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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안에서의 삶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골방에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을 파견하시면서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1독서의 사도행전에서는 모든 신도들에게 성령을 받고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였습니다. 오늘 2독서의 코린토 1서 말씀에서는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고 고백할 수 없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성령강림대축일에 ①성령을 받았다 함은 무엇인가? ②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들은 왜 주어지는가? 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1. 성령을 받았다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먼저 성령을 받았다 함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골방에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파견과 더불어 그 사명을 완수할 힘으로 성령을 부여하십니다.

 

오늘 코린토 1서의 말씀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하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고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데 어떻게 주님이심을 고백하겠습니까? 기도하지 않는데, 어떻게 증거 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는데 어떻게 세상에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의 경우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골방에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령을 받은 다음에 어떻게 변했습니까?

그들은 골방의 문을 박차고 나가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했습니다. 비록 그 결과로 수많은 고통과 모욕이 그들에게 주어지고 마침내는 그들에게 죽음이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했습니다. 성령께서 이끌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는 내가 내 신앙을 “행동으로 증거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로 드러납니다. 내가 비록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이상한 언어로 기도하고 병자를 치유한다 할지라도, 내가 내 행동으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을 전할 힘으로 성령을 약속하시는 것처럼 내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증언한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을 받은 증거라는 것입니다.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를 위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그 행동으로 자신의 행동으로 그 믿음을 증거 합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는 성령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힘은 죄의 용서를 위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의 용서라는 것은 삶의 완전한 정화, 새로운 출발, 그리고 과거가 말끔히 정산되어 더 이상 어떤 보상도 필요하지 않는 새로운 기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위대한 쇄신 활동은 성령께서 어느 곳에 머무르시게 되든지 간에(인간의 마음속이든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이든지, 그릇된 이념 가운데든지, 여러 가지 형태의 폭력행위 가운데든지) 죄에 대한 승리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들은 왜 주어지는가?

성령의 은사에는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방언의 은사, 해석의 은사, 치유의 은사, 예언의 은사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성령을 받은 신도들은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말하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자기네 지방 말로 들리므로 모두 어리둥절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비스러운 언어현상 자체가 아닙니다.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말이 통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교회의 신비적 전통에서는, 특별한 성령의 은총을 추구하려는 노력에 대해 그것이 자기기만(自己欺瞞)의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다. 은사들은 기도의 선물도, 개인 신심의 선물도 아닙니다. 오늘 2독서에서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성령의 은사들은 모두 공동체를 위한 선물이요, 봉사직능입니다.

 

그리고 이 봉사직능은 개인의 성화를 지향하는 내향적인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공동체의 선익을 지향하는 외향적인 것입니다. 이들 외향적 직능은 사도, 예언자, 교사, 설교가, 복음 전파자, 원조자, 관리자, 의연품 분배자 및 자선사업에 종사하는 사람 등의 역할을 다 포함합니다. 그러기에 은사를 유별난 영신적 은총으로 판단하거나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상한 언어의 은사는 엄밀히 말해서 공동체의 건설을 직접 지향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은사 중에서 가장 낮은 단계의 것입니다. 초대교회 안에서 세례 후 안수를 통하여 성령께서 내려오실 때 가장 드러나는 표시는 “이상한 언어”였습니다. 그것을 주신 이유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확신이 없는 이들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믿고 있고,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성령의 은사는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길로 이끌어 주심”을 통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또한 필요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각자 받은 은사들은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렇게 하라고 각자에게 알맞은 은사들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3. 성령안에서의 삶

요즈음 교회 안팎에 예수님 신앙과는 아주 다른 잘못된 신앙에 현혹되고, 전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하느님의 교회가 제 역할을 못할수록 이 같은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역사의 교훈입니다.

① 언제 세상이 끝마칠 것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예수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니 깨어 준비하라고 말씀하셨다. 마태 24,36; 44,25; 마르 13,33 등)

② 입만 떼면 하느님, 성령, 성모를 들먹이고, 행동은 가족관계, 이웃관계를 해치는 사람, 가정을 외면하는 사람.

③ 개인체험(마음의 상처, 보상심리 등이 하느님 이름으로 투사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성당과 인연이 없으면 무당의 잡귀잡신의 이름으로 투사된다)을 덮어놓고 하느님 계시라고 믿고 퍼뜨리는 사람.

