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99EFDA415C9225223126C3


 

오늘 복음은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호화롭게 산 이름 모를 부자와 라자로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가난한 병자의 이야기는 모두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이야기의 교훈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과연 누구를 위한 이야기일까요?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는 호화롭게 살았고, 그의 대문 앞에 있던 라자로는 병과 배고픔을 당합니다. 하지만 그에게 허락되는 것은 없었고 결국 그 모습 대로 라자로도 부자도 죽습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고 그 일에 누가 잘못을 따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 이후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부자의 눈을 통해 진행됩니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부자가 고통을 당하고 라자로는 아브라함 품에 있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조상이자 자신에게 부를 허락해준 듯 한 조상 아브라함을 찾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의 처지를 어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부자의 잘못을 짐작합니다. 그가 빵 부스러기라도 라자로에게 허락하고 그가 살게 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렇게 라자로는 불행을 갚음 받은 것으로 부자는 호사를 누린 이유로 이런 갈림길에 서 있다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듣습니다. 


 

결과로 보면 부자는 나쁜 사람이고, 라자로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라자로가 차지한 것은 착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몫입니다. 그런데 부자의 걱정을 보면 그를 그냥 무자비하고 나쁜 사람으로 보기 힘든 장면이 등장합니다.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 상황에서 부자는 자신의 가족들을 걱정합니다. 자신은 어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억울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족이라도 구해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에서 다소 놀라운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가족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그것으로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그가 살아온 것이 모세와 예언자를 통해 전해진 것을 해석한 이들의 이야기를 그도 들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곧 그가 전해 들은 모세와 예언자의 가르침대로 그가 살았지만 그 결과는 그가 받는 고통이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헤아리고 서로 이어받은 모세와 예언자의 기록들이 그의 부유함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기게 했고, 라자로의 가난과 병을 그의 잘못과 죄의 결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사실 라자로를 잘 몰랐을 것입니다. 그가 왜 아픈지, 왜 가난한지도 알 필요가 없었고, 그는 나름의 노력으로 그 부유함을 얻었으니 그가 라자로를 돌보지 않았다고 그에게 죄를 묻는 것은 모세와 예언자의 기록에서도 볼 수 없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온통 죄인과 의인의 구분에 따라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곧 그들의 기준은 죄였고, 부유함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모두가 바라고 소원하는 하느님 축복의 증거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는 그 가족들이 자신도 손에 쥐고 있었던 모세와 예언자가 아니라 죽었던 이의 소생 정도의 충격적 사건이 아니면 사는 방법을 바꿀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할아버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곧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모세와 예언자가 전해준 것이 죄를 기준으로 사람을 보시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곧 그가 알고 믿었던 것이 어느새 잘못 전해진 셈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아마 다른 이유로 라자로의 소생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봅니다. 


만약 라자로가 소생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가족들이 라자로의 소생에 놀라겠습니까? 라자로가 그 가족들을 찾아가 만날 수나 있겠습니까? 적어도 그들 만큼의 부유함을 지니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 소생의 가치를 하느님의 은혜나 기적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라자로의 이야기가 전해지면 그들은 모욕감을 느끼고 오히려 라자로를 다시 죽이려 들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하는 이유는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름도 모르는 부자가 나타내는 것은 그는 하느님에게 이름조차 기억될 수 없을 정도로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었다는이야기입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라자로는 그 이름만으로 하느님께 기억되지만 부자는 하느님이 주실 몫을 스스로 만들어 지니고 하느님은 자신의 재산을 지켜주는 확실한 창고 열쇠 이상의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하느님을 기억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에게 하늘나라의 가치를 설명해주는 곧 그에게 하느님은 은총과 구원의 선조 아브라함이었던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에게는 하느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축복이 하느님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니 라자로를 품에 안고 계신 하느님을 아브라함 할아버지로 불렀으리라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으로 생각되는가 우리는 곰곰히 생각해봐야 합니다. 부자에게 필요했던 하느님과 라자로를 헤아렸던 하느님은 같은 분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두하느님께 기도했을 겁니다. 답도 없이 배고픔과 아픔 속에 있던 라자로도 부유함에 그런 삶을 돌볼 이유가 없었던 부자도 말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아브라함을 하느님으로 불렀고, 라자로에게 주어야 했던 하느님의 가르침은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라자로는 그와 함께 살아야 했던 부자의 버림 속 오로지 자신을 끝까지 사랑하신 하느님의 품 외에 세상에서 얻을 것이 없었습니다. 
 

이 복음의 행복한 사람은 라자로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은 라자로에게 주는 복음이자 부자에게 주는 경고라 봐야 합니다. 복음이라 읽으면 라자로의 행복의 이유를 통해 하느님을 알아야 하고, 이 복음을 두고 반성을 할 생각이라면 부자가 부른 아브라함의 가치를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조차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음을 새겨 들어야 할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71 2019년 11월 13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1 별지기 2019.11.13 43
370 2019년 11월 12일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2 별지기 2019.11.13 43
369 2019년 11월 9일 성 라뗴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1 별지기 2019.11.09 39
368 2019년 11월 15일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1 별지기 2019.11.15 38
367 2019년 9월 11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별지기 2019.09.11 37
366 2019년 3월 30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별지기 2019.03.30 34
365 2019년 4월 18일 주님만찬 성목요일 1 별지기 2019.04.18 29
364 2019년 4월 1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별지기 2019.04.01 29
363 2019년 12월 1일 대림 제1주일 별지기 2019.12.01 28
362 2019년 4월 21일 주님 부활 대축일 별지기 2019.04.21 28
361 2019년 4월 3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1 별지기 2019.04.02 28
360 2019년 3월 10일 사순 제1주일 2 별지기 2019.03.09 28
359 2019년 11월 16일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1 별지기 2019.11.15 27
358 2019년 11월 14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별지기 2019.11.13 25
357 2019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 별지기 2019.02.02 25
356 2019년 3월 29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2 별지기 2019.03.28 24
» 2019년 3월 21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1 별지기 2019.03.20 23
354 2019년 11월 8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1 별지기 2019.11.08 22
353 2019년 5월 24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1 별지기 2019.05.24 22
352 2019년 5월 19일 부활 제5주일 2 file 별지기 2019.05.19 22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9 Next
/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