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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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생애를 보고 있노라면 참 인생이라는 것이 정말 일방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 상황이 하나의 장면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중 당신의 마지막이 되는 십자가를 보면 그런 부분이 더욱 도드라져 보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만큼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제자들이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진지하지 못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의 이야기를 의도치 않게 농담처럼 여기는 모습까지도 보입니다. 오늘의 경솔한 형제들도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길을 가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사실 오늘 복음은 이 말씀의 묵상이 전부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고자 하셨던 이야기는 이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곧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유와 그곳에서 벌어질 일들, 곧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의 백성이 고발하고 사형을 내려 다른 민족 사람들을 이용해 죽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 제자들은 주님이 그런 일을 당하시는 이유와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를 통해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 곧 왜 회개가 필요한지를 알아들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여기서 중단되어 버립니다. 갑자기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갑자기 예수님의 말씀을 끊고 등장한 이 이야기가 어쩌면 오늘 복음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은 이내 당신의 가르침을 그치시고 제자들과 그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향하는 방향을 바로 잡아 주십니다. 주님의 죽음 속에서도 자신들의 자리를 걱정하며 자신들도 모르는 것을 꿈꾸고 그것을 위해 또 모르는 것에 대한 약속을 하고 마는 제자들의 모습은 그 때 예쑤님의 예고가 그들에게 진심으로 닿지 않았다는 것과 함께 그 말씀조차 자신들을 위해 듣고 있는 제자들의 욕심과 어리석음을 보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그 자체로 듣기에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들의 청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지 않았기에 더 이상의 무리한 생각은 그치게 되지만 아무튼 말 많고 탈 많은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의 모습은 이 욕심많은 형제만은 아닙니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이야기는 다른 제자들로 인해 다시 한 번 흐트러집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의 귀를 사로잡은 것은 예수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욕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는 그저 듣는 것 이외에 별 반응이 없던 제자들은 그 형제들에게는 불쾌한 반응을 즉시 내어 놓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제자들을 위한 말씀으로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에 초점을 두고 듣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많은 경우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로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교훈으로 만족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렇게 간단히 무시되고 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관심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관심이 있다면 그분이 생각하는 것과 그분이 하려고 하셨던 것에 초점을 모아야 하는데, 우리는 우리의 욕심과 어리석음, 그리고 서로를 섬겨야 한다는 내가 해야 할 일 외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더 진리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생애와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을 볼 먼 미래의 우리 자신까지 모두 이미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도 우리는 우리에게 더 관심이 많습니다. 하느님보다 자신을 사랑하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것을 위해 이용하려 드는 우리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은 어머니와도 또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할 수 있습니다"를 약속하는 제자들과도 또 그들을 보며 불쾌해하던 제자들과도 여전히 닮아 있습니다. 반성이 아니라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사순에도 예수님은 여전히 외로우실 것 같아 걱정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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