④ 병 치유에만 집착하며 성령, 성모님을 들먹이는 사람.

⑤ 우리 사회의 ‘세상의 죄’를 외면하고(불의, 부정, 인권탄압 등) 개인의 깊은 상처, 죄책감(예: 입시생 부모, 낙태를 경험한 여자, 부모와 화해하지 못하고 부모를 먼저 보낸 자 등)을 건드려 100일 미사예물, 헌금 등을 요구하는 사람

⑥ 복음정신인 ‘가난의 삶’을 싫어하고, 하느님, 성령, 성모의 이름으로 돈을 모아 거창한 사업(대개 하느님 계시로 이 사업을 한다고 함)을 하려는 사람

⑦ 예수님의 삶, 죽음, 부활엔 별 관심이 없고, 성령, 성모에 대한 개인주의적 신심만 강조하는 사람

⑧ 자유에로 부르시는 주님보다 연옥, 지옥, 형벌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불안, 공포의 신앙을 조장하는 사람

⑨ 성령, 성모님을 들먹이며, 권력자, 부자와 유착된 행동을 하는 사람

⑩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한 희생제사인데, 개인의 고통을 덮어놓고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라고 우기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가짜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사도들이 성령을 받아서 방언을 한다든지 예언활동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골방에서 뛰어나가 담대하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증언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입으로 고백하고 행동으로 증거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이것을 증거 했던 것처럼, 신앙인인 나도 세상의 많은 유혹 앞에서 그것들을 극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인 것이고,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은사인 것입니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 마음을 충만케 하시어,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2011년 성령 강림 대축일

웹진 편집실

조학균 신부님의 전례 이야기

성령 강림 대축일

조학균(베드로) 신부

 

그리스도교 전례력에서 성령강림 대축일에 대한 근거는 유대인들의 3대 축일인 오순절에서 유래된다. 성령강림 대축일 미사에서의 독서는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신비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며, 성령의 강림으로 인하여 교회의 탄생의 기원이 되며, 아울러 교회가 해야 할 선교의 임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참조: 사도행전 2장). 성령강림 대축일은 교회가 성령에 의해 탄생하며, 사도들에게 주어진 선교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백성이 태어나며, 삼위일체의 교의가 완성되는 중요한 교회의 축일이다. 또한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의 부활 신비를 용기 있게 전파했던 제자들의 첫 번째 증언을 통해 삼천 명의 사람들이 감화를 받아 세례를 받게 되고, 빵을 나눠 먹으며 기도에 전념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들의 모임이야말로 교회 공동체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초대 교회에서는 성령강림 대축일에 파스카 축일 때(부활전야미사)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세례를 베풀었으며, 이들을 위한 신비교육을 위한 기간이 필요했다. 그 후에 파스카축일 때처럼 8부 축제를 갖고, 교회 내에서 전례를 거행했지만 부활 축제의 의미와 행사가 중복이 되며, 다음에 오는 단식 주간들과 문제를 일으켜 9세기 이후에 폐지된다.

 

성령강림 대축일은 파스카 축제와 분리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분리해서 전례를 거행했던 과거의 전례예절을 오늘날에서 파스카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축일로 결정이 되어 파스카축제와의 일체성을 이루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직후, 유다인들을 피해 숨어서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 앞에 나타나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라고 인사와 더불어 축복을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어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후 예수님께서 승천한 뒤 제자들에게 마침내 성령이 강림하신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그 후 모든 의심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기쁘고 용감하게 유다인과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할 수 있었다.

