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자료실
2017.03.13 17:31

삼위일체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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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한분이시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로 현존하신다.”는 삼위일체의 신비는 온전히 인간의 머리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계시 진리입니다. 신앙인들은 이해할 수는 없지만 믿을 수 있기에 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모든 시작과 끝을 성호경,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또한 신앙인들의 희망은 거룩하게 살다가 주님 앞으로 나가가 주님의 현존을 두 눈으로 보아, 삼위일체의 신비를 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삼위일체에 근거합니다. 교회는 삼위일체 교리가 하나의 신비로서 계시로 알려지는 진리이고, 계시를 떠나서는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또 계시가 되었다 하더라도 삼위일체의 신비가 남김없이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성삼위 신비는 창조계를 까마득하게 초월하는 것이므로 창조된 사물에 비유하는 것은 어느 것도 이 신비를 적당하게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 삼위일체 신앙의 발단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유성을 드러내주는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는 하느님께 대한 역사적인 체험을 소화하려는 노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신약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측면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만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면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령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역사 안에서 삼중형태를 지닌 하느님과 마주하게 되면서 이 체험을 어떻게 유대교의 유일신 신앙과 융화시킬 수 있는가를 궁리하게 되었으며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세 분이시라면 유일신교가 아니라 다신교가 되기 때문입니다.

 

2. 성경에 나타난 삼위일체

역사적으로 많은 교부들이 구약의 많은 본문을 삼위일체 진리를 암시하는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래서 창세기1,26절의 우리라는 말마디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는 세인물의 방문(창 18,1-16), 이사야의 삼중찬미를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드러내는 계시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명확하게 이것을 통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속성을 설명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신약성경에 명시적으로 나타나는 삼위일체 신앙은 예수님의 직제자들에게는 분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상당히 일찍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이해하게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은 삼위일체 신비가 성자 하느님과 성령 하느님의 체험을 통해서 계시되었음을 알려 줍니다. 하느님의 구원역사 안에서 명백하게 계시는 성부 하느님, 성자 하느님, 성령 하느님의 체험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실재에 대한 신비가 이성적으로 남김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신앙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삼위일체 신앙의 형성과정

초대 교회는 일찍이 입교자들과 신자들의 교리교육 때문에 요약된 신앙교리문을 작성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당시 많은 이단들이 그리스도교를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신앙을 저해할 첫 위험은 성경 전통을 강하게 고수하며, 성서적 유일신론을 옹호하려는 종교 철학적 조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이었지만 세례 대 특별히 하느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느님의 아들의 위치로 입양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성자와 성령은 한 분이신 하느님의 현현 양식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하느님 안에 세 위격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성자와 성령은 성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음을 거부하고 성부 하느님께 종속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니체아 공의회를 개회하여, 공의회 교부들은 “성자가 성부의 본질에서 출생하여 성부와 본질이 같다.” 라는 가르침으로 처음으로 성자의 참된 신성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습니다.

니체아 공의회에서는 성령의 문제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성부와 성자의 관계만을 동일 본질성으로 규정짓고 있으며, 그 구별성도 분명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니체아의 삼위일체 교리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교부들은 바실리와 니싸의 그레고리오,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였습니다. 이들은 삼위일체 신비를 해설하는데 성부, 성자, 성령 세위의 구별점에서 출발하여 하느님의 본질 단일성에 이르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세 위격의 개체적인 표징들은 성부의 원천성과 비출생성. 그리고 성자의 성부로부터의 출생성, 성령의 성부와 성자로부터의 발출성으로부터 드러납니다.

 

아타나시오 신경은 종래의 어느 신경보다도 삼위일체 교리를 체계적으로 해설되어 있는데 삼위 안에 한 분 하느님이 계시고, 같은 영광을 받으시며, 창조되지 않으시고 무한하시며, 영원하시고 전능하시며, 그렇다고 세 하느님이 아니고 한 하느님이 계시며,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삼위에 대하여 생각하여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삼위의 구별성을 성부의 비출산성, 비발출성, 성자의 출산성,성령의 발출성에서 찾아내고 동일한 영광, 동일한 위엄, 동일한 신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4.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교리

① 한 하느님이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데 하나의 하느님이시며 이 위격들은 동일하게 영원하고 전능하십니다.

