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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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님의 순교 장면

 

순교하시기 전에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주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치셨습니다.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나의 하느님과 종교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으며

이제 내게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후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신봉하십시오.”

그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신부님께서는 형리에게 편하게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자세를 묻고 그의 주문대로 자세를 취해 주셨습니다.

 

2011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 대축일

웹진 편집실

조학균 신부님의 전례 이야기

대축일과 장례미사

조학균(베드로) 신부

 

연중 13주간에는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성 베드로 바오로 사도 대 축일, 그리고 예수 성심 대축일이 있는 대축일 주간(?)이다. 대축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典禮憲章)의 정신을 따라 1970년에 개정된 로마교회력(Calendarium romanum)에서 가장 큰 축일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축일은 모두 14개인데 그중 10개는 고정(固定) 대축일이고, 4개는 이동(移動) 대축일이다.

 

고정 대축일은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1월 1일), ‘주님 공현 대축일’(1월 6일), ‘성 요셉 대축일’(3월 19일), ‘성모영보 대축일’(3월 25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6월 24일),‘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6월 29일), ‘성모승천 대축일’(8월 15일),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11월 1일),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12월 8일), ‘예수성탄 대축일’(12월 25일) 등이다. 그런데 주님 공현 대축일만은 한국과 같이 의무축일로 지내지 않는 지역에서는 1월 2일과 1월 8일 사이의 주일을 그 축일로 지낸다.

 

이동 대축일은 ‘삼위일체 대축일’(성령강림 대축일 다음 주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삼위일체 대축일 다음 목요일, 그러나 한국과 같이 의무축일이 아닌 지역에서는 삼위일체 축일 다음 주일로 지낸다), ‘예수성심 대축일’(삼위일체 대축일 다음 주간의 금요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마지막 주일) 등이다. 이밖에 지방교회력에서만 대축일로 지내는 축일이 있는데, 한국교회의 예를 들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7월 5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9월 20일)과 같은 것이다.

 

당연히 대축일에는 교회에서 성대하게 그 날을 보내야 하는데, 그 시기에 집안에 상을 당하게 되면 장례미사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물론 교회에서는 “의무 대축일, 파스카 성삼일, 대림시기, 부활시기의 주일”을 제외하곤 장례미사를 봉헌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즉 주일은 작은 부활절이며 주일에 미사를 통해 부활의 신비를 축제로 재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례의 정신과 규범에 의하여 주일에 거행하는 장례미사는 더욱 풍요로운 부활의 신앙을 성사적으로 드러내는 표지이며, 찾아가는 선교의 커다란 장이 되기 때문이다.

 

장례미사의 등급은 연중 주일 미사 등급보다 더 높은 미사이기에 평일에도 두 개의 독서와 3개의 제대초, 그리고 부활초를 켤 수 있도록 하여 부활의 의미를 전례적인 표징으로 드러내도록 하고 있다. 전례력에서는 장례미사 때 짧은 강론을 하되, 고인에 대한 찬사 중심의 강론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제대에는 꽃을 놓지 않고 악기는 소박하게 사용한다.

1독서 강론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2역대기 24,18-22)

안토니오 신부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와 함께 있는 이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이와 함께 있는 이는 선택에 있어서 각각 다른 것을 찾게 됩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만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함께 있는 이가 무엇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신앙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을 찬미하며 마지막 숨을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가 죽은 다음에 참으로 나쁜 선택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합니다. 신하들에게 그의 침상에서 살해되는 비극을 격게 되는 모습을 보았다면 결코 여호야다의 아들 즈카르야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마지막이 지금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는 것입니다.

 

17 여호야다가 죽은 다음, 유다의 대신들이 와서 임금에게 경배하자, 그때부터 임금은 그들의 말을 듣게 되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던 아하즈야가 예후에 의해서 죽게 되자, 아하즈야의 어머니 아탈야가 유다를 통치하려고 집안의 왕족을 다 죽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왕자인 요아스를 아하즈야의 누이인 여호세바가 몰래 빼내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탈야가 6년동안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요아스는 하느님의 집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여호야다 사제가 요아스에게 기름을 부어 임금으로 세우고, 아탈야를 체포하여 성전 내부와 통하는 왕궁의 입구에서 죽이게 됩니다.

 

여호야다 사제는 자신과 온 백성과 임금 사이에 계약을 맺고, 주님의 백성이 되기로 하고, 바알신전을 허물고, 바알의 사제 마탄을 제단 앞에서 죽였습니다. 온 나라 백성이 기뻐하였고, 아탈야가 칼에 맞아 죽은 뒤로 도성은 평온해졌습니다.

