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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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누군가 만들었다는 것을 아주 먼 조상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입니다. 하느님을 세상이 알게 된 것. 그 놀라운 사건에는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죽을 운명에서 원수의 손에서 자라난 사람이지만 동족을 구하려 사람을 죽인 이유로 쫓긴 사람에게 하느님은 타지 않는 불붙은 떨기나무로 나타나셨습니다. 그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구해주신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우리가 '구약'이라고 부르는 그 약속과 함께 하느님과 백성의 일치의 구체적인 사건들이 시작되었습니다. 모세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었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셨고 이 백성은 그분의 사랑에 대한 몫으로 자신들의 근본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고 자신들이 죄에 빠지게 되는 조심해야 할 계명을 직접 새겨주신 돌판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집센 백성 이스라엘은 끊임 없는 의심과 불평으로 하느님을 눈 밖으로 향했고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모세의 간구에도 불구하고 이집트를 탈출한 거의 모두가 약속에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고집이 얼마나 세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가 오늘 복음에 등장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 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다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모세가 허락한 이혼의 이야기는 요즘 세상에서는 큰일 날 소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내를 버린다'는 것입니다. 곧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로 여겨지던 시대였음은 물론이고 혼인의 관계 역시 남자가 우위에 있었다는 반증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혼은 둘이 갈라섬이 아니라 한쪽이 다른 한쪽을 버린다는 표현으로 전해집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백성에게 가능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음을 예수님은 밝히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간결하고 단호하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혼인의 가치가 여기서 나왔고 이 혼인은 처음부터 이 혼인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줍니다. 혼인은 처음부터 서로의 거들짝으로 만들어진 남자와 여자가 둘이지만 하나가 되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닮은 성사로 시작되었고 서로 사랑하여 혼인을 이루는 것이 곧 하느님이 맺어주신 것과 같음을 의미한다는 것도드러납니다. 


 

사랑은 하느님을 닮은 사람의 특징이며 서로 사랑을 말로 고백하고 함께 하여 자녀를 낳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모습에 가장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곧 혼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성사를 확고히 하시고 사람조차 버릴 수 있는 것으로 여겨온 이 백성의 잘못을 바로 잡으십니다. 그들의 거룩한 조상 모세조차 어쩌지 못했던 그들의 관행이었으나 그 관행이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고 근본을 바꾸어 더 좋아질 수 없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2천년의 역사 속 만들어진 수많은 관행이 있습니다. 그 뿌리는 성전이었으나 그것이 변화한 것이 마치 처음부터 정해진 것처럼 고집스레 서로 다툼의 이유가 되고 하느님 앞에서의 부족함으로까지 연결되는 어이 없는 일들도 벌어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세상을 만드신 분이시고, 처음부터 그분이 거처를 우리가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위해 수도 없이 성전을 쌓았고 하느님을 모셔들였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하느님의 집의 전부가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화려하고 어렵고 복잡하고 엄숙하며 거룩한 많은 것들이 하느님을 표현하고 있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것으로 여겨지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조상들로부터 이어온 것은 그 만큼의 정성과 의미가 깃들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고 사람의 사랑마저 빼앗아 버리는 일을 정당화한다면 그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오늘은 3. 1절입니다. 유독 과거의 잘못에 대한 고백과 사죄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우리가 그 때 그렇게 행동을 했던 것에서 오늘 복음을 살피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기 위해 민족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래서 지킨 것은 없었습니다. 최선이라 불렀던 우리의 선택을 후손들이 사과하는 이 상황이 다행이지만 여전히 그 상처는 되풀이 될 수 있기에 서글프고 조심스러운 고백임도 분명합니다. 


 

3월 1일에 있었던 그 울림이 바로 해방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닙니다. 그 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던 수많은 만세와 그 울림들이 그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3월 1일은 해방의 날이라 불러도 무방한 날입니다. 그날 모두가 함께 마음을 모으기로 한 것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세상의 역사 속에서도 제대로 밝혀 지킬 수 있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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