② 세 위격들이 구별됩니다. 성부 위격은 무근원적 위격이고, 성자의 위격은 성부로부터 출생되는 위격이며, 성령의 위격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되는 위격이라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그리고 출생과 발출이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고 다만 유래성만을 지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③ 이 하느님의 세 관계적 위격들은 하나의 하느님 본질에 있어서 구별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유일성이 강조됩니다.

④ 하느님의 위격들은 존재 안에서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외부를 향하는 하나의 역사 원리입니다.

 

5. 삼위일체론의 중심 사상과 그 적극적 의미

그리스도교가 삼위일체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결단의 기본적 관점은

①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직접적이라는 믿음에 기인합니다. 어떤 반신이나 반인 같은 중간적 존재로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제대로 중재 하지도 못하고,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②“하느님은 오직 한 분 뿐이시다.”는 철저한 유일신론적 신앙고백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③ 하느님과 인간의 역사를 진지하게 고려하자는 노력의 태도입니다.

 

6. 부정신학으로서의 삼위일체론

교회가 시도하고 있는 하느님의 삼위일체에 대한 신비는 어쩌면 부정적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은 이렇다.”가 아니라, “이것은 하느님이 아니다.”라고 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으로는 하느님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암시이지 설명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보다 하느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부분이 더 크다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무작정 그분을 받아들이는 무비판적 입장은 거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참 신앙의 자세도 아닐 뿐더러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자세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야곱처럼 부단하게 하느님과의 한판의 씨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하느님과 말하려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아는 것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삼위일체 대축일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으면 합니다.

 

8.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비유들

어떤 비유로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드는 비유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① 인간과 삼위일체

인간은 ①지능 ②의지 ③정서를 지닌 존재입니다. 세 가지 기능을 가졌지만 한 사람의 인간입니다. 지능은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능이고, 의지는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정서는 자기가 지능으로 생각한 것을 의지에 의해 행동한 다음 그 결과를 보고 좋다든가 나쁘다든가 하고 느낍니다. 한 사람의 어떤 행동을 보고 “저 사람은 이렇게 했다”고 말하지 ‘저 사람의 지능이 그랬다’ 또는 ‘그의 의지가 그랬다’거나 ‘저 사람의 정서가 그랬다’고 평하지 않습니다. 성삼위께서도 따로 따로 작용하시기도 하고 동시에 작용하기도 하십니다.

 

 

② 삼각형과 삼위일체

하나의 삼각형은 세 개의 각과 세 개의 변이 있으나 삼각형은 하나라고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세 위격을 지녔으나 한분의 하느님이십니다.

 

③ 성냥불과 삼위일체

성냥은 불이 켜짐과 동시에 불꽃과 빛과 열이 생깁니다. 삼위일체는 영원으로부터 삼위를 갖고 계신 천주 성부께로부터 성자가 나왔으나 동시에 낳았다고 볼 수 있으며, 영원한 이상이신 성부의 이념이 성자가 되었는데 그것을 ‘말씀’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머리로 생각한 것을 말로써 표현하듯이 성부의 이념이 말씀으로 표현된 성사입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의 사랑이 너무 치열하여 또 하나의 위격이 피어나는데 이것이 곧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왔다고 하나 이것은 이론적 설명일 뿐이고, 그 시간이나 지위에는 차이가 없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다 같이 무한히 거룩하시고, 완전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영원하심으로 삼위는 같은 흠숭과 찬양을 받으십니다. 위는 삼위나 하느님은 다만 한 분이십니다.

 

④ 촛불과 삼위일체

촛불은 초와 심지와 불꽃으로 구성되어 있고, 서로가 내어줌을 통해서 빛을 발합니다. 초는 심지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고, 심지는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초와 함께 타오릅니다. 그리고 초와 심지를 바탕으로 촛불이 환하게 세상을 비춥니다. 촛불은 이렇게 사랑과 내어줌을 통해 하나가 되어 세상을 비춥니다.

 

⑤ 아버지와 삼위일체

베드로라는 아버지는 한 여인의 아내이기에 아내에게서는 “여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이시기에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직장에서는 직책이 부장이기에 “부장님”이라고 불립니다. “여보”라고 부르는 그 사람과 아이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과 그리고 직장에서 “부장님”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같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떤 비유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온전히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으로는 오롯하게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 분이시라는 것과 성부 하느님께서는 창조 사업을 하셨고, 성자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심을 통해 구원사업을 하셨고, 성령께서는 성실한 보호자로서 교회를 붙들어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을 구원 역사 안에서 체험으로 받아 들에게 된 것입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하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은총 안에서 힘을 얻어, 교회 공동체와 친교를 이루며 구원에로 힘차게 나아가는 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2011년 삼위일체 대축일

웹진 편집실

조학균 신부님의 전례 이야기

연중 시기

조학균(베드로) 신부

 

연중시기 기간에는 그리스도 신비의 특수한 면을 경축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신비를 전체적으로 경축한다. 이 시기는 고유 특성을 지닌 시기를 제외한 1년에 33주간이나 34주간을 지내게 되는데, 금년 성령강림 대축일 이후에는 연중 11주간이 시작된다.