이렇게 요아스는 일곱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마흔 해 동안 다스렸습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 사제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야다 사제가 죽자 하느님을 저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어린 자신을 살려주고, 왕으로 세워준 공을 잊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여호야다의 아들까지도 죽이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가 옆에 있느냐가 중요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18 그들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 이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렸다.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가르침을 받으며 하느님 백성을 통치하는 것을 부담으로 느꼈을 지도 모릅니다. 권위 있고 힘으로 통치하는 왕이 아니라 하느님의 섬기는 왕이었으니 여호야다가 죽은 다음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알고 있는 신하들이 요아스에게 다가와 우상을 섬기도록 유혹을 했고, 요아스는 그 신하들의 말에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19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이 예언자들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였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요아스는 배은망덕했습니다. 하느님의 집에서 6년 동안 살아가면서 아탈야의 칼에서 목숨을 건졌지만 하느님을 배신했습니다. 오히려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느님의 사제 여호야다 때문에 목숨을 건지고, 왕위에 오르기까지 하였지만, 여호야다가 죽은 다음에는 여호야다를 잊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요아스의 죄상을 이야기하고, 회개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요아스는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20 그때에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잘될 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요아스에게 여호야다의 아들 즈카르야를 사로잡아 말씀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잘될 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서 “내 아들이야 알아주겠지!”하면서 아들을 보냈지만 결국 소작인들은 아들을 죽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도 “즈카르야는 알아주겠지.”하고 즈카르야를 보냈지만 요아스는 결국 즈카르야를 죽이게 됩니다.

 

요아스는 하느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를 잡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요아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잘될 리 없고, 하느님께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21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임금의 명령에 따라 주님의 집 뜰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 죽였다. 22 요아스 임금은 이렇게 즈카르야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바친 충성을 기억하지 않고, 그의 아들을 죽였다. 즈카르야는 죽으면서,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하느님을 섬기는 왕이었던 요아스 주변에는 옳은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없었고, 요아스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해 주는 사람뿐이었습니다. 요아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아마도 여호야다 사제의 가르침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육체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들의 욕구를 눌러야 했으니 좋아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나타나 자신들의 죄상을 꼬집으니 그를 제거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인지도 모릅니다.

 

좌우지간 배은망덕한 요아스는 자신을 살려주고,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한 여호야다의 아들 즈카르야를 성전 뜰에서 죽이게 됩니다.

 

즈카르야는 죽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배은망덕의 극치는 바로 요아스 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아스가 자신이 받게 될 벌은 아직 생각하지 못합니다. 요아스는 오직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을 생각합니다. 우상숭배에 빠져 쾌락에 찌들어 버리니, 하느님을 섬기는 엄숙함이나 고행 등은 생각하기도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언자들의 말에 완전히 귀를 막았던 것입니다.

 

남을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내 죄를 다른 이들에게 덮어 씌워서도 안 되고, 내 욕망을 다른 이들을 통해서 충족해서도 안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면 내 눈에서는 피눈물이 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내가 무죄한 이를 죽인다면 그 벌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음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착한 일을 한 이들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한 일을 한 이들에게는 벌을 주시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즈카르야는 이것을 알고 있었고, 주님께 맡기고 숨을 거두게 됩니다.

 

또한 배은망덕해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을 생각하지 않으면 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합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옥중에서 쓰신 편지의 내용처럼,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하면 아니 남만 어찌 같으리요.”라는 말씀과 “곡식이 염글지 아니하고 밭 거둘 때에 빈 대와 껍질만 있으면 주인이 땀낸 수고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밭에 거름 내고 들인 공부로써 그 밭을 박대하나니, 이같이 주 땅을 밭을 삼으시고 우리 사람으로 벼를 삼아, 은총으로 거름을 삼으시고 강생 구속하여 피로 우리를 물 주사, 자라고 염글도록 하여 계시니, 심판 날 거두기에 이르러 은혜를 받아 염근자 되었으면 주의 의자로 천국을 누릴 것이오. 만일 염글지 못하였으면 주의 의자로서 원수가 되어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으리라.”라는 말씀을 꼭 기억하면서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고,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요아스와 같은 삶을 살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순교 대축일을 맞이하여 요아스와 같은 삶을 살지 않도록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처럼, 죽음에 처해진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는 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독서 강론

의롭게 된 이들의 삶과 희망

(로마5,1-5)

웹진 편집실

예수님을 굳게 믿고 있는 신앙인들은 그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구원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 믿음 때문에 어떠한 환난도 자랑으로 여기며, 주님의 뜻을 이루고자 합니다. 순교자들이 피를 흘리고, 마침내 목숨을 내 놓으면서 까지도 웃으며 마지막 숨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에 모든 것을 주님 위해 내어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 때문에 주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평화를 누리는 삶, 그 삶이 바로 신앙인들의 삶입니다.

