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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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에 '절대'라는 말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거의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잘산다는 말도 경우에 따라서 기준이 다르고 그 기준 안에 또 다른 면에서 기준이 다시 세워지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시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곧잘 우리가 사는 방식에 따라 하늘나라를 그리고 표현하는데 익숙합니다. 누군가 그런 이야기로 확신에 가까운 이야기를 한다면 그의 상대적인 지위에 따라 그것은 진리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서 만나는 하늘나라는 우리의 기준과 달라보입니다. 헌금함 앞에 계신 예수님. 그 모습은 마치 하느님께서 우리의 예물을 보고 계신 것과 같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잘사는 이들'의 헌금을 보고 계셨습니다. 저마다 십일조의 기준이나 나름의 이유에 따라 많은 재물들을 하느님께 바치는 중이었습니다. 그것으로도 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자신들의 정성의 정도를 가늠해보곤 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많이 내는 이가 정성이 큰 것으로 여기고 또 그만큼 하느님이 갚아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성직자의 입으로 공식화되면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는 돈이 돈을 만드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그 법칙에 하느님을 끼워 넣으면 곧 은총으로 그 공식을 알아듣기 마련입니다. 많이 투자한 사람이 많이 버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가진 것이적을 수록 벌 확률조차 희박한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하느님이 세상의 법칙과 같은 기준을 지녔다고 여기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세상에서 그 가치를 인정하고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느님을 전하는 이는 예수님의 말씀과 전혀 다른 기준을 가졌으나 현실에서 이름을 얻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 성직자가 될 수 있습니다. 조그만 확률로도 그 투자는 성공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배경으로 삼고 사람들의 칭송도 얻고 사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어차피 하느님의 능력으로 안되는일도 아니고 그분의 뜻을 아무도 모르니 '좋은게 좋은 것'으로 말해 버려도 책임질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헌금함에 넣기도 부끄러운 헌금을 하는 한 여인을 보시고 그 헌금을 칭찬하십니다. 그녀의 헌금은 일년을 해도 부자의 단 한 번의 헌금보다 크지 못합니다. 그런데도예수님은 그녀의 헌금이 더 많다고 인정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상징으로 이해해야 할 유혹마저 느낍니다. 그녀의 헌금은 어찌해도 소용이 없는 정성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하느님께 그 마음은 인정받겠지만 현실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니 차라리 이 여인처럼 가진 것을 모두 하느님의 것으로 알고 헌금을 하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더욱 많은 헌금들이 들어올 수도 있을테니 말입니다. 이 여인의 헌금이 생각보다 많이 언급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고, 때때로 이 헌금이 비율로 따지는 상대적인 기준으로 둔갑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으로 보입니다 


 

오늘 연중 마지막 미사에서 교우들에게 교무금과 헌금, 그리고 미사예물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성직자의 입에서 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곧 '돈'에 관한 이야기를 쏟아 냈습니다. 그러나 이 돈은 '생활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집에 살림을 살아야 하는 사람으로 우리가 내는 이 돈들은 그 어느 것 하나 하느님이 쓰시지 않습니다. 


 

교회의 헌금은 교회의 유지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이며, 교무금은 교회의 유지비를 부담해야 하는 신자의 의무에 의한 것입니다. 미사 예물은 그것으로 하느님께 정성을 드리며 동시에 사제들을 위해 사용됩니다. 많은 교회가 이 기본 예산으로 살기보다 행사 때마다 작은 일에도 '빨랑카'라 불리는 자발적인 희사를 통해 일을 해결해 나갑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관행처럼 되어 버려 신자들에게 자신들이 내는 이 소중한 헌금의 의미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재물로 하느님의 말씀을 사는 이들이 아닙니다. 돈은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고 그 역할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에 따라 하느님의 은총이 좌우되거나 할 일을 못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당연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솔직하다는 표현으로 '돈이 복지다', '돈이 권력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더 힘을 얻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의 근본을 찾는 것이 여인의 헌금의 뜻을 제대로 찾는 것일 겁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정성으로 은총을 구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고, 그들이 더욱 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을 알지만 그 것이 옳은 기준도 방법도 아니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어 그리 고귀하지 못하게 조금은 구차하게 살아가는 성직자입니다. 그럼에도 그 헌금의 소중함을 알고 살기에 어려운 살림이 그리 부족하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이 이상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그래서 드는 날입니다. 


 

가진 게 없으면 몸으로 때워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몸이 있음이 감사한 일이라면 그 조차 행복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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