 

성령의 오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리에 목마른 사람들의 목을 축여주어 갈증을 해소 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령의 오심은 성령을 믿는 이들로 하여금 진리를 느끼고, 진리 안에 살게 하시려고 오시는 것이다. 성령은 진리이시며, 진리를 알게 해 주시는 하느님(성부)의 또 다른 선물이며 은총이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모두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진리를 알고, 찾고자 하는 이들에 한해서 오시는 것이다. 진리를 거부하고 피하려 하는 자에게는 성령이 오시지 않는다. 그들은 성령을 거부하고 반기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성령의 오심을 거부하는가? 이는 자신의 욕심, 이기심, 개인주의가 마음속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오심은 공동체를 위한, 공동의 선을 위한 선물이지, 개인의 이득, 개인의 욕심을 이루어지게 오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라 다닌 사람들은 무수히 많다. 그 중에서 특별히 주시할 사람 둘이 있다. 유다 이스카리옷과 사도 베드로 이다. 그들은 처음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바로 옆에서 보고, 배우고, 깨달았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어떻게 결말을 맞았는가? 무엇보다도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이었으며, 많은 은총을 보았고, 받았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아니 대면하기를 거부했다. 유다는 진리를 보고도 피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바로 회개를 하고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다. 진리에 다른 행동이 사도 베드로가 될 수도 있고, 유다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듯 성령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심어준다.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의 진리를 믿게 하고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 있는 열정을 주는 것이다.

 

 

1독서 강론

성령강림

(사도2,1-12)

안토니오 신부

사도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내려오셨습니다. 성령께서 사도들 위에 내려오시자 사도들은 모든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변화되었습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이심을, 그리스도이심을 당당하게 전합니다.

 

1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2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사도2,1-3).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신지 3일 만에 부활하셨고, 부활 후 40일이 지나시어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열흘 후에 성령께서 내려오시는데, 그 때가 바로 오순절입니다. 부활하신지 50일째 되는 오순절 축제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께서 오신 것입니다. 이제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더 이상 유다인들을 두려워하는 겁쟁이가 아닙니다. 이제 그들은 변화됩니다.

 

이 순간이 바로 교회의 탄생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 위에 교회를 세우셨는데, 지금 이 순간 성령을 통하여 제자들이 예수님의 일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고, 예수님께서 바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며,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게 되는 시점. 이 순간을 교회의 탄생이라고 말합니다.

 

아이는 수정된 순간부터 한 인격체로 존중을 받는데, 아이의 생일은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세상에 나온 시간을 생일로 정합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교회가 세상에 소리를 터뜨리는 시간이니, 교회의 생일인 것입니다.

 

4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두려워서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게 되면 얼마나 기쁠까요? 말하고 싶은데 용기가 없어서 못하는 말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결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입으로가 아니라 온 삶과 마음과 정성으로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그 동안에는 두려워서 말 못했던 것들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 있어야, 성령께서 이끄시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말은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제가 할게요, 고맙습니다.”입니다. 입안에서만 맴돌 뿐, 용기가 없어서 고백하지 못하는 말들입니다. 기도하면 할 수 있는 말들이고, 성령께 나를 맡기면 할 수 있는 말들인 것입니다.

 

5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6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7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8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담아주신 말은 다른 사람들을 일치시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말을 모두 자기네 말로 알아들었습니다. 바벨탑 사건을 통해 흩어졌던 인류의 언어가 성령을 통하여 하나가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렇게 흩어진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십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예루살렘에 순례 온 이들은 사도들의 말을 통해 놀랍고 신기함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그런데 가끔은 말 때문에 서운한 경우가 있습니다. 말을 했는데, 그 말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신자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가서 모두 둥글게 앉아 “말 전하기”를 하였습니다. “신앙인은 다른 사람의 말을 하지 않는다.”를 전했는데 60명을 돌아서 온 말은 “나를 위해서 본당신부님께 잘해야 한다.”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옆 사람에게 말을 전했지만 전혀 다른 말이 전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들으려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나,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 담아주신 말, 공동체를 일치시키고,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9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10 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11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사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께서 담아 주신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이었고, 자신들이 해야 될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서 하지 못했던 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기에 그 말을 당당하게 선포하였고, 성령께서는 듣는 모든 이들이 자기들 고장의 언어로 듣게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하고 서로 놀라서 말하였습니다.

 

들을 귀만 있다면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하는 말 안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듣고자만 한다면 형제자매들의 말 안에서 주님을 찬미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공동체가 일치하기를 바라십니다. 일치를 위해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기도할 때 성령의 도구가 되어 공동체의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지 않으면 성령의 가르침을 결코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일치를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내 행동이 공동체의 일치를 가져온다면 나는 성령 안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고, 내 행동이 공동체에 분열을 준다면 나는 성령 안에서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명확한 기준은 이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정할 것을 인정하면서, 성령께서 나를 이끄실 수 있도록 나를 맡겨드리며, 성령께 은사를 청해 봅시다.