 

1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졌다는 것이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것인데,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기쁘게 받아 주십니다. 이제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죄를 뉘우치고 회개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생명, 구원)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 제사를 통하여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 아버지와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평화는 바로 죄와 벌과 그로인한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은 상태를 말합니다.

2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통하여 얻은“죄의 용서와 구원”을 움켜잡게 만들고, 회개의 삶으로 드러나게 만들어 줍니다. 결국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새로운 품위를 누리며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 모든 것들은 오로지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무슨 자격이 있어서 우리가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생활하는 이들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잃었던 영광을 다시 희망하게 됩니다. 그 영광은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두 눈으로 뵙는 것이고, 그 영광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며, 그 영광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받으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간직한 이들은 이 영광을 희망하며, 기쁘게 모든 것을 내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박해나 순교마저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4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5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환난을 당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고 있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환난을 당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것을 믿는 이들은 자랑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싱싱한 달걀과 상한 달걀은 4.5%의 소금물에서 구분이 됩니다. 그 얼마 안 되는 소금물에서 상한 달걀은 위로 떠오르고, 싱싱한 달걀은 물 속에 가라 앉아 있습니다. 환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겪는 환난은 견딜 수 없는 환난이 아니라 견딜 수 있는 환난입니다. 그 환난을 이겨낼 때 우리는 인내를 배웁니다. 또 그 인내를 통해서 수양을 쌓고, 변화된 나의 모습은 희망을 자아내게 합니다. 인내를 통해 내 몸과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수양입니다. 그렇게 내가 주님 안에서 살아가게 될 때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희망은 내가 꿈꾸는 헛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이 내 안에서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시고, 알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살아가게 해 주십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면서 환난을 인내하고, 그 인내를 통해서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변화된 나는 세상적인 것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희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결코 헛된 희망이 아님을 성령께서 보증해 주십니다.

 

순교자들은 굳은 믿음 안에서 환난을 이겨냈고, 고난과 역경 속에서 인내하며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자세를 더욱 굳건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천국을 희망하며 기쁘게 목숨까지도 내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내 생명을 내어 놓는다 할지라도 손해가 아님”을 알게 하고, “내 모든 것을 내어 놓아도 반드시 붙잡아야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임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헛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 줍니다.

 

내가 믿는 것과 내가 희망하는 것이 내 삶으로 드러나고 있는지는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삶으로 인내와 수양을 통해 구원에 대한 희망을 고백하지 못한다면 나는 믿음이 부족한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환난속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인내하셨고, 고통과 수난을 인내하시며 자신의 삶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죽은 후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신봉하십시오.”라고 말하며 자신이 희망하고 있는 것을 당당하게 선포하셨습니다. 나 또한 이런 믿음을 통해 구원에 대한 확실한 희망을 가지고, 주님의 자녀로서 기쁘게 살아가야 합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聖 김대건 신부님의 옥중서한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 무시지시로부터 천지만물을 배설하시고, 그 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님자를 아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은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이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배주배은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하면 아니 남만 어찌 같으리요.

씨를 심는 농부를 보건대, 때를 맞추어 밭을 갈고, 거름을 넣고 더위에 신고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씨를 가꾸어, 밭 거둘 때에 이르러 곡식이 잘되고 염글면, 마음에 땀낸 수고를 잊고 오히려 즐기며 춤추며 흠복할 것이요, 곡식이 염글지 아니하고 밭 거둘 때에 빈 대와 껍질만 있으면 주인이 땀낸 수고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밭에 거름 내고 들인 공부로써 그 밭을 박대하나니, 이같이 주 땅을 밭을 삼으시고 우리 사람으로 벼를 삼아, 은총으로 거름을 삼으시고 강생 구속하여 피로 우리를 물 주사, 자라고 염글도록 하여 계시니, 심판 날 거두기에 이르러 은혜를 받아 염근자 되었으면 주의 의자로 천국을 누릴 것이오.

