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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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수난에 초점을 맞추고 지내는 사순절은 부활을 기다리기보다 그분의 고통에 대해 더 관심이 많은 듯 보입니다. 그래서 복음도 같은 시선으로 보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 앞에 선 예수님의 모습은 때로는 두려움을 지닌 것처럼 느껴지고 또 어떤 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분으로 여겨집니다. 


 

오늘 복음은 이 둘을 모두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삶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려는 의도가 존재했고, 예수님도 그것을 알고 계셨음을 보여줍니다. 같은 이스라엘 땅이었으나 갈릴래아가 예수님을 좋아한 것과 달리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사형이 정해진 자리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정해진 운명처럼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분도 이스라엘 사람이었기에 당연히 가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결국 예루살렘으로 향했을 때 그 분위기를 예수님만 느끼신 것이 아니라 그곳의 사람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이야기 속 예수님은 어떤 것으로도 정해지지 않는 운명의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곧 사람들은 예수님을 노리는 지도자들의 의도를 알면서도 그들이 예수님을 쉽게 처리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예수님이 혹시 대단한 분일지도 모른다는 이중적인 생각을 합니다. 


 

곧 백성은 예수님을 믿지도, 의심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고 그분의 존재를 두려워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백성에게 하느님을 전해 온 지도자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예루살렘을 이끄는 이들은 곧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들인데 그들이 예수님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것은 백성들이 예수님께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조심히 들어오신 예수님의 태도는 백성들 앞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지 세상은 여전히 우리를 위협적입니다. 아무도 내놓지 않으려하는 세상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 놓고 산다는 것은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를 알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고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아무것도 남지 않음을 알고 살아야 하는 어리석은 삶을 뜻합니다. 


 

그런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적어도 내가 그 희망을 돌려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주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사라지고 그들이 나의 모든 것을 받게 됨으로써 나는 하느님께 나를 봉헌해야 하고,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고, 내 행복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나를 중심으로 전혀 돌아올 것이 없는 것이 이 삶의 계산식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사는 것이 맞다고 나서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으로만 가능한 다짐입니다. 아니면 타협을 하거나 세상이 가르치는 식으로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두 갈림길에 서로 섞이거나 둘 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서시자 백성들 때문에 당신의 행동을 결정하십니다. 갈릴래아에 계실 때는 그 죽음을 두려워하신 듯 보였으나 백성들을 만난 예루살렘에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사람들 안에서 외치며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던 것은 그분이 결국 백성들을 위해 사는 분이셨음을 말해줍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당신을 잊고 당신에게 다가오는 위협에도 힘을 내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힘을 주었던 그 백성은 결국 동시에 누군가의 지배를 받고, 지도를 받았던 이들이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한 존경보다 지도자들이 이야기하는 그분의 어리석음과 잘못에 대해 반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는 결국 처음부터 정해진 듯 십자가가 주어집니다. 


 

오늘은 금요일. 그분의 수난을 기억하는 십자가의 길을 하는 날입니다. 그 길에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 고통의 길을 걷는 것은 주님이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길을 뜻하기도 합니다.지도자들이 겁을 먹었던 것이 예수님을 대하는 백성의 태도였기에 예수님과 백성이 한 길에 있고 한 삶을 살게 될 것을 걱정한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함께 걷는 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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