 

“성령이시여! 저를 이끄시어 제가 공동체의 일치를 위하여 몸 바치게 하소서. 아멘!”

 

 

2독서 강론

하나이신 성령과 여러 은사

(1코린12,3ㄴ-7.12-13)

웹진 편집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들은 다양합니다. 하지만 한 성령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다양성과 단일성). 그리고 성령의 은사를 통해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하는 방향은 바로 사랑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 형제자매들에 대한 사랑. 그 사람이 없다면 성령의 은사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1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성령의 은사에 관해서도 알기를 바랍니다. 2 여러분이 이교인이었을 때에 말도 하지 못하는 우상들에게 이끌려 정신없이 휩쓸렸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코린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전에 이방의 우상숭배 제례에 참여하여 광적인 분위기의 제사를 거행하였습니다. “정신없이 휩쓸렸다.”는 말을 통해 이교 제례가 얼마나 광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전에 섬겼던 신들이 “말도 하지 못하는 우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게 열광하였던 것입니다.

 

3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일러둡니다. 하느님의 영에 힘입어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할 수 없고,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코린토 교회는 우상을 섬겼던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이 대상을 바꾸어 예수님을 섬긴다면 결국 옷만 바꿔 입은 셈이 됩니다. 우상에게 하던 것을 그대로 예수님께 행하게 된다면 그들은 참된 믿음이 없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코린토 교회가 해야 할 것은 자신들이 우상을 섬기던 때 행했던 모든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며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5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6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는 여러 가지 이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각각의 은사들은 차이가 있고, 다양합니다. 그 이유는 받아들일 수 있는 이들에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은사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개울은 개울대로 물이 흐르고, 강은 강대로 물이 흐릅니다. 또 바다는 바다대로 물이 흐릅니다. 개울이 바다처럼 흐른다면 남아 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강이 개울처럼 흐른다면 그 강은 죽어가는 강이 됩니다. 그리고 바다가 개울처럼 된다면 살 수 있는 생물들은 별로 없을 입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은사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하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은사를 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7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는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공동선을 위해서입니다. 공동체가 하느님을 찬미하고, 구원에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은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은사들이 개인의 성화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아 공동체를 돌보는 이들이 자신을 거룩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더 감사하며 주님 안에 머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며 성령께 온전히 맡겨 드릴 때 공동체는 더욱 풍요로워 질 것이고, 개인은 성덕에로 한층 더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기도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는 그 은사를 거두어 들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니 성령의 은사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더 큰 은사를 받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들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은사를 주시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께 달려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성령을 협박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8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9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그 한 성령 안에서 병을 고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10 어떤 이에게는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예언을 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교회 내에서는 다양한 은사를 받은 이들이 활동합니다. 지혜와 지식의 은사를 통하여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이, 믿음을 키워주며, 기도하게 만들어 주는 이, 치유의 은사를 통해 몸과 마음을 온통 감사로 가득하게 만들어 주는 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온 삶을 하느님을 향하게 만들어 주는 이. 이들을 이끄시는 분은 성령이시며, 성령께서 이들을 이끄실 수 있는 이유는 자신들을 성령께 오롯이 봉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진 이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주님의 사랑과 희생에 감사하며, 그 사랑과 희생을 본받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형제자매들을 돌보게 되고, 함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게 되며,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가 됩니다.

 

11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각자에게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 풍요로운 은사를 부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은사는 공동체를 성장시키고, 공동체를 하나로 만들어 줍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게 만들어 줍니다.

 

코린토 교회의 신자들은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은사나 현상들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에게 질문을 했을 것이고,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전서 13장과 14장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완벽하게 정리를 해 줍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임을 상기시킵니다. 코린도 교회에서는 모임을 가질 때, 성령으로 가득 차 다양한 은사들이 표현되었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영가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어떤 이들은 예언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치유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상한 언어를 이야기 하고, 또 그것을 해석하는 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을 바오로 사도는 성령 안에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은사를 통해서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일치와 사랑”임을 강조하였습니다(1코린13장: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성령송가

웹진 편집실

오소서, 성령님. 주님의 빛, 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

가난한 이 아버지, 오소서 은총 주님, 오소서 마음의 빛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저희 생기 돋우소서.

