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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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칠한 무덤. 겉을 치장하여 그 속의 주인공을 한껏 치켜세우는 듯 보이는 이 같은 행동을 예수님은 '위선'으로 보십니다. 이미 죽어버린 가치에 장식을 더하고 의미를 붙여 더 이상 볼 수 없는 역사로 돌려버리고 박제해 버리는 행동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람이었고, 하느님의 율법을 알았으며, 백성들을 가르치고 그들 사이에 '의인'이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늘 하느님으로 가득했고 그들의 행동은 율법서와 같은 품위와 권위를 지녔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 등장하신 하느님을 말하며 수도 없이 등장하는 예언자들을 하느님 약속의 증거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그 수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을 그들과 같은 이들이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 아래 살았으나 그 이름은 그들이 자신을 숨기는 견고한 방패와 같았고 그들에게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들의 가르침대로 하느님을 믿었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하느님이 보내신 예언자들을 눈 앞에서 치워버렸고 하느님은 또 다른 종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의 자리를 차지한 그들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자신들의 권위와 가치를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 하느님의 거룩하심으로 치장된 모습을 한 채 하느님 아래가 아닌 사람들 위에서 살았습니다. 곧 사람들의 존경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기고, 사람들을 죄인으로 내 모는 만큼 그들은 의인으로 거룩함을 만들어 갔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을 덮어 버리고 그 몫을 지닌 이들을 없애는 것, 곧 살인자의 모습을 감춘채 하느님의 종으로만 처신하는 위선이 그들이 사는 방식이 되었습니다. 


 

한동안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이야기를 입에 담으며 수치심 비슷한 것을 느낍니다. 좀 유치한 감정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그 수치심은 첫째로 내가 믿고 따르는 분이 그들이 죽였던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우리가 그들의 위선을 따르는 이유는 그들이 백성의 '지도자'로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어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지도자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적어도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처럼 사는 지도자는 지도자가 아니라 그냥 '착한 사람'일 뿐입니다. 


 

성직자로 살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거룩함으로 채워진 성전을 지키며 신자들의 숫자와 그들이 내는 헌금의 양으로 자신의 능력치를 확인하는 삶. 비교 당할 대상이 또 다른 사제 이상 없는 삶을 살면서 제각기 자신의 특기와 재능을 통해 차별성을 지니는 것으로 하느님의 선택의 이유를 만들어 버리는데 익숙해지는 것도 이 삶입니다. 사람에게 보냈으나 자신에게 사람을 모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거나 아니면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기본적인 존경과 여유 속에 사는 것이 가능한 삶입니다. 


 

사람들은 성직자의 삶이 고단하고 어려운 삶이라 말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그 고단함을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우리가 유추하는 착각일 뿐입니다.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제자들과 백성들 사이에서 행복하셨던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것이 이 길인데 우리가 죽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인지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것인지 모를만큼 사람들 사이에 누군가가 전해준 잔인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통을 짊어지고 사는 듯 행동하면 더욱 거룩함이 배가 되는 것이 이 삶입니다.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고 깨뜨릴 수도 없을 정도로 견고한 이 회칠은 일종의 '문화'가 되었고, 계층의 '특징'이 되어 있습니다. 종교를 가리지 않고 이 회칠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성직자의 지극한 겸손이라하더라도 평신도의 열심 위에 존재하는 것이 이 회칠의 본질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같아야 하고,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나라이지 우리가 설정하고 살아가는 어떤 기준으로도 나뉘어지거나 살아지지 않는 곳임을 안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모습은 이미 그리스도에게서 무너졌음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성직이 무너지는 것도 폄하되는 것도 아님에도 우리는 그 최소한의 위치를 사람들 위에 두려고 합니다. 그리고 삶에서 하느님을 따르며 착했던 무수한 성인들의 선함을 조롱하던 거대한 권위의 사람들은 잊은채 그들을 성인으로 추앙하는 살인자들의 유산을 그대로 따라가는 중입니다. 우리가 따르는 삶의 성인들은 대부분 그 당시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한 선하고 바보같았던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제도 그처럼 살고 싶어하지 않았던 이가 본당 신부의 주보가 되어있음은 고통스레 복음을 보게 되는 이유입니다. 누가 회칠한 무덤인지를 논하고 반성하는 것은 다시 말하지만 유치한 일입니다. 적어도 이렇게 살아가는 중에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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