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emnity of the Body & Blood of Jesus
Corpus Dom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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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st Supper - JUANES,Juan de.
1560. Panel 116x191cm Museo del Prado,Madrid.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대축일
Solemnity of the Body & Blood of Jesus
Corpus Domini 
(celebrazione mobile) - Solennit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체성사를 특별히 기념하고 그 신비를 묵상하는 날이다.
이날은 삼위일체 대축일 다음 첫 목요일이나 주일에 지내도록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주일에 지내고 있다.
이 축일은 1264년 교황 우르바노 4세 때부터 공식적으로 지내기 시작하였으며,
성체 축일과 성혈 축일을 따로 지내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부터 함께 기념하고 있다.

오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의 신비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성찬의 식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습니다.
이 미사 동안,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시는 사랑에 감사하며
우리 모두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도록 다짐합시다.
(가톨릭굿뉴스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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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st Supper - LEONARDo da Vinci.
1498. Mixed technique,460x880cm
Convent of Santa Maria delle Grazie,Milan.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1247년 리에즈에서
몽 꼬르니용(Mont-Cornillon)의 복녀 쥴리앙(축일:4월6일)이라는
 한 수녀의 열성에 의해 처음 드려졌다.

1208년 환시 중에 주님께서
제대의 성체성사를 공경하는 연중 축일이 빠져 있음을
자신에게 알려주셨다고 그녀는 말하였다.
얼마동안의 시간이 지난 후 리에즈의 주교와
 특히 후에 교황 우르바노 4세가 된(1261) 쟈끄 빤딸레옹 대부제가
이 계시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오르비에또(Orvieto) 근처 볼세나(Bolsena)에서 일어난
성체성사 기적에 감명 받은 우르바노 4세는 1264년,
오르비에또에서 교서 "Transiturus"를 반포하는 가운데 새 대축일을 제정하였으며,
이 대축일은 성령강림절 팔부 다음 목요일에 성체본潁?기념하여 지내게 되었다.
쥴리앙은 몽 꼬르니용의 한