일할 때에 휴식을, 무더위에 시원함을, 슬플 때에 위로를.

영원하신 행복의 빛, 저희 마음 깊은 곳을 가득하게 채우소서.

주님 도움 없으시면, 저희 삶의 그 모든 것, 해로운 것뿐이리라.

허물들은 씻어 주고, 메마른 땅 물 주시고, 병든 것을 고치소서.

굳은 마음 풀어 주고, 차디찬 맘 데우시고, 빗나간 길 바루소서.

성령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이들에게, 성령 칠은 베푸소서.

덕행 공로 쌓게 하고, 구원의 문 활짝 열어, 영원 복락 주옵소서.

 

기도하는 신앙인들은 언제나 성령께 마음을 열고, 성령의 이끄심에 온전히 맡깁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들을 명확하게 알게 해 주시는 빛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께로 향하는 마음을 환하게 비추시어 예수님께로 향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게 해 주시며,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예수님께 매달리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위로를 얻기보다는 예수님 안에서 참된 위로와 힘을 얻게 이끌어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기도하는 신앙인들에게 생기를 돋우어 주십니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나무가 살아있는 나무인 것처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는 신앙인들이 살아 있는 신앙인이고, 신앙인의 생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순례의 여정에 함께 하시며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사막을 건너온 순례자에게 한 잔의 시원한 물이 그 무엇보다도 큰 선물이 되듯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신앙인들에 주어지는 은총의 손길은 모든 어려움을 잊게 만들어 주고, 노고를 위로해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참된 행복은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참된 행복임을 알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해로운 것들은 멀리하게 하시고, 이로운 것들은 끌어당기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벗어난 길에서 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 주시며, 참된 회개와 용서의 체험을 통해 지은 죄의 상처에서 일어나게 하시며, 몸과 마음의 병들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를 바라고, 성령의 은사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공동체와 함께 구원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갑니다.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예수님의 일을 계속 이어나갑니다. 그리고 그 일이 바로 자신의 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습니까?

 

복음 강론

성령을 받아라

(요한20,19-23)

웹진 편집실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성령을 받은 사도들의 모습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골방에 숨어 지낼 때, 성령께서 내려오십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불길처럼 임하시어 그들을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가장 먼저 변화된 것은 바로 당당함입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나를 잡으러 올까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일은 사도들이 한 말들이 모두 자기네 말로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가장 큰 은사는 바로 굳건히 나의 신앙을 증거 할 수 있는 힘과 공동체를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은사를 받은 나는 굳건히 나의 신앙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또한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까?

 

1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안식일 다음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들어 오셔서 그들 한 가운데 서시며 이렇게 인사하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성령께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하고 싶은 것들이 있지만 못하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알고는 있지만 안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내가 그것을 할 수 있을까? 어렵지는 않을까? 누가 뭐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이런 저런 생각들이 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잡아 둡니다. 하지만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하는 것임을 깨닫는다면, 그리고 성령께서 언제나 나를 이끌고 계심을 알아차린다면 두려움 없이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두려움 없이 주님의 일을 해 나갈 때, 주님께서 주신 평화는 더욱 커지게 됩니다. 내 옆에 있는 이들에게도 전달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유령이 아님을, 허상이 아님을 알게 하시려고 수난 당하신 상처가 있는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믿지 못했기에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두려워했기에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보아야만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 눈으로 확인해야 만이 기쁨이 밀려오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간직한다면 기쁨은 넘쳐납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보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굳은 믿음을 고백하며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서 기쁨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 또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주님께 어떤 증거를 요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믿음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2.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일은 제자들을 통해서 계속 이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하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섬기며 사랑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고자 당신을 낮추셨습니다.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로부터 파견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해야 합니다. 사랑과 섬김을 살아가야 하고, 자신을 낮추어 봉사해야 하며,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3. 성령을 받아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기 위해서는 내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성령께 자신을 맡길 때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고, 사랑으로 갚아 줄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갈 때,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갈 때, 구원을 향해 나아갈 수 있고, 헛된 것들을 과감하게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삶이 다릅니다. 성령께서는 칠은을 내리시어 믿는 이들을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① 하느님을 공경하고,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 관심을 갖는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② 성경을 읽으면서 어떻게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잘 알고,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통달하여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③ 선과 악을 구분하여 구원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구원문제에 대해 의견이 있는, 생각이 있는, 그래서 어떻게 방법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분별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④ 내가 가진 신앙의 힘으로 죄악과 악마를 거슬러 용감히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마침내는 순교까지 하면서 신앙을 굳세게(굳셈) 증거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⑤ 교리와 성경의 뜻을 잘 알아듣는 지식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 믿어야 하는 것과 믿지 말아야 하는 것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⑥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참 아버지로 모시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신뢰하며, 하느님께 효성을 다하는(효경) 사람입니다.

