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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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예수님은 단 한 분입니다. 세상 누구나 그렇듯 우리 안에 사셨던 예수님도 한 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이 분에게 '절대'라는 표현을 아끼지 않으며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것의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가 그분을 유일한 분, 곧 우리가 따라야 할 유일한 모범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는 고민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자주 '하느님의 것'과 '사람의 것'을 나누기도 하고 그 속에 '선택'의 기로에 서야 하는 괴로움을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마치 성당이 그것의 구분인 듯 말하는 경우도 있고, 성당 안에서는 착하게 살려고 하지만 성당 밖에서는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것처럼 표현하고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 때는 성당이 피신처, 위로처가 됩니다. 또 그 속에서 생활하는 성직자 수도자는 '세상을 잘 모르는' 존재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2천년 전 실제 예수님에게는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편견이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그 편견은 놀랍게도 지금 우리가 우리에게 가지는 편견과 동일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느님의 일을 행하고 있음에도 그 편견은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그분의 생애 끝에까지 함께 했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나자렛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자렛'에서조차 예수님은 그 곳에서의 삶을 바탕으로 평가받고 계십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나자렛에서의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극단적으로 변화하는 고향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처음 예수님의 이야기에 놀라는 사람들은 감동마저 받았습니다. 그분의 이야기 자체로 '기적'이라 말할 만큼 놀라운 일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은 이내 식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동네, 함께 살았던 사람들로부터 예수님께 이어진 줄은 예수님을 인정할 그 어느 하나도 없다는 식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그럴리가 없다'는 것이 사람들의 판단이었고 이것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을 일시에 묻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분의 치유들도 아무런 힘을 얻지 못합니다. 


 

불신은 깊었고 예수님은 원래 그 동네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드러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 죽음의 윗자리를 차지했던 '나자렛'의 가치였습니다. 그곳에서도 인정받지 못하신 분을 우리는구세주로 말하고 믿고 섬기는 중입니다. 
 

사람의 불신이 되는 이유가 그의 잘못 때문이라면 이것은 어느 정도라도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평범함 때문이라면 그것으로 한 사람의 소망과 의지를 꺽어 버리고 부정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지금도 '평범한 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은 누구나 하지만 그 말을 실제로 믿고 실천하는 이가 성공한 예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그 뜻을 가진 이들조차 '대단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이 되고 싶다면 다른 사람과 같아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지금의 수많은 또 다른 예수로 자처하는 이들이 취하는 모습이 그렇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 속 단 한 사람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지극히 평범했고 마지막까지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상상하는 그런 자리에 끝까지 올라서지 않으셨고 그 모습으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오른편에 오르셨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그렇게 평범하셨고 고향에서조차 인정받을 수 없는 처지에서 공생활을 하셨습니다. 
 

지금의 교회와 우리의 문화 속 주님은 평생 올라선 적 없는 위치에 계십니다. 교회의 정성과 노력을 부정할 필요도 이유도 없지만 지금 우리가 그리는 예수님이 복음 속 예수님과 차이가있음은 분명해보입니다. 그분을 섬긴다고 길을 나선 이들조차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올라서 세상 사람들과 차별성을 두고 겸손함을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복음 속 주님은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이시고, 그분을 말하는 이들은 나자렛 사람들의 무지를 나무라는 것으로 오늘 복음을 넘기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복음 속 예수님은 지금 우리조차 인정하지 않는 한 청년의 모습이었고 세상에 이름나지 못한 우리가 무시하기 쉬운 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범은 그래서 어려울 수 없고, 높은 경지일 수 없음도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도대체 누구를 믿고 따르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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