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3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by 별지기 posted Dec 0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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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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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어떻게 실천할까에 대해 사람들마다 개념도 정도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정신적인 부분에 동의하는 것으로 사랑을 말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 실천에는 동의하면서도 또 그 안에서 그 대상을 구분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로 어떤 이들은 가장 어려운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이들은 그런 일도 어떤 희망이 있는 대상에 한하여 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그런 '소비적인 일'을 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모든 내용은 예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델이고 우리가 지켜야 할 기본 중의 기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함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의 뜻이나 판단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생각하시고 우리 안에서 사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우리를 구하시는 것이었고 그 선택은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 예수님의 모든 것이 그랬습니다. 그분의 시작이 마굿간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성장도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나자렛이었습니다. 그분이 광야로 나가 돌아와서 시작하신 공생활의 시작도 '이민족의 땅 갈릴래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분 곁에는 항상 죄인과 가난한 이들과 어려운 이들이 있었고 그분은 누구의 초대에도 모두와 함께 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일종의 '편들기'로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구원을 바라고 또 마땅히 그렇게 이루어져야 한다면 그 시작은 위쪽에 자리하는 지도자나 권력자들이 아니라 삶의 고귀함에서 가장 떨어져 있는 이들부터 챙기는 것으로 모두를 위한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최하가 사람으로서의 존귀함을 찾아 생활하며 세상의 아름다움의 모습을 회복할 때 구원이란 이루어지는 것이고 아버지는 누구 하나도 그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각오로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래서 아버지가 사랑하는 이들 곁에 머물며 그들을 구하는데 온통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살며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아이처럼 기뻐하며 아버지께기도합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어떤 면으로 살펴도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방식과 다릅니다. 위를 선택하여 아래를 바꿀 수 있다고 우리는 알고 있고 또 그렇게 하여 위로부터 떨어지는 은전을 청하고 기대하는 이들도 같이 구원될 수 있다고 말하는 우리인데 예수님은 그런 세상의 모습은 하늘나라와 같지 않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곧 불쌍해서 그들을 편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래의 가치를 회복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 편에서 그들을 힘껏 밀어 올려주시는 것이 주님이 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일을 우리와 분리시켜 애써 그분의 노력을 지우거나 감추려 합니다. 곧 예수님의 기적을 높이 추켜 세워 그분의 은혜를 받은 이들을 축복하는 듯하지만 정작 예수님이 그들에게 선물하신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자 함께 살 수 있는 기본을 회복시켜 주셨음을 기억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기적의 은혜를 받은 이들을 같은 자리에 세우려 하지 않고 그들을 축하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이 사랑을 베푸신 이들을 우리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야 예수님의 일은 완성되는 것임에도 우리는 그들을 여전히 제외시키고 주님만 보는 것으로 책임과 해야 할 일을 저버리는 것이 우리가 보이는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바꿀 수 없다면 우리는 이 '편들기'의 가치를 우리 삶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답안이 나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변했습니다. 이미 어떤 식으로든 이기는 사람이 강한 것이고 그들의 기록이 역사가 되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본 우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하고 그 뜻이 향하는 이들을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에 해야 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하면 교회는 손해를 각오해야 할 것이고 사회적 대상의 아랫부분에만 관심이 있는 이상한 종교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이상함이 하느님의 사랑이라면 그것은 결국 우리 모두의 행복한 세상을 위한 가치있는 당연한 선택이어야 합니다. 이 편들기에 나선 사람들이 보이는 거친 모습과 말들. 그리고 성직자와 일반인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듯한 파격적인 행동들이 눈에 익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것은 2천년 전 그 때 이스라엘이 예수님께 느꼈던 감정일 수도 있음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 시대 눈 한 번 감고, 비겁해짐으로써 얻는 것이 너무 많은 세상입니다. 그렇다고 노력한다고 무엇 하나 달라질 것도 없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분명 선택은 우리의 이익이 되는 방향이어야 하고, 그 후에 좋은 일을 해도 좋습니다. 그것이 세상이 늘 우리에게 던지는 유혹이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았던 이들이 자신들도 알고 있노라고 주장하던 가치입니다. 


 

사람들이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편들기에 힘을 써야 합니다. 결국 교회가 가난해지더라도 그것이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되었기 때문이라면 우리는 기뻐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여전히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 보다 힘든 일입니다. 그들의 차고 넘치는 부가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기대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2천년 전에 무너진 공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부자들은 여전히 이 공식을 사랑하고 그 무한한 힘의 일부를 나눠주는 것으로 책임을 말하지만 우리가 행복하다는 것은 그런 은전이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가치를 되찾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이 가치가 가능해지리라는 유일한 희망을 가지고 실현할 수 있는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 제발 힘 있는 이들이나 부유한 이들에게서 관심 좀 거두고 예수님의 선택에 함께 했으면 합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말입니다. 각자의 역할이 있다는 말은 이제 그만합시다. 윗공기를 맡은 이는 결코 아랫공기의 사람들을 동등하게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늘나라는 하느님 안에 모두가 같은 한 자리입니다. 지혜와 슬기의 사람들은 새겨들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