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18일 연중 제16주일 
 
 
어떤 형제님이 제게 묻습니다. 
 
“신부님,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워낙 가리는 음식 없이 잘 먹는 저입니다. 그래서 아무것이나 다 좋아한다고 했더니, “그래도 지금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을 것 아니에요?”라고 물어보십니다. 바로 그 순간, ‘떡볶이’가 먹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떡볶이요!”라고 대답했더니, “남자가 무슨 떡볶이에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신부와 점심 식사를 같이하러 밖에 나갔습니다. 무엇을 먹을지 고르다가 제가 “파스타 먹으러 갈까?”라고 하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남자끼리 어떻게 파스타를 먹어요?” 
 
남자가 떡볶이를 먹으면 안 되고, 남자끼리 파스타를 먹으면 안 되는 법이 있을까요? 깜빵 갈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저래야 한다’라는 식의 편견이 우리의 생각 안에 많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이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아서 새로운 변화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변화를 추구하는 이를 오히려 커다란 죄인 취급을 합니다. 
 
일상 안의 고정관념 탈피가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쫓아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쫓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좋은 말씀을 듣기 위해서일까요? 그냥 좋은 구경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행동들, 즉 사람을 치유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또한 배부르게 먹여주는 등, 인간의 눈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들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음식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막무가내식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향해 짜증도 나고 미움의 감정도 생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감정을 가지셨음을 복음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어떻게든 사랑을 주시려는 주님의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제대로 따르지 않아도, 다른 이유로 당신을 따르고 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습에 가엾은 마음을 간직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큰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어떤 선입견도 품지 말고, 주님의 뜻인 사랑에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시련을 겪는다는 것은 바닷가에 있는 자갈이 되는 것과 같다. 여기저기 다치고 멍들지만, 전보다 윤이 나고 값지게 되기 때문이다(엘리사베스 퀴블러로스). 


빠른 판단보다는 한 번 더 생각하는 신중함을…. 
 
 
첫 번째 방은 잔인한 킬러가 칼을 들고 있습니다. 두 번째 방은 한 달을 굶은 사자가 있고, 세 번째 방에서는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세 개의 방 중에서 가장 위험한 방과 그래도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방은 어디일까요? 
 
많은 사람이 첫 번째, 세 번째 방이 비교적 안전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킬러라도 사람이니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불이 났으면 자신이 그 불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말도 통하지 않는 배고픈 사자이기에 당연히 제일 위험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그런데 제일 안전한 방은 한 달 굶은 사자가 있는 방이라고 합니다. 너무 긴 시간을 굶어서 탈수증세로 움직이지 못하거나, 혹은 죽은 상태일 수도 있기 때문이랍니다. 
 
우리의 결정은 대부분 이렇지 않았을까요? 깊이 생각하기보다 순간적인 빠른 판단을 신뢰합니다. 한 번 더 생각하는 것보다는 빠른 판단이 더 이로울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로 나아가는 것도, 섣부른 판단에서 올 때가 많습니다. 한 번 더 생각하는 신중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 죄의 숫자를 계속해서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조명연 마태오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