⑦ 내 잘못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릴까봐 걱정하며 두려워하는(두려워함)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혜의 시초이니 슬기를 가진 자는 두려워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슬기와 통달함과 의견과 굳셈과 지식과 효경과 두려워함의 은사 안에서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 아버지를 섬기는 사람들. 그가 바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4. 용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후에 “용서”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십니다. 용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특별한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령께 청하면 온전히 용서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아들이 27년 만에 어머니를 만나 살해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아들은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후 “증오”만을 키웠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살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아들은 어머니를 용서할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만일 그가 어머니를 용서하려고 했다면 결코 어머니에게 칼을 휘두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나 또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의 칼을 휘두릅니다. 그리고 그 칼에 닫혀 평생을 후회합니다. 용서는 나를 위해서라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용서하기 위해서는 성령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미움의 칼을 버리고, 성령께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주신 그 권한으로 용서를 청하는 이들에게 “조건 없이” 용서를 베풀어 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로부터 용서 받은 나도 내 형제자매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해야 합니다.

 

성령강림 대축일을 맞이하여 내가 성령 안에서 용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봅시다. 성령의 이끄심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 성찰해 봅시다. 그리고 부족한 신앙을 키우기 위해 성령께 칠은을 청합시다. 슬기와 통달함과 의견과 굳셈과 지식과 효경과 두려워함의 은사를 청해 구원을 향해 달려갑시다. 주님의 구원을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땀을 흘려 봅시다. 참된 용서를 하기 위해 성령과 함께 밤을 새워 기도해 봅시다. 성령께서는 나를 이끄시어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웃어봅시다.

고스돕과 성령칠은

웹진 편집실

고스돕을 치다가 잘 안되자 한 친구가 기도를 했다.

 

성령이시여! 저에게 슬기를 주시어 어느 판에 들어가고 어느 판에 죽어야 할지 알게 하소서

 

성령이시여! 저에게 통달을 주시어 돌아가는 패를 알게 하시고, 의견을 주시어 주변의 영향을 받지 않고 고와 스돕을 할 수 있게 하소서

 

성령이시여! 굳셈을 주시어, 못 먹어도 고를 할 수 있게 하시고, 연사를 막게 하소서.

 

성령이시여! 저에게 지식을 주시어, 무엇으로 나야 할지를 깨닫게 하시고, 효경을 주시어, 판을 마치고 돌아갈 때는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소서

 

성령이시여! 저에게 두려움을 주시어, 쓰리고에 피박의 위험을 알게 하시고, 모든 판에서 싹쓸이 하게 하소서. ^*^

 

 