 

지난 3월 8일까지 진행된 연중시기는 9주간까지이었다. 하지만 연중 34주간을 맞추기 위해 연중 10주간을 생략한다. 통상 연중시기는 33주간이지만, 윤달이 있는 경우에는 34주간이 될 수 있으므로 한 주간을 생략하는 것이다.

 

연중시기는 다른 전례시기에 비해 특별한 기념이 없다 하여 교회에서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와 함께 하심을 기억하게 하고 있다. 특히 공생활의 내용을 보여 주심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고 계심을 보여 주시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연중시기의 전례의 색은 생명의 희열과 희망을 나타내는 녹색으로써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보여 주시는 구원역사를 기념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연중시기 전례력의 경우 주일에는 대축일 미사 거행이 허용되지만, 축일과 기념일이 주일에 오면 생략된다. 하지만 평일에 오는 모든 축제는 허용된다. 연중 시기에는 일곱 개의 주님 축일들이 있다. 이 가운데 세 개는 동서방의 모든 전례에서 거행하는 축일들이다. 곧 주님 거룩한 변모축일(8월6일), 성 십자가 현양축일(9월14일), 성당봉헌축일들 등이 그것이다. 나머지 네 개는 서방교회에서만 지내는 것으로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주일의 삼위일체 대축일,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예수 성심 대축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등이다.

 

1독서 강론

하느님! 용서와 사랑이 넘치시는 분

-두 번째 증언판과 하느님의 현현-

(탈출기34,4ㄱㄷ-6.8-9)

안토니오 신부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십니다. 첫 번째 증언판을 주셨을 때, 히브리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신이라고 섬겼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잘못을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새 증언판을 받으라고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 자체이신 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의 참된 소유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고, 고백하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주님께 용서를 청하며,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삶. 하느님 아버지께 사랑을 고백하며, 그 삶을 살아가 봅시다.

 

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처음 것과 같은 돌 판 두 개를 깎아라. 그러면 네가 깨뜨려 버린 그 처음 돌 판에 새겨져 있던 말을 내가 새 돌 판에 다시 써 주겠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있는 동안 군중들은 아론에게 “우리를 이끄실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하고 청하였습니다. 아론은 그들의 요구대로 황금 수송아지를 만들어 주었고, 군중들은 그 수송아지를 자신들을 해방시킨 신이라고 섬겼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백성에게 노하셨지만 모세는 하느님의 진노를 풀어드리며 재앙을 거두어 주시길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증언판을 내던져 깨 버렸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진영 대문에 서서, “누구든지 주님의 편이거든 나에게로 오너라.” 하고 외치자, 레위의 자손들이 모두 그에게 모여들었습니다. 모세는 레위의 자손들에게 우상에 물든 사람들을 죽이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합니다.

 

이제 두 번째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처음 것과 같은 돌 판 두 개를 깎아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즉 용서를 해 주셨다는 것이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다시 이 백성과 계약을 맺으며 돌에 새겨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사랑이 지극하신 분이십니다. 잘못을 했어도 용서를 청하면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내일 아침까지 준비하고 있다가, 아침이 되면 시나이 산으로 올라와, 이 산꼭대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서 있어라. 3 아무도 너와 함께 올라와서는 안 된다. 이 산 어디에도 사람이 보여서는 안 되고, 양과 소가 이 산을 마주하고 풀을 뜯게 해서도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새 증언판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준비사항으로 혼자 올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양과 소가 시나이산을 마주하고 풀을 뜯게 해서도 안 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하느님 편에서 주시는 것이고, 인간이 그것을 좌지우지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 편에서 하느님의 일을 예견하고, 하느님께 사명을 부여하는 불경을 저질러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보여서도 안 되고, 더 나아가 양과 소가 이사이산을 마주하고 풀을 뜯게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를 드러내실 때 인간은 자신의 양과 소를 풀 뜯게 하며, 세상 걱정에 사로잡혀 있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영광을 드려야 합니다.