만일 염글지 못하였으면 주의 의자로서 원수가 되어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으리라.

우리 사랑하온 제형들아, 알지어다. 우리 주 예수 세상에 내려,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시고 괴로운 데로조차 성교회를 세우시고 고난 중에 자라게 하신지라.

그러나 세상 풍속이 아무리 치고 싸우나 능히 이기지 못할지니, 예수 승천 후 종도 때부터 지금까지 이르러 성교 두루 무수 간난 중에 자라니, 이제 우리 조선에 성교 들어온 지 오~육십년에 여러 번 군난으로 교우들이 이제까지 이르고, 또 오늘날 군난이 치성하여 여러 교우와 나까지 잡히고 아울러 너희들까지 환난 중을 당하니, 우리 한 몸이 되어 애통지심이 없으며, 육정에 차마 이별하기 어려움이 없으랴.

 

그러나 성경에 말씀하시되, 작은 털끝이라도 주 돌아보신다 하고 모르심이 없어 돌보신다 하셨으니, 어찌 이렇다 할 군난이 주명 아니면 주상주벌 아니랴. 주의 성의를 따라오며, 온갖 마음으로 천주 예수의 대장의 편을 들어, 이미 항복 받은 세속 마귀를 칠지어다.

 

이런 황황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앗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야 위주 광영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여기 있는 자 이십 인은 아직 주은으로 잘 지내니 설혹 죽은 후라도 너희가 그 사람들의 가족들을 부디 잊지를 말라.

 

할 말이 무궁한들 어찌 지필로 다하리, 그친다. 우리는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 만나자.

 

마음으로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너희 이런 난시를 당하야 부디 마음을 허실히 먹지 말고 주야로 주은을 빌어, 삼구를 대적하고 군난을 참아 받아, 위주 광영하고 여등의 영혼 대사를 경영하라. 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사주 구령사에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 성녀의 자취를 만만 수치하여, 성교회 영광을 더으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하실 때를 기다리라.

 

할 말이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하야 못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여 사랑을 친구하노라.

부감 김 안드레아

 

<추신>

세상 온갖 일이 막비주명이오, 막비주상주벌이라. 고로 이런 군난도 역시 천주의 허락하신바니 너희 감수인내하여 위주하고 오직 주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 오래지 아니하야 너희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 주실 것이니 부디 설러 말고 큰 사랑을 일워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사후에 한 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 잘있거라.

복음 강론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태10,17-22)

웹진 편집실

1.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1821년 충청남도 당진의 솔뫼에서 태어나 부모의 깊은 신앙을 물려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는 16세 때 파리 외방 전교회 모방 신부에게 발탁되어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신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845년 8월 17일 상하이 인근의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으셨습니다. 그해 10월 나바위 인근의 바닷가로 입국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선교사들이 입국할 수 있는 뱃길을 알아보려다 1846년 6월 5일 붙잡혀 그해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그때 나이가 26세의 젊은 나이셨습니다.

 

페레올 주교님께서는 김대건 신부에게 선교사가 해로를 통해 입국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님은 1846년 5월 14일에 신자들과 함께 서해안으로 나가 5월 29일에 관리들의 감시망을 뚫고 백령도에 도착하여 조업 중인 중국 어선의 선원들과 접촉하여 페레올 주교님의 편지와 자기의 편지(조선 입국을 대기하고 있는 베르뇌 신부와 메스트르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조선지도 등을 전달하고 황해도 순위도에까지 무사히 돌아왔으나 이곳에서 6월 5일에 체포되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다섯 명의 신자들과 함께 해주 감영에 끌려가 네 차례에 걸쳐 심문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받았고, 다시 한양의 포도청에 이송되어 40차례에 걸친 심문과 고문을 받으셨습니다. 재판관들과 대신들은 김대건 신부님의 외국어(중국어, 라틴어, 불어 등) 실력과 폭넓은 서양 지식에 놀랐고, 어떤 대신들은 김대건 신부님께 지리서 편술과 세계 지도(영국제)의 번역을 부탁하여 옥중에서 두 장의 지도를 채색하여 한 장은 국왕에게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재능은 조정의 인정을 받아 일부 대신들은 김대건 신부님을 위한 구명운동을 벌여 그에 대한 판결이 3개월이나 연기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1846년 6월에 세실 제독이 세 척의 군함을 이끌고 충청도 홍주에 나타나 기해박해 중에 세 명의 프랑스 선교사(앵베르 범주교님, 모방 신부님, 샤스탕 신부님)들을 처형한 사실을 항의, 문책하는 서신을 주민들을 통해 조정에 전달했습니다. 이는 조선 정부가 천주교와 김대건 신부님에 대해 강경책을 취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순교하시기 전에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주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치셨습니다.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나의 하느님과 종교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으며 이제 내게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후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신봉하십시오.” 그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신부님께서는 형리에게 편하게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자세를 묻고 그의 주문대로 자세를 취해 주셨습니다.

