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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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 계신 예수님. 예수님의 등장은 당시 성전에 파란을 일으킵니다. 주님은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도 아니고, 스승으로 불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도 아니셨습니다. 그럼에도 성전에서듣고 배우는 위치가 아니라 가르치는 분으로 등장했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백성이 이루어낸 사회적 질서를 무너뜨리는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어떻게 해도 평신도의 위치가 성직자의 권위를 넘볼 수 없는 현실에서 예수님의 존재는 오히려 상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독특한 존재입니다. 정식으로 배운 것도 없고 엘리트의 어떤 자질도 타고나지 않은 시골 나자렛 사람이 외치는 하늘나라와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에 반박할 수도 없는 자극을 받은 많은 스승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이 질문은 현실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내용보다 그 사람의 간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같은 지위에 있다면 인지도에 따라 그 가치를 부여하는데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느 정도의 위치가 아니면 하느님의 나라와 뜻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리조차 얻을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더 큰 문제는 평신도 스스로도 어떤 신앙적 모임에서든 '나눔'이라는 단어로 자신의 생각을 평가 절하하여 표현하며 가르치는 이와 가르침을 받는 이의 관계가 가르침이 끝나고 나면 동등해질 수 있다는 생각조차 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배움은 의미를 잃고 깨달음도 소극적인 실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오히려 유명한 강사와 성직자와의 친분이나 교류가 그들에게 더 큰 힘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에겐 그 편이 훨씬 쉽습니다. 그래서 스승들의 이 질문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입을 닫아 버리는 무서운 질문이자 위협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당신과 같은 처지에 있으나 모두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요한을 들어 그들의 질문을 되묻고 계십니다. 


 

요한도 사실 아무런 지위를 갖추고 있지 못했지만 그들 조차 요르단 강을 찾아야 할지 고민하게 만든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두에게 공공연하게 알려진 기적의 사람. 그래서 사회적 지위를 넘어서는 가치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이를 그들은 어떤 자격으로 말하는지 그들의 속내를 드러낼 수밖에 없도록 말씀하십니다. 곧 유명한 요한과 아무도 모르는 당신을 같은 자리에 놓아 버리시고 시대의 스승들에게 엄청나게 무거운 부담스런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당신의 대답이었습니다. 


 

곧 그들이 생각하는 기준을 그들이 말하게 함으로써 당신의 가치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요한의 가치를 "모르겠소"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 말은 그들은 예수님의 가치조차알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대답은 요한의 가치를 무시하지 못함을 자인한 것이어서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그들이 반대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가 누구이든 하느님의 뜻에 관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가치 위에서는 모두가 동등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늘나라의 가치들에 모든 것은 다양하게 등장합니다. 모두가 양이거나 소이거나 비둘기는 아닙니다. 다양한 생명들이 존재하지만 서로 어울리어 평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가치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아래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가치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는 일이 다르고 사는 모습이 다르며 서 있는 위치가 달라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서로 교차하며 사랑하고 그래서 누구도 불행하지 않은 즐겁고 행복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그리스도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외침을 듣고 싶습니다. 또한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성당이 아닌 삶의 자리에서 느끼고 함께 하고 싶습니다. 누군가를 그러기 위해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성전에서 우리의 가치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누구도 틀린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어느 한쪽도 소홀해지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닙니다. 
 

성전 안에서도 나뉜 위치에서 살지만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누군가는 '말한것을 살아야 하고', 또 누군가는 '들은 것을 살아야'합니다. 입장의 동등함은 예수님을 평신도라고 주장하는 것과 교회가 누군의 것인가를 주장하는 것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누가 그리스도처럼 사는가에서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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