 

4 모세는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처음 것과 같은 돌 판 두 개를 깎고,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그 돌 판 두 개를 손에 들고 시나이 산으로 올라갔다. 5 그때 주님께서 구름에 싸여 내려오셔서 모세와 함께 그곳에 서시어,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셨다.

모세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처음 것과 같은 돌 판 두 개를 깎고, 아침 일찍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주님께서는 구름에 싸여 내려오셔서 모세와 함께 하시는데, 구름은 하느님의 신비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십니다.

 

히브리어 “야훼”를 우리말로 옮기면 “나는 곧 나다” 또는 “나는 있는 나다” 또는 나다“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하느님의 본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권위와 능력을 나타내는 ”야훼“라는 이름은 존경의 대상입니다. 예언자들은 야훼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할 때(예언할 때-말씀을 전할 때) 신적 권위를 부여받았습니다(신명18,19). 그래서 야훼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면 안 되고(탈출20,7),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주님의 기도).

 

6 주님께서는 모세 앞을 지나가며 선포하셨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7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을 계시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고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 대 사 대까지 벌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분이시기에 잘못을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용서를 청하는 이들을 하느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어미가 젖먹이 아이를 결코 잊지 않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당신 백성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자비는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으시고, 변함없으십니다. 그래서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푸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죄악을 그냥 버려두지는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무자비하심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그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그 아들이 그 죄를 배워 더 큰 죄를 짓고, 그 손자가 배워 더 큰 죄를 짓게 되는데, 그 책임을 반드시 묻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정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8 모세는 얼른 땅에 무릎을 꿇어 경배하며 9 아뢰었다.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기는 하지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모세는 얼른 땅에 무릎을 꿇어 경배하며 아뢰었습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여정 안에서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그리고 또 자신들의 공동체의 죄를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다.”고 말씀드리면서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리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하면서 자신들을 하느님 아버지께 오롯이 맡겨 드립니다.

 

모세는 참으로 겸손하고 훌륭한 하느님의 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 책임을 맡겨 주셨고, 모세는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멋 대로인 백성들을 위해 언제나 하느님께 자비와 용서를 청하며, 하느님의 돌보심에 온전히 맡겼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자비와 용서가 넘치시고, 사랑이 가득하신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백성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하고, 온전히 하느님께 맡겨 드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나를 단죄하시고, 나의 잘못만을 보고 계시는 분이 아니시라, 나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모든 사랑을 쏟아 부어 주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랑이 넘치시는 분으로 고백할 때, 나는 “하느님 아버지”께 참되게 믿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를 사랑하는 하느님 아버지!”께 더 큰 사랑과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내가 되도록 더욱 노력합시다.

2독서 강론

마지막 경고와 인사

(2코린토 13,11-13)

웹진 편집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에 마지막 인사를 하며 경고와 권고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고,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힘주어 강조하시며,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의 잘못한 사람들이 회개하고 다시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기를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1 나는 이제 세 번째로 여러분에게 갑니다. “모든 일은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합니다.” 2 내가 두 번째로 방문하였을 때 전에 죄를 지은 이들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이미 경고한 것처럼, 지금 여러분과 떨어져 있으면서 다시 경고합니다. 내가 이번에 다시 가면 그냥 너그럽게 넘겨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서간을 마무리 하면서 “세 번째로 방문”할 것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지난번에 죄 지은 이들의 행동에 경고를 한 것을 다시 상기키십니다. “분쟁과 시기와 격분과 이기심과 중상과 험담과 거만과 무질서, 더러운 짓과 불륜과 방탕”에 대해 경고를 했고, 더 이상 그런 모습을 간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로 방문했을 때에도 그런 모습이라면 “그냥 너그럽게 넘겨 버리지 않을 것”임을 강조합니다.

 

3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증거를 여러분이 찾고 있으니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에서 선교하면서 신자들에게 무엇을 바라지도 않고, 권위를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통해 오히려 무시하고, 다른 이들의 말을 더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적대자들은 바오로 사도의 사도직을 문제 삼았지만 코린토 신자들은 그러한 적대자들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사도로서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코린토 신자들이 원하니 자신을 자랑하는 어리석은 자들처럼 그렇게 바오로 사도도 어리석은 자처럼 자신을 내세워야 했습니다.