 

1949년 11월 25일에 교황 비오 12세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한국의 모든 성직자의 특별 수호자로 선정하였으며, 돌아가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 6일에 성인으로 시성하였습니다.

 

삶의 가치를 온전히 하느님께 두고,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대로 받아들이고, 온 삶으로 고백하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축일을 맞이하여 나 또한 세상 것 보다는 하느님을 위한 것에 조금 더 마음 쓰는 그런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2.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어떤 어려움을 당할 것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온갖 고통 속에서도 성령께 모든 것을 맡기며, 끝까지 이겨낼 수 있도록 권고하십니다. 그들의 유혹이나 박해에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들은 박해나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주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고, 주님을 증거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조심해야 할 사람들은 나를 유혹하여 내 신앙을 빼앗아 가는 사람들입니다. 교묘하게 내 신앙을 흐려 놓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당당하게 맞서야 하고, 내 믿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신앙 때문에 사회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가장 조심해야 할 대상은 바로 나 자신일 때가 많습니다. 세상적인 출세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버리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타종교 재단에서 자신의 신앙을 감추고 그곳에 동화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타협하고, 내 신앙을 버렸다는 것을 내 주변 사람들은 보고 있고,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또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움이 많이 발생하는 곳이 가정인 듯 합니다. 가정에서 종교가 달라 서로 갈등 속에 살아가는 많이 있습니다. 자신이 믿는 종교를 강요하기도 하고, 믿지 않는 이들은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신앙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진실은 언젠가 통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가장 조심해야 할 대상은 바로 나 자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3. 박해는 주님을 증거할 기회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취조를 당할 때, 순교자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살려주세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진리를 가르쳤고, 당당하게 예수님을 증거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께서는 순교자들을 이끄시어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순교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지 않고서는 온전히 자신의 신앙을 보존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처지에 있든지 기도하며,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 주님께서는 나를 이끄시어 주님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순교자 조 용삼 베드로에 관한 기록을 읽어 봅시다. 아버지와 함께 포졸들에게 잡혀서 길을 가는 동안 조 베드로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하였다. 이번에 나는 천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으니, 나는 틀림없이 순교자가 될 것이다.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 물으니, 조용삼 베드로는 ‘아무도 자기 결심과 자기 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약하고 불쌍한 제가 어떻게 감히 순교하기를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관장 앞에 끌려갔는데, 첫 번 신문에서부터 아버지는 그의 어리석은 자만과 자신의 힘을 너무 믿은 데 대하여 벌을 받아 슬프게도 굴복하였다. 관장은 베드로에게 ‘너도 배교하라’고 말하니 조 베드로는 ‘저는 배교할 수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아니 네 아비가 목숨을 보전하려고 하는데 너는 죽기를 원한단 말이냐?’ 조 용삼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하늘에는 두 임금이 없고 사람은 두 마음이 없습니다. 이제 제가 원하는 것은 다만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뿐입니다. 제게 더 이상 물어 보시는 것은 무익한 일이며, 저는 다른 말씀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자 그는 어떻게나 잔인하게 매질을 당하였던지 하루나 이틀 후 2월 14일 옥중에서 세례를 받은 후 숨을 거두었다. 그때까지 그는 예비신자에 불과하였었다.

 

제자들이 박해를 받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힘은 인간적인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힘이나 재능이 있어서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을 전하겠습니까? 주님께서 나를 이끄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4. 말하는 이는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순교자들의 기록을 보면 아주 연약한 처녀들이나 천진난만한 아이들까지도 초자연적인 지혜에 가득 찬 답변을 하여 재판관들을 당황케 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하시는 분은 결국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굳게 믿고서 생활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생활하다보면 “내가 생각한 것이 아닌데...,”하면서 기뻐하는 대화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내가 말하고 있지만, 나를 이끄시어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5.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고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 교회사 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천주교 신자인 자녀를 내치는 경우. 신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배교하고서 다른 신자들을 밀고하는 배교자들. 하지만 끝까지 참고 순교의 월계관을 받으신 분들은 구원을 받으셨고, 그분들의 신앙은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가 퍼져 감에 따라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으나, 일가족이 모두 신자가 된 집은 아주 드물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가르침을 믿었기 때문에, 생질인 푸라비우스 크레멘스를 죽게 한 도미시아누스 황제와 같은 예가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처지에 있든지 끝까지 주님을 믿고 고백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승리의 월계관을 받아쓰신 분들이 계십니다.

