아야 합니다. 극단적인 것을 피하고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갖고 걸어가면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성령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의 내적인 균형은 더욱 확고할 것이고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진정한 마음의 자유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신부님이 기왕에 한국에 오셨으니 한국의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하루동안 대화 형식으로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달할 계획이 있으신 지요. 만일 없으시다면 차후에 한국에 오시어 그러할 계획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성모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라도 오고싶고 또 저 개인적으로도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어떤 신부님들은 한국 신자들은 신심에 약간 과장이 있다고 내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신자들이 성모상 앞에서만 걸음을 멈추어 버린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미 한국 신자들이 성모님께 보이는 신심은 적극적인 현상입니다.
광주에 갔었는데요. 그곳에는 이미 5천명의 신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저녁 9시 30분부터 밤 11시까지 다락방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5천명의 신자들은 계속 남아서 철야기도를 드렸습니다. 전 세계의 어디에서도 이런 현상은 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 여러분은 일을 하십시오. 어떤 행사를 하는 것만이 성모님에 대한 신심을 높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내면화하고 내적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성모님은 어디까지나 우리를 예수께로 이끄시는 길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신심을 성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에게로 방향을 정해 주어야 합니다.
벌써 한국의 신자들은 기초가 잘 되어 있으니까 그것을 바탕으로 일을 해나가면 잘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자들이 성모님을 향하고 있는 신심 자체가 우리가 크게 평가할 수 있는 가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국인에게 주시는 성모님의 은총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성모님은 한국은 무신론의 거대한 압력을 막는 댐을 쌓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악의 세력이 창궐할 것을 성모님께서 예견하셨다면 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큰 기적을 일으키시어 그것을 막으시지 않으시고 여러 곳에 발현하시어 소극적 방법으로 우리에게 그것을 대처하게 하시는지요.

어떤 큰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도 아무 것도 변하는 것이 없이 모든 것을 그대로 남겨 놓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어느 신부님과 로마의 어느 신학대학의 교수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교수의 지론은 천사들의 얘기는 모두가 꾸며낸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도 전부가 사실이 아니고요. 지금 우리에게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면 우리의 시각적 환상을 누가 도용해서 하는 짓이라는 그런 지론이 먼저 나타날지 모릅니다. 라자로의 부활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믿었지요.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를 죽여 없애야 하겠다는 말을 먼저 꺼냈습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기적이란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마음을 바꾸어 놓고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회개에 도달하게 하고 인간의 사고방식을 바꾸어 놓는 것이 진짜 기적인 것입니다. 성모님이 여러 곳에 발현하시는 것은 그 같은 확실성을 제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당신께서 인간의 마음을 바꾸어 놓으시기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신부님은 매우 바쁘게 생활하시는데 바쁘신 가운데 하루에 묵주기도를 얼마나 하시고 성체조배를 얼마나 하시는 지에 대하여 묻고 싶습니다.

로사리오 기도를 바칠 때 나는 항상 15단 전체를 바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나는 항상 돌아다닐 때가 많이 있기 때문에 자동차 안이나 그 밖의 장소에서 묵상 속에서 감실 안에 계신 예수를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직접 감실 앞에 나가서 흠숭을 드리지 못하지만 감실 안에 계신 예수와 일치를 이룹니다.

 

신부님이 성모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으실 때 성모님이 직접 나타나시어 말씀하시는 것인지 마음 속에서 떠오르는 것인지 그리고 주어진 메시지가 단순한 자기의 생각인지 성모님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어떻게 구별하는 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메시지는 나의 지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 속에서 느끼는 말씀입니다. 나는 확실하고 분명하게 그 메시지를 느낍니다. 먼저 말씀을 느끼는 데 그것이 때로는 명사 하나나 동사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 나의 지성은 더욱 완전한 단어 하나를 암시해 줍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을 내 마음 속에 느끼면 내 지성은 더 효과적인 표현을 내게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마음 속에 느끼는 그것을 지성에서 하는 말보다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메시지는 내 귀로 듣는 말이 아니며 내 생각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내 마음 속에 느끼는 말씀인 것입니다.

 

신부님께서 한국의 어떤 성당을 방문했을 때 성모상이 성당 안에 없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성모상이 반드시 성당 안에 있어야 라는 것인지 성당 밖 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보다 깊은 얘기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침에 대성당에 대한 얘기를 했던 것은 성모상을 성당 밖으로 내보내려 하는 일부의 사람들의 자가당착적 행동을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성모상을 성당 안에 모시어 두면 예수님이 그늘에 가린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우리를 예수께로 이끌어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톨릭 교리에도 어긋나는 것이 됩니다.
성인과 순교자들에 대한 공경은 이미 교회 초세기부터 있어 온 것입니다. 가톨릭 교리에는 성인이나 순교자에게 공경의 예를 드리고 성모 마리아에게는 특별한 공경의 예를 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모상이나 성인상을 성당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자가당착에서 하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신부님은 성모상이 본당 안에 너무 많아서 내보려고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로마의 대성전에는 성모의 상본과 석상이 합해서 열 개는 됩니다. 상대적인 숫자지요. 신자들을 교육시켜 올바른 신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성모상의 숫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락방 모임은 어느 정도의 기간을 두고 모여야 하며, 모임의 시간은 얼마나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이태리의 방식을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태리에는 교구 단위로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이태리에는 약4,500명의 사제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 사제들은 전체 교구에 모두 퍼져 있지요. 그들은 한 달에 한번 다락방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어느 교구에서는 반나절 모임을 갖고요. 또 하루 종일 갖는 곳도 있습니다. 그리고 일년에 한번 전체가 어느 큰 성지에 모여 하루종일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모임의 방법은 오늘처럼 하면 되지요. 10시경에 로사리오를 시작하고 그 다음 신부님의 강론을 1시간 정도 듣고 다시 로사리오를 드리면서 성체조배를 드립니다. 오후에는 이와 같은 친교 모임을 갖고 그리고 묵상을 하고 미사를 드립니다. 미사 중에는 보통 봉헌식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성모님을 은총의 중개자라고 말씀하시는데 은총의 중개자라는 데는 동의를 합니다. 그런데 성모님을 모든 은총의 중개자라는 표현이 있는데요. 모든 은총은 성모님을 통해서만 내리게 되는 것인지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이것은 구속사업과 비슷한 관계에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은총의 원천은 천주 성부 한 분뿐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은총을 내리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구속사업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총을 거져 주셨습니다. 모든 은총은 그리스도에게서 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성부께서 아무에게나 은총을 주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은총은 성부와 성자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성부께서 주시는 가장 탁월한 선물은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모든 은총은 성령으로부터 주어진다고 말해야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중개 역할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 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모성에다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고 우리의 어머니이시며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은총은 먼저 아버지에게서 출발하여 성자에 의해 우리에게 거져 얻어지고 성령에 의해 주어집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그것을 분배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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