또한 코린토 교회와 바오로 사도의 적대자들은 바오로의 말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아마도 세 번째로 코린토를 방문한다면 그 증거들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 안에 계신지를 알 수 있도록 하라고 말씀하시게 됩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대하실 때에 약하신 분이 아니라, 여러분 가운데에서 힘을 떨치시는 분이십니다. 4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이제는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 계십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약하지만, 여러분을 대할 때에는 하느님의 힘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박해자들의 손에 약한 모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힘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께서 약해지신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가 힘이 있어 그 힘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갚지 않고, 모욕을 모욕으로 돌려주지 않기 위해 사도들은 약함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느님의 힘을 입어 복음을 선포하고, 세상 사람들을 믿음에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도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건강이나 말주변, 기타 능력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강하게 이끄시는 하느님의 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볼 눈이 없으면 결국 인간적인 것들만을 보게 됩니다.

 

5 자기가 믿음 안에 살고 있는지 여러분 스스로 따져 보십시오. 스스로 시험해 보십 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까? 깨닫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

또한 바오로 사도를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신지를 의심하지 말고, 먼저 자신 안에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깨달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시험해보라는 것은 내가 믿음 안에 살고 있는지, 믿음과는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는지를 명확히 보라는 것입니다. 당시 “시험”이라는 말은 그리스에서 관직에 출마하는 후보들이 투표 전에 받는 능력 평가를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되었던 말입니다. 관직에 오를 때에도 시험을 거치게 되는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만한 자격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고, 이 믿음이 없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실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신을 시험해보아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지를 명확히 볼 수 있다면 바오로 사도가 “당신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또는 “당신은 신앙생활을 잘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판단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6 그러나 나는 우리가 실격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7 우리는 여러분이 어떠한 악도 저지르지 않게 되기를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합격자임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격자처럼 보일지라도 여러분만은 선을 행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코린토 교회의 신자들이 알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실격자가 아니라는 사실”로 표현을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오로 사도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그 증거가 바로 주님의 백성을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즉 “여러분이 어떠한 악도 저지르지 않게 되기를 하느님께 기도합니다.”라는 기도를 통해서 주님 안에 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코린토 교회 안에 “분쟁과 시기와 격분과 이기심과 중상과 험담과 거만과 무질서, 더러운 짓과 불륜과 방탕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도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오롯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도의 마음인 것입니다.

 

8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무엇이든지 진리를 위해서만 할 수 있습니다. 9 우리가 약하더라도 여러분이 강하면 우리는 그것으로 기뻐합니다. 바로 여러분이 자신을 바로잡기를 우리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은 결코 진리를 거스르지 않고, 무엇이든지 진리를 위해서만 행동하였습니다. 그래서 코린토 교회가 온전히 주님께로 향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코린토 교회의 믿음을 기뻐하였습니다.

 

10 그래서 내가 떨어져 있는 동안에 이렇게 편지를 써 보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가서 곁에 있을 때,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권위를 가지고 여러분을 준엄하게 다룰 필요가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권위는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장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가 올바른 믿음을 갖도록 언제나 기도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코린토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 안에서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성장입니다. 이 성장은 구원을 향한 성장이고, 구원을 미리 맛보며 살아가는 삶이 됩니다.

 

11 그럼 형제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자신을 바로잡으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고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미리 맛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없는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항상 자신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배가 앞을 향해 나아가더라도 파도에 방향이 바뀔 수 있어 계속 키를 잡고, 항로를 수정하듯이, 신앙인들도 주님께로 나아가면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방향”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또한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었기에 서로를 격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라톤 코스에 “페이스 메이커”가 있어서 마라토너들을 도와주듯이,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하느님 나라를 향해 성장하면서 완주하여 승리의 월계관을 받아 쓸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잘못은 서로 꾸짖어 주고, 좋은 일은 서로 권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기에, 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서로 뜻을 같이하고 평화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형제자매들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어야 하고, 형제자매들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형제자매들을 위해 기도해 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12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또한 믿음 안에서 성장하는 신앙인들은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를 해야 합니다. 이 입맞춤은 전례 안에서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상징하는 입맞춤입니다. 당시 지중해 문화권에서는 상대방의 발, 무릎, 손, 가슴, 뺨, 이마, 입에다 입을 맞추었습니다. 코린토 교회 안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성찬례 때에 입을 맞추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에는 미사 중에 신자들이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간소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룩한 입맞춤, 평화의 인사는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형제자매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자녀답게”인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인사할 때, 믿음은 더욱 성장하게 되고, 은총은 더욱 풍요롭게 될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에 인사를 하게 되는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인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인사는 전례 안으로 들어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하고 미사를 시작하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인사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언제나 용서해 주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구원역사를 완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몸소 보여주셨고, 하느님 은총의 통로가 되셨으며, 그 은총으로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교회를 붙들어 보호하시며, 서로 일치하여 친교를 이루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함께하는 주님의 자녀들은 거룩한 백성이며, 구원을 향해 성장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끊임없이 나를 돌아보고, 방향을 바로잡아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끼십니까?