··· 이렇게 기도하다가 쓰리고에 피박을 쓰고, 몽땅 잃었다고...ㅎㅎ

살며 생각하며

“오순절 성령강림”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옛날 초등학교 주일학교 때 퀴즈가 생각납니다. “하늘나라까지 가는데 며칠이 걸릴까요?” 물론 어린이들을 위한 재밌는 퀴즈였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승천이 어디 저 우주 위로 가시는 것처럼 생각되고, 또 성령강림도 예수님과 바통 터치하고 새로 오시는 분처럼 생각될 수 있는 조금은 위험한(?) 이야기였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성령강림대축일에 선포되는 1독서와 복음은 모두 제자들이 성령을 받는 장면을 말해줍니다. 1독서 사도행전 말씀을 보면 사도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을 때 성령께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그 날은 오순절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복음인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날은 주간 첫날 저녁, 곧 주님이 부활하신 날, 주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도행전과 요한복음은 둘 다 제자들이 성령을 받는 놀라운 체험을 전하지만 서로 너무나 다릅니다, 하지만 어느 한쪽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표현으로 성령에 대한 같은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사도행전에서는 성령께서 오순절에 내려오셨다고 합니다. 오순절은 단순히 50일째 되는 날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큰 축제입니다. 왜 성령께서 오순절에 내려오셨다고 고백하는 것일까요? 제자들이 실제로 성령께서 언제나 오실까 하며 하루하루 표시를 하면서 기다렸던 것일까요?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오순절은 과월절 다음 오십 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 축제는 보리와 밀을 추수하고 나서 햇곡식을 하느님께 드리는 봄의 추수 감사제인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기념하는 축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당신이 새로운 파스카 양이 되시어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해주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로 건너가신 파스카(과월절)의 열매가 성령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혼자서만 죽고 부활하시어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십니다. 부활하신 당신의 영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의 열매가 바로 성령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예수님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습니다. 복음에서 말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십니다.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 하십니다. 2독서 코린토 1서에서도 말합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알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명을 계속하게 됩니다. 성령은 어떤 다른 기이한 힘이나 귀신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 부활하신 예수님의 숨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으면 그분처럼, 그분의 마음을 품고, 그분처럼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5)

 

그리고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언제까지나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주시겠다 하셨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약을 누리기 위한 길로써 계명을 받았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께서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의 하느님이 되어 주시겠다는 약속, 계약을 이루어주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이전에 돌판 위에 받은 십계명을 이제는 마음에 새겨 주십니다.

 

성령의 법은 우리를 율법에 매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위를 날아다니게 합니다. 마음에 성령이 가득 찬 사람은 사랑할 수밖에 없고,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에 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파스카를 완성하셨듯이, 성령께서도 오순절을 완성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열매인 성령을 받아먹고 마셔야 합니다.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간 첫날에 오십니다. 지금의 주일입니다. 주일마다 우리는 성령을 만나고 체험하고 받아먹습니다. 지금 우리 안에, 이 교회 안에, 믿는 이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이 자리에, 교회의 성사 안에, 성령께서 살아계십니다. 우리가 미사 때 모시는 그리스도의 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기도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깃들어 있는 완전한 부활하신 그분! 그분의 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미사 때에 그리스도의 영을, 성령을 모시는 것입니다.

성령강림대축일

웹진 편집실

 

“오소서 성령이여! 사랑의 길로 인도하소서.

오소서 성령이여! 우리에게 오소서!”

성령강림 대축일을 맞이하여 형제자매님들 모두에게 성령의 은사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아서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하자,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의 말을 뒤섞어 놓아 사람들을 흩으십니다. 그런데 오늘 1독서에 보면 성령을 가득히 받은 신도들이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2독서에서는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 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시고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성령을 받은 이의 삶의 자세에 대해서 깊이 묵상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먼저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생각해 본다면 바로 용서해 줄줄 아는 사람이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할 줄 아는 사람, 남의 허물이나 실수, 약점을 기억하기보다는 그의 장점과 선행, 좋은 인상과 친절, 부지런함 등을 오래오래 마음속에 담아두는 사람이 바로 성령을 가득히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는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각자에게 알맞은 은사를 주셔서, 그것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 사용될 때는 집단 이기주의나 개인주의에 빠져서 결국 제2, 제3의 바벨탑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바벨탑은 분열을 가져왔지만 성령께서는 일치를 가져오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고, 그분의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주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것처럼 내 이웃에게도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이 쉽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그것과는 반대되는 삶을 사셨습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아니 보잘것없는 나를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인간이 되셨고, 그렇게 살라고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내 안에 세워진 바벨탑을 허물고, 각자에게 주신 은총을 통하여 공동체의 일치를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성령께 은사를 청해봅시다. 성령이시여! 저에게 슬기와 통달함과 의견과 굳셈과 지식과 효경과 두려워함의 은사 중에서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어, 제가 주님을 참되게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님과 함께 공동체 안에서 일치를 이루며, 주님과 함께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