 

순교자 성 유대철 베드로의 기록을 들어 봅시다. 성 유대철 베드로는 유진길 아우구스티누스의 장남입니다. 그런데 이 집안은 이상하게도 부자는 열심히 천주교를 믿는 반면, 모녀는 믿기는커녕 이를 반대하여 가정에 불화가 그칠 날이 없었고 신자들을 욕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어째서 너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일을 고집하느냐?”라고 말씀하시면, 베드로는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복종하겠으나 하늘의 임금, 만물의 주님의 법을 따르는 것이 옳지 않느냐고 온순하게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어머니의 눈이 어두움을 한탄하면서도 어머니께 대하여는 언제나 지극한 효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마음속에는 순교하고자 하는 열렬한 욕망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옥에 갇혀있던 부친과 여러 신자들의 본보기는 그의 마음에 불을 질러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체포된 후 하느님께 대한 열광적인 사랑에 끌려 1839년 7월경 관헌들에게 자수하였습니다. 재판관은 그의 집안 내력을 자세히 물어보고 신자의 자식임을 알게 되자 옥에 가두고, 배교한다는 말을 하게 하려고 어르고 엄포하고 고문하는 등 갖가지 방법을 다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옥사장이 가혹하게 벌을 가하여 몸이 갈기갈기 찢기고 사방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면서도 이 용감한 어린이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어떤 포졸이 구리로 된 담뱃대 통으로 그의 허벅지를 들이박아 살점을 한 점 떼어내면서 소리쳤다. “이래도 천주교를 버리지 않겠느냐?” “그러면요, 이쯤으로 배교할 줄 아세요?” 그러자 포졸들은 벌겋게 달군 숯 덩어리를 집어 들고 입을 벌리라고 하였습니다. 대철이 “예” 하고 입을 크게 벌리니 포졸들은 놀라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다른 교우들이 그에게 “너는 아마 많은 괴로움을 당한 줄로 생각하겠지만 큰 형벌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대철은 “저도 잘 알아요. 이건 쌀 한 말에 대해서 한 알 같은 것이지요.”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후 고문을 당한 끝에 까무러친 그를 데려와서 다른 죄수들이 정신이 들게 하려고 허둥지둥할 때 그가 한 첫마디는 “너무 수고를 하지 마세요. 이런 것으로 해서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고 말해 형리들을 더욱 놀라게 했습니다. 유 베드로는 문초받기를 1회, 고문 14회, 태형 6백대 이상과 치도곤 45대 이상을 맞았지만 항상 기쁜 얼굴로 지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기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관헌들은 어린 그를 공공연히 죽이면 군중이 반발할까 두려워서 1839년 10월 31일 형리가 옥 안으로 들어가 상처뿐인 이 가련한 작은 몸뚱이를 움켜쥐고 목에 노끈을 잡아매어 죽였습니다. 이때 베드로의 나이는 겨우 14살이었다.

 

신앙생활에서 유혹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어려움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유혹을 이겨내고, 어려움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기쁘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주님께 큰 영광을 드릴 수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축일을 지내며, 순교자들의 모습을 기억해 봅시다. 그리고 그 순교정신을 이어받아, 일상 삶 안에서 순교할 수 있는 신앙을 키울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기도하며 주님께 맡겨 드릴 때, 주님께서는 나를 통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실 것입니다. 온전히 맡겨 드리는 삶을 살아갑시다.

 

웃어봅시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님은?

웹진 편집실

역사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님은 누구실까요?

선생님께서는 당연히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학생들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이야기 했습니다.

“웅녀요~”

 

당황한 선생님은 학생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도 마늘과 쑥을 한 100일 먹어봐야!

~ 아이코 수업시간에 장난치면 안 되는구나~

를 알지 않을까?”

 

선생님은 이어서 그 학생에게 기회를 주면서 질문했습니다.

그렇다면 김대건 신부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어디죠?

 

친구들은 뒤에서 “솔뫼, 솔뫼”를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잘못 듣고 이렇게 이야기 조그만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