웹진 편집실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끼고 살아갑니까? 어떤 때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느낍니까?”이런 질문을 받으면 기쁘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많은 분들이 이야기 하시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신앙생활을 한 후로는 내 삶이 변화되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내가 그들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고, 그들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사람들이라 함께하고 싶지 않았지만,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들과 함께 하려고 노력하고, 덜 미워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아하! 하느님께서 나를 이끌고 계시구나!”를 체험하게 되고, 하느님을 더욱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노력한다고 합니다.

 

또한 아무리 권면해도 50여년을 믿지 않았었는데, 어느 순간 내가 신앙을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느끼는 증거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전에는 성당에 다니고, 기도하는 배우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신앙생활을 하는 배우자를 조롱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이 이해가 되고, 그동안 내가 해 왔던 것에 대해 크게 뉘우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배우자의 변화된 모습에서 하느님의 구원과 사랑을 느낀다고 합니다. 함께 기도하려 하고, 술 담배를 끊었으며, 매일 미사에 참례하려 하니 너무 행복하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기도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니까 행복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다고 생각을 하니 너무 행복하지만, 한편으로는 잘 못하는 것들도 많기에 두려움도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들 다양하게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느끼고 있습니까?

 

복음 강론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3,16-21)

웹진 편집실

하루는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삼위일체 교리를 어떻게 하면 잘 깨닫고 설명할 수 있을까?” 하여 고민하면서 바닷가를 산책하고 계셨습니다. 하루 종일 바닷가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한쪽 구석 백사장에서 아이들 세 명이 역시 하루 종일 모래성을 쌓아 놓고 작은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부으며 놀고 있었습니다. 성인께서 가까이 가서 “애들아, 너희들 무엇을 하고 있어?"라고 물으시자, 어린이들은 “저희들은 저 바닷물을 이 모래성에 모두 퍼 담으려고 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성인께서 웃으시며 다시 “애들아, 너희가 죽을 때까지 해도 그 일은 못 끝낼 것이야!"라고 하시자, 아이들은 “그래도 선생님께서 삼위일체교리를 깨닫는 일보다 더 쉬울 거예요!"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바닷가에서 돌아와 5시간 동안 삼위일체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이렇게 내렸습니다. “자, 저는 지금까지 인간의 말을 총동원하여 성부, 성자, 성령이 한분의 하느님이라는 삼위일체를 설명해 드렸습니다. 마지막 결론을 말씀드린다면 이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신비다.’”

 

1. 삼위일체는 신비

삼위일체 교리는 계시를 떠나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창조된 사물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어느 것도 이 신비를 적당하게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느님을 온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의 신비로서, 계시로서 알려지는 진리입니다. 계시를 떠나서는 인식이 불가능한 진리이기에 나의 이성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 것입니다. 그리고 계시가 되었다 하더라도 삼위일체의 신비가 남김없이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삼위일체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믿고 고백하는 것 뿐 입니다. 그래서 나는 큰 소리로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분이신 하느님이십니다.

 

2. 역사 안에서 만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구원의 역사는 한분이신 하느님, 즉 성부, 성자,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당신을 계시하시고, 하느님과 등진 사람들을 당신께로 돌아서게 하시고, 당신과 일치시키는 역사입니다.

