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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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듣기 : https://youtu.be/EtNCNcz_F5E


 

벌써 사순 네번째 주일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기다리는 사순절이지만 그 사이에 존재하는 주일은 부활을 미리 맛보는 하루로 주어집니다. 오늘 긴 복음에 등장하는 내용은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주님이 어려운 이에게 그에게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사랑을 베푸시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그의 치유를 두고 일어난 사람들의 사연을 듣습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한 사람의 안타까운 사정과 하느님의 사랑이지만, 그 사랑은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부정되고, 치유는 하느님께 그대신 그 치유를 이루신 예수님은 죄인으로 구분되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끝은 그를 다시 찾으신 주님과 바리사이의 위선이 드러나 확정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이야기 속 예수님은 안식일을 어기셨고,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뜻에 눈이 먼 것으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두 평가에서 승리한 것은 바리사이의 평가였습니다. 그들은 벌을 받은 듯 살아가는 장애의 굴레를 떨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일이 안식일에 일어난 것을 두고 그 사랑을 베푼 이를 죄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정작 주님은 그를 낫게 하실 때도 그가 느낄 수 있는 방법으로 그에게 다가가셨지만 그분의 진심은 이 사람에게만 전달되었을 뿐 이스라엘의 스승에게는 죄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치유의 주인공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가르치는 이에게 가르침을 받는 이가 이치를 따지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묻히고 맙니다. 그리고 쫓겨납니다. 결국 그가 얻은 치유조차 무시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직 예수님이 그를 다시 찾아 그의 치유를 확인해주십니다. 치유해 주시고 그에게 가서 다시 안부를 물어 보시는 주님은 그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음을 확실히 해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무엇이 그들의 눈을 가로 막았을까요? 그들이 주님을 몰라본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셨으므로 그것은 아닐 겁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기준으로 먼저 세상을 판단하고 심판했으므로 하느님의 뜻이든 사람의 사랑이든 어떤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그들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자신들'이었던 겁니다. 그들이 배웠고 고민 없이 지켜왔던 그들의 편견이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겨졌겠지만 사실 세상에 필요한 하느님의 사랑과 뜻을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외면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안식일에 눈을 뜨게 해 준 한 사람이었습니다. 몰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가진 기준이 틀렸고 그들의 마음이 비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 눈을 뜬 이에게 그 기적을 하느님께 감사하라고 말하지만 결국 그를 쫓아냅니다. 그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을 모욕하고 그를 증언하는 것이 그들의 마음에 거슬렸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으며 눈에 보이는 것만을 생각하고 판단하려는 이의 모습은 눈에 보이는 하느님을 부정하고 밀어냅니다. 오히려 그들 중 그들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면 그들의 반응이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그들 아래 존재하는 이들 안에 이루어지는 사랑이어서 그들은 그것을 무시한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기준은 분명하고 정확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이 그들을 심판하는 기준이 됩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이 편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현실에서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이 때론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너무 익숙하게 이런 일을 계속하고 있고, 또한 이런 식의 비판이나 반성도 너무 자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하느님을 전하거나 아니면 세상의 지식을 전하는 이들, 혹은 그 자신이 어떤 기준이 되어 버린 이들은 그들 스스로의 기준을 '잘 본다'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생겨난 세상의 상처들 속에 그들의 잘못은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역사가 그렇고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들이 눈을 뜬 이를 쫓아내고,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 몰았듯이 현실에서 그들은 여전히 힘이 세고, 영향력을 가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반성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눈과 마음은 다른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그분이 우리 눈을 어루만지시고 다시 찾으시어 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곧 복음에서 우리의 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여야 합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증언하는 진리이지 우리를 반성시키고 가슴만 치게 하려 읽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늘 부족했으나 늘 구원의 대상이었고 그래서 행복함을 느꼈던 사람들입니다. 안식일은 서로 부족한 세상과 사람이 어울려 사는 날이고 그 이치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읽고 살아가는 날입니다. 하느님의 그 뜻을 확인하게 된 날 부활절이 안식일을 대신하는 주일이 된 이유입니다. 


 

우리는 바리사이의 후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후손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 속에 바리사이는 우리의 자리가 아님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이웃의 어려움에 필요한 일을 해야 하고 그를 다시 찾아 축복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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