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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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듣기 : https://youtu.be/RctPTZ8Qzo4


 

예수님의 유명한 비유 중 빠지지 않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 혹은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가 오늘 복음입니다. 복음이 유명한 만큼 이 복음의 내용을 어떻게 묵상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들도 많이 나옵니다. 어떤 이들은 작은 아들의 입장에서, 또 어떤 이들은 자비로운 아버지의 입장에서, 그리고 가끔은 큰 아들의 입장을 대신해 묵상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헤아리는 것이 어떤 것이 옳고 그를리는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이야기의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왜 이 이야기가 등장했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등장한 이유와 가르침이 조금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등장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세리와 죄인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예수님의 말씀에 늘 곤욕을 치렀던 다른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였습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가르치던 것은 예수님과 다른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늘 사람들에게 세리와 죄인들처럼 되지 않기를 가르쳤고 그래서 의인들로서 의인들을 만들기 위해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그들의 입장에서도 분명 중요하고 공감이 되는 내용이 많았을 겁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자존감으로 예수님을 미워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자리에는 자신들이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이들이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우리가 작은 아들인지, 큰 아들인지 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그들을 싫어하는 이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어떤 입장인지를 생각하기 보다 우리가 하느님을 생각하고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설정할 때의 모습들을 헤아려 보는 것이 더 중요해집니다. 우리는 과연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며 사는지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대하고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세상에는 의인이 많을까요? 아니면 죄인이 많을까요? 누군가 이렇게 질문을 한다면 우리의 솔직한 대답은 '죄인이 아닌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라는 겸손한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우리는 실제의 삶에서는 상대적인 차이와 무게에 따라 죄인과 의인을 나누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리고 같은 기준으로 무리를 이루고 그 집단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그것이 사회의 한 부분이 된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2천년 전과는 다르지만 또 같은 모습으로 생활합니다. 


 

이야기 또한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는 차이가 보입니다.  
 

작은 아들은 '스스로 죄를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정이 어렵게 되었을 때조차 그의 반성과 되돌아옴을 우리가 순수한 마음으로 '회개', '통회' 등의 단어를 쓸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는 이미 자신의 몫을 다 써버렸다는 것입니다. 기회가 없어야 정상이고 당연한 이에게 줄 수 있는 것과 또한 그가 원한 것은 '아들'이 아니라 '먹을 것'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야기를 엉망으로 만든 것은 아버지입니다. 


 

이야기는 작은 아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큰 아들도 그 점에 분노한 것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품꾼이 되어 먹을 것이라도 허락받기를 바랐고 그랬다면 큰 아들의 화는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여전한 아들로 여겼고 그에 걸맞는 대접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 큰 아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점에 대해 불만을 가진 큰 아들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불만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아버지나 큰 아들 둘 중 하나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헤아려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 아버지가 어찌 작은 아들을 잊을 수 있는지, 또 돌아온 아들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지 큰 아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때이지 그것에 불만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따질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해보면 창조주 하느님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면서도 우리는 자주 조건을 따지고 경계를 세웁니다. 그리고 분리하는데 몰두하고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에서 자존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고 노력해야 하는 신앙생활, 곧 우리의 인생은 세상 모든 이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원래 모습이자, 되찾아야 할 가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당은 여전히 죄인들이 가득해도 좋은 곳이어야 합니다. '감히'라는 엄청난 무게의 이야기로 사람들을 가려내고 서로 불목하여 평가하고 밀어낼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설 각오가 있다면 모든 것을 넘어 즐거워하고 함께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의 고백이 작은 아들의 이야기처럼 미리 준비한 살고 싶어한 대본에 의한 것이라도 그것보다 그를 다시 만난 기쁨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작은 아들이라면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아야 하고 큰 아들이라면 아버지의 넘치는 사랑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떠날 생각도 밀어낼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단지 우리에겐 깨달음의 시간이 필요하고 또한 이해하려 애를 써야 하는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입니다. 우리는 같은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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