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레지오 마리애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역사
한국에 레지오 마리애가 도입되었던 것은 1953년으로 한국전쟁이 끝나가는 시기였다. 당시의 교회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물적, 인적 자원도 부족한 상태였고, 교리교육이나 선교에서는 물론 영세 입교자들의 지속적 교육에 있어서도 무방비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전쟁 중에 많은 사제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사목을 수행할 인원도 부족한 실정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당시 한국교회에 사도직 운동이 절실히 요청되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목포 산정동 본당에서 광주 교구장 서리를 수행하고 있었던 현 해롤드 헨리 주교(Harold W. Henry 1909~1976)는 한국에 레지오를 도입했다. 그는 레지오 단원들에게 예비자 안내에서부터 세례를 받고 신자의 정체성을 찾아갈 때까지 돌보는 등의 일을 수행하도록 했다.
경동 성당의 레지오 마리애 설립 기념 비석
소모임인 쁘레시디움이 확산되면서 이를 지휘, 관리하는 기초평의회인 꾸리아가 목포에 설립되었다. 레지오가 전국으로 확산됨에 따라 꾸리아는 전국 여러 지역으로 펴져나갔으며, 이에 꼬미시움이 광주, 부산, 춘천, 청주 교구에 승격 설치되었다. 이후 한국 레지오 마리애를 대표하던 지닌 ‘광주 중재자이신 마리아’ 꼬미시움이 1958년에 세나뚜스로 승격되었다. 1960년에는 한국 모든 교구 내에 꾸리아가 설립되었다. 이를 통해 조직의 체계화가 이루어졌고 지역 특성에 맞는 활동이 실현되었다.
한국 레지오 마리애 발전 동인
한국전쟁이란 당시 교회의 상태에 대한 응답으로 레지오는 존재하게 되었다. 당시의 활동을 살펴보면 예비신자교육, 가정방문, 냉담자방문, 혼인조당권면, 환자방문 등을 들 수 있다. 한국레지오의 발전 동인으로 시대적 요청, 성모신심의 바탕, 평신도사도직단체의 활성화, 사제의 지원, 지역적 특성에 맞는 교육과 홍보활동을 꼽을 수 있다.
한국 레지오 마리애 도입 60주년을 기념하는 전국 선교 신앙대회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문제점과 과제
오늘날, 세속화, 본당 내 소공동체와의 갈등, 사목자와 레지오의 갈등, 성모신심에 대한 그릇된 지향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이 붉어지고 있다. 또한 신자들의 고령화와 함께 레지오 단원도 고령화되고 있다.
레지오는 훌륭한 신심단체이며 한국교회에 큰 역할을 수행해 왔다. 레지오 마리애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영성과 정체성을 점검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쇄신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현 하롤드, 「나는 레지오 마리애를 택했다①」, 『레지오 마리애』, 173(2002/12), 한국 세나뚜스협의회.
허윤석, 『한국 레지오 마리애와 선교』, 석사학위 논문,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1999.
송원섭,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쇄신 방안 연구』, 석사학위 논문, 인천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2012.
최경용, 『레지오 마리애 영성』, 바오로딸, 1998.
최경용, 『성모님과 레지오 마리애』, 빅벨,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