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8일 연중 제23주일

by 별지기 posted Sep 07, 2019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99A2B8485D73A8F822D643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한지 30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리고 사명을 받은 이로 산 지는 열 아홉해입니다. 부제 때부터 헤아린다면 스무해가 되는 중입니다. 누군가 묻게 된다면 어떤 대답이 가능할지 생각해 봅니다. 


 

"주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제자로 살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삶은 행복한 삶입니다. 그리고 참 재미있는 삶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기대하는 답은 그런 것이 아닌 듯 합니다. 아니면 그들이 들어온 대답이 다른가 봅니다. 


 

"참 어렵고 힘든 고행의 길입니다."


 

이런 대답을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을 떠올리면 십자가와 수난의 주님을 떠올리는 것처럼 그분의 길이 가시밭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또 그런 생각들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이들 덕분에 고생 없이 고생한다는 인사를 받고 산지도 참 오래된 듯 합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은 이렇습니다. 사제에게 아니 저에게 사람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며 주님의 말씀을 나누고 주님의 생명을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은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식사시간입니다. 일주일을 기다리면 대가족이 함께 모일 수 있고 혹시라도 안 온 사람이 있으면 섭섭한 일입니다. 미사 전에는 구멍가게 같은 고해소에 들어 앉아 꾸벅 거리며 혼자와의 사투를 벌입니다. 누구라도 와 주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30분 전이라고 말하고는 15분 전, 또 10분 전으로 줄어드는 게으름도 피우지만 그래도 들어서면 세상에서 유일한 공간 안에서 사람을 기다리는 설레임도 느낍니다. 


 

시간이 갈 수록 미사 시간이 다가온다는 기분 좋은 조급함과 혹시 5분 전을 넘어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밀려듭니다. 그리고 정각이 되면 지체 없이 가게 문을 닫고 제의실로 향합니다. 거추장스러운 개두포를 걸치고 목을 조입니다. 칼라를 가리면 그만인데 굳이 시작한 것이 습관이 되어 매고 봅니다. 제의를 입고 복사를 앞세우고 성전 문 안을 들여다 보면서 사람들이 어느 정도 오셨는지 확인합니다. 


 

많으면 기분이 좋고, 없어도 그만입니다. 그저 그 길을 걷는 것과 주님과 함께 하는 식사에 즐거움이면 족합니다. 누구라도 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주님 앞에서 함께 하고 주님과 함께 세상으로 가는 걸음을 보는 것도 좋습니다. 


 

혼자 있을 때는 많이 심심합니다. 그리고 타고난 게으름으로 뭐라도 하지 않으면 늘어지는 것이 불안해 돌아다니거나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이런 불필요한 일들은 남들이 나무라지 않아도 답답한 모습입니다. 그러니 그런 게으름의 시간보다 성사에 임하는 것이 훨씬 즐겁습니다. 


 

본당을 벗어나면 불안합니다. 물론 제가 없다고 갑자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또 제가 있어서 불편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성당이 가장 좋은 집이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그 수고는 미안하지만 그래도 행복한 일입니다. 수도 없이 나가돌아도 돌아올 집이 있다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고 안심되는 일입니다. 


 

세상에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처음부터 하나도 없었지만 뭐 다른 이들이 가지고 있으면 그만이지요. 어차피 필요하지도 않았던 것인데 없다고 답답할 필요도 걱정할 일도 아닙니다. 지금 저는 필요 이상으로 관심을 받고 있고 사랑을 받다 못해 체할 정도로 사랑받습니다. 여기서 제가 좋아하는 무엇인가가 생기면 나는 이들을 모두 버리고 말테지요. 아니면 체면치레 정도로 모습을 보여주고 제가 좋아하는 것에 목을 멜 것입니다. 

그런 재주가 없으니 즐겁습니다. 


 

저는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습니다. 그래서 별 관심이 없고 그럴 이유도 느끼질 못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저를 학대할리는 없습니다. 그 시간에 해야 할 일과 제가 있어야 할 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람들과 함께 세상에 있어서 그것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즐거움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그런 숙제로 저에게 문제를 내 주시니 그 문제와 숨겨진 답을 찾는 것으로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물론 그 행복의 몫은 나의 것이 아니겠지만 기쁘고 즐겁기에는 충분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저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목숨까지도 미워하기로 합니다. 그게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제가 제 목숨을 위해 시간과 정성과 사랑을 허비하지 않기를 원하기는 합니다. 그 정도도 참 행복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만 우리가 함께 모여 예수님의 생명을 나눈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 말씀 안에 모두 함께 한다는 것임을알려주고 싶습니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자기애'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는 그 가르침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마음에는 아버지께 대한 사랑과 세상과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 삶에 당신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주님이 계신 곳이었고, 우리의 허전하고 힘겨운 마음을 주님의 사랑이 채웠습니다. 그것이 주님의삶이었고 우리의 행복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제자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사랑하려 애를 쓰지 않아도 됩니다. 충분히 하느님의 사랑이 차고 넘치는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들이 나보다 훨씬 먼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어서 나는 하느님과 다른 이가 사랑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반성은 하지 않도록 합시다. 그저 웃으며 지금 해야 할 사명이 가장 행복한 우리의 삶이라는 것만 생각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길로 걸으며 만나는 모든 것을 사랑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어 갔으면 합니다. 이리 저리 정신 없이 이어지는 이 말처럼 우리는 행복한 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이 말 좀 시원하게 하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