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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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에 듣는 복음 말씀은 우리가 하루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지침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장례 미사에 쓰이는 복음입니다. 구원의 순간에 하느님의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설명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연 부활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에게도 이 기준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어느 쪽에 서야 할지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양과 염소로 우리 자신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양으로 구분될 수 있는지를 알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먼저 '양의 길'을 살펴봅시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기도도 하고 좋다는 신심생활을 해 보지만 나에게 전해지는 느낌 만으로 하느님과의 일치를 생각하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또한 세상의 삶을 떠나 있는 시간의 길이와 하느님의 백성으로 사는 가치를 비례하듯 놓는 것도 옳은 일처럼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불확실한 우리에게 확실한 답을 알려주십니다. 하느님이 당신을 닮은 자녀로서 우리를 보시는 기준은 굶주리고, 목마른 이에게, 또 나그네와 헐벗은 이, 그리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고 삶을 사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우리보다 약한 존재이거나 죄에 빠진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베푸는 조그만 사랑이 하느님이 귀하게 보시는 기준이라는 동화같은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한 번 만나보려는 시도를 굳이 할 이유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살면서 서로의 모습을 보며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도와주는 것으로 충분히 하느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약한 이들에게 하는 것이 바로 '거들 짝'의 삶의 이유입니다. 우리는 완전함을 갖추지 못한 채 세상에 태어나 자신을 향해 어떤 것을 얼마만큼 해야 하는지 그 한계를 세울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주는 다른 사람의 사랑으로 부족함을 채울 수 있고, 우리도 누군가의 부족함을 또 그렇게 사랑으로 채워주는 것으로 함께 세상을 하느님의 뜻대로 다스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우리의 모습은 기적으로 가득하고 도를 통달하여 자신의 완전함을 이룬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향해 노력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실망스럽게도 처음부터 잘못된 목표 설정이며 그것에 대한 목마름은 결국 누구와 함께 있어도 행복하지 못한 상태를 만들고 맙니다. 


 

이제 반대편에 선 염소의 예를 볼 시간입니다.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염소의 편에 서야 할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부족한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행동에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인정이 없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꼭 '잘못'이나 '죄'라고 볼 수 없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탓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배고프고, 목마른 것에서부터 나그네가 되어 떠돌고, 헐벗었을 때, 또 병이 들거나 감옥에 갇힌 자신들의 이유가 있어서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책임을 질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도와준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질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손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도와줄 몫은 그야말로 '되는 사람'에게 도와주는 것이 더 좋고 자신을 위해서도그런 손해를 볼 이유는 없습니다. 그나마 가진 것을 잘 간수하고 그것으로 더 많은 것을 모으는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느님의 축복의 사람으로 불리는 이유도 그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산 이유로 영원한 생명 앞에서 이 둘은 갈라집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이 결과를 놓고 하느님은 '공평하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계산법입니다. 왜냐하면 어려운 이들을 돌본 사람이 손해를 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둘을 갈라놓는 기준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굳이 이 사랑으로 설명한다면 염소로 구분되는 이들은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한 사람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지만 그들은 사람을 사랑할 줄 몰랐고 그래서 자신들의 단점도 그대로 두고 오히려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반대로 살았습니다. 그들이 약한 이들과의 차이점에 행복을 느꼈을지 모르나 그들은 그들 스스로도 비교하며 자신을 위해 더 많은 것을 채우려 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알 수 없는 완벽함을 추구하던 이들은 자신들 스스로도 서로 비교하고 차이에 비웃고 다투며 살 뿐, 함께 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치워버린 삶의 주인공들이었습니다. 


 

부족한 이들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은 하늘나라에서도 그들과 함께 살 준비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살아가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 그들은 부족함을 느낄이유 없이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이 된 셈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이유는 하느님과 같은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세상에 사는 이유를 하느님을 통해 알게 되었고, 그 앎을 실천함으로써 함께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신앙의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끊임 없이 믿고 바라시는 하느님의 변함 없는 사랑을 알고 우리의 본이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서로 사랑하며 사는것으로 완전한 사람됨을 이루고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것을 완성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누구도 이 완전함을 이루었다고 말하지 못하면서도 우리가 죽어서 이 복음에 기대어 하늘나라를 꿈꾸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그런 모습으로도 충분히 완전한 행복을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양과 염소의 차이는 그런 우리의 태도의 차이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그 차이를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구분은 죽어서 하느님 앞에서만 구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눈에 드러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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