성부께서는 인류 구원의 영원한 계획을 세우시고, 성자를 지상에 파견하시어 인류를 구원하게 하셨고, 성령으로 하여금 사람들을 성화시켜 이 영원한 계획을 완성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에 의하여 모인 백성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미사 시작 때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인사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측면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만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험에서 그 사건의 계시를 절정으로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하느님이심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강림을 통해서 성령을 체험하면서 성령을 하느님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즉 계시를 통하여 삼위의 하느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믿을 수는 있습니다. 믿음을 통하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3.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이 세상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너무나도 큰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구원자이심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은 믿음을 통해서 지금 시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이 다음에 돈 벌면 행복하게 해 줄게!”하지만 매일 폭력과 온갖 모욕을 준다면 과연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행복일까요?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 행복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지금 시작되어야 합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행복은 꽃을 피워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삶, 영원한 생명을 미리 맛보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생각들, 비교하는 생각들, 자기를 보잘 것 없이 여기는 생각들이나 행동들, 남을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생각들과 행동들, 교만하거나 허영심 가득한 행동들, 이런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당연히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그래야 믿는 사람처럼 살 수 있고, 영원한 생명을 지금부터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은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믿고 따르는 주님께서, 내가 사랑하는 주님께서” 나를 더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행복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가장 기쁨을 주는 말씀은 “누구나”입니다. 믿기만 하면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4.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단죄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나를 극진히 사랑하셔서”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두려운 심판자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심판하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께로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어느 자매가 병으로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런데 병상에 누운 그녀는 한 가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병든 자신을 두고 떠나 갈까봐 두려웠습니다. 남편은 정성스럽게 그녀를 간호했지만 그녀는 병상에 누워 있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약을 지어다주면 먹는 체 하고 약을 먹지 않았습니다. 혹시 남편이 잘못된 약을 주어 자리에서 영영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약을 먹지 않으니 더욱 허약해지고, 급기야 남편은 본당 신부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그녀에게 종부성사를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당신부님은 그녀에게 마음을 열고 마음속에 있는 것을 꺼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누운 자리 밑에서 약을 한 봉지 꺼내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워서 먹지 못했어요.”라고 말씀을 드리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조용히 그 약봉지를 가방 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부터 남편이 챙겨주는 약을 꼬박 꼬박 드세요. 남편은 당신을 사랑한답니다. 자매님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하는지 몰라요. 자매님이 마음을 여신다면 남편의 기도의 힘을 느끼실 거예요.”

그로부터 두 달 후 그녀는 남편과 함께 건강한 모습으로 성당에 나왔습니다. 그녀는 신부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 남편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랐어요. 하지만 지금은 알고 있어요. 느끼고 있어요. 그 사랑이 저를 이렇게 낳게 해 주었습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쏟아지는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과 그 사랑을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사랑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응답하여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인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한 가득 받고 있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활짝 핀 아름다운 꽃처럼, 탐스러운 열매를 맺은 나무처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5.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총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향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이미 시작하여 맛보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이들은, 그래서 예수님께 등을 돌린 사람들은 사랑을 거부했기에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정성스럽게 지어온 약을 먹지 않아서 더욱 악화되어 가는 사람처럼, 그 약을 먹으면 되는데 불신하여 약을 버렸기에 치유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지고 받아들인다면, 그 안에서 사랑을 느끼게 되고,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그 약의 효과와 성분을 모두 분석하고, 알아야 만이 먹어서 치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 병에 맞는 약이라면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해하고 믿으려하면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믿으면 오히려 이해하기가 쉬워집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어야 이해할 수 있고, 믿어야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믿어야 영원한 생명을 받아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하여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성부 하느님!, 나의 구원을 위하여 몸소 인간이 되셨고, 십자가를 지시고 나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신 성자 하느님! 그리고 나를 이끄시어 믿음에로 초대하시며, 하느님 나라로 향하도록 몸소 보호하시는 성령 하느님! 삼위일체의 신비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내가 받은 사랑에 감사하며 사랑 받는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해 봅시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나도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웃어봅시다.

하느님은 한분이시지요.

웹진 편집실

어느 본당 신부님께서 성탄을 준비하면서 판공성사를 주고 계셨습니다. 공소나 구역의 신자들과 일일이 면담하면서 교리도 물어보셨습니다. 신부님께서 나이 많은 자매님께 여쭈었습니다.

 

“자매님! 하느님은 몇 분이십니까?”

 

그러자 그 자매는 당연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히 한 분이시지요!”

그러자 신부님께서는 또 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몇 개의 위격이십니까?”

 

자매님은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삼위일체이신 한분이신 하느님을 믿고 있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두개의 위격만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놀란 신부님은 그 자매님께 다시 물었습니다.

“왜요?”

“그거야 간단하지요. 제가 어릴 적에도 성부 하느님께서는 수염이 하얀 할아버지의 모습이셨거든요. 지금 제가 80세이니, 성부 하느님께서는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