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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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품 10주년을 기념하여 이스라엘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도착하자마자 지독한 감기에 걸려 말 한마디 못하고 열흘 넘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눈으로 들어오는 풍경과 그곳이 주님이 계셨던 곳이라는 생각에 일정 전체가 피정인 듯 느껴졌습니다. 갈릴래아 지방에 들러 호숫가를 보며 이곳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을 떠올려 봅니다. 그 때의 모습이 지금과 같을 리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잔잔한 호수의 모습은 그리 많이 바뀐 듯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공현 후 예수님의 모습은 '구세주'로서 유심히 살펴 볼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의 모든 것이 대단해 보이지만 예수님의 진짜 대단함은 그 선택이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을 넘어서지 않고 그 속에 있었다는 점 같습니다. 곧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와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 그분을 하늘 위의 가치로 올려다 보거나 우리로서는 넘볼 수 없는 곳에서 그런 힘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며 늘 최상위의 어떤 것에 희망을 두고 그것으로 세상이 변화하고 좌우된다고들 떠들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 자연 그 뿌리에서 모든 변화를 시작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뜻도 우리가 만든 세상 위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구원을 시작하셨습니다. 생각해보면 '인류 구원'이라는 단어만 생각해도 낮은 것을 제외한 구원은 '인류'를 붙이기 힘든 내용입니다. 곧 모든 이를 향한 구원이 '인류 구원'이지 인류 중 선택받은 자라고 불리는 극 소수의 인간을 골라 내는 것을 인류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 낸 사회에서 발견되는 가치입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적다는 생각은 줄곧 우리가 사는 사회를 생각하며 하느님의 뜻을 우리의 선택처럼 생각해서 나온 결론일 뿐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렇게 살면서 어떻게 구원을 바라고 누가 구원될 수 있으리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은 들겠지만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을 생각하고 다시 사람을 찾고자 하시는 하느님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이런 생각과 사고 방식, 그리고 삶의 태도들은 분명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또한 우리와 함께 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서도 이런 생각을 멈추지 않고 그분의 가르침을 그렇게 생각하고 대하는 우리는 거의 '구제불능'에 가까운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구원의 시작을 이민족들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이 그곳에 희망이 되셨고 사람들이 그분의 소문을 듣고 보인 행동들은 구원의 내용과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주님의 구원은 우리를 골라내심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되찾고 서로를 위해 세상을 살게 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들을 모두 구원 받아야 할 대상, 혹은 구원에서 소외될 처지에 있던 사람들이지만 서로를 생각하고 행동함으로써 '함께 살아도 좋을' 이웃이 됩니다. 세상의 행복과 평화는 똑같은 사람들의 일률적인 균형이 아니라 서로 함께 하며 서로가 달라도 아무런 불행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사계의 흐름처럼 다르고 그 속에 존재하는 같지만 모두가 다른 자연처럼 그렇게 세상을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었고 그것의 시작은 모자라고 부족한 것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시작되고 완성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소문이 세상에 퍼진다는 것. 우리는 그것을 전교 혹은 선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주님이 세상에 알려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교와 전교가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종교를 전하고 사람들을 모으는데 있는지 본다면 우리는 방향을 잘못 잡은 듯 보입니다. 또한 그 손에 그 때의 사람들과 같은 이들이 함께 하기 보다 힘을 보여주고 세를 과시하며 좋은 것으로 그들을 홀리듯 하는 것은 더더욱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의 손에는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 해야 하고, 그것을 주님에게서 보고 배운 것이어야 우리의 선교는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 됩니다. 주님이 잘못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우리는 2천년 동안 잘못된 행동을 반복하곤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구원에 대한 편견과 착각을 반복하는 이유가 됩니다. 


 

갈릴래아에 살면서 늘 예루살렘이기만 바라는 것. 그것을 그만둘 때가 지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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