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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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기다리는 사순절로 들어와 맞이하는 첫 주말입니다. 머리에 재를 얹고 시작한 40일의 시작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바로 보게 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레위라는 세리. 그가 누군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주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의 이름을 지니고도 백성들에게 로마에 낼 세금을 거두는 민족의 죄인으로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중적인 의미의 장본인은 더욱 미움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는게 급한 인생은 그 때도 지금과 같았던 모양입니다. 죄인임을 알면서도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은 그 선택으로 모든 것을 망쳐버렸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이 일하는 세관에 앉아 있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그의 됨됨이가 어떤 지 보다 그가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가 더욱 중요한 세상에서 주님은 그가 여전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상관 없이 그를 불러 세우십니다. "나를 따라라"는 말씀은 죄인을 부른 목소리였습니다. 죄인 중 가능성이 있는 '돌아온 탕자'가 아니라 죄를 짓는 상황에 있는 이 어리석은 사람을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로 바로 부르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회개의 삶과 여러모로 다른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놀랐고, 또 그와 함께 밥을 나누는 주님의 모습은 불만에 가득차 말합니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세리와 죄인이라 하더라도 그의 잘못을 뉘우치는 이들이라면 이 불만은 덜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들은 그 선택만으로 그들을 '죄인'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말입니다. 하느님의 율법을 생명처럼 지키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눈에는 죄인과 함께 하는 사람까지 모두 죄인으로 보였을 겁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당신의 행동이 충분히 의도된 것임을 밝혀 그들을 더욱 놀라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때도 지금도 주님께만 가능한 일인 듯 합니다. 우리도 병든 이들을 참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보고서도 우리는 병든 사람보다 성한 사람들을좋아합니다. 그리고 건강하려 애를 씁니다. 그것을 주님의 축복이라고 말하고 주님께 가까운 나이에도 '건강'을 찾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별 관심이없으신 모양입니다. 당신이 의사, 곧 구원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구원이 필요한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 맞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생각해보면 주님의 말씀은 분명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별로 주님이 필요하지 않은 건강한 사람들을 좋아하고 그들의 차이를 놓고 은총의 크기를 재는 이상한 계산을 반복하곤 합니다. 더 큰 성공을 한 사람을 부러워하고 그것으로 신앙의 정도를 평가하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성당에는 늘 '저런 사람도'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손가락질의 주인공들도 누군가의 손가락질을 피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그들은 모두 성당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아니시면 그들은 희망이 도무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피해갈 수 없는 분명한 율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주님의 성전을 거룩하게 만들고 싶어도 죄인의 발걸음을 막아 설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그들을 부르시어 함께 식탁에 앉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세리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것을 '회개'라 합니다. 그의 복된 변화를 보며 복음이 알려주는 또 하나의 '회개'의 가르침을 봅니다. 죄인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을 바꾸는 것도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복음 속 죄인은 주님의 부르심에 회개의 기회를 얻었고 그를 비웃던 건강한 이들은 회개 없이 그들의 고집을 계속해 주님을 결국 십자가에 세웠습니다. 
 

회개가 필요한 이는 죄인만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들이 주님의 모습을 보며 감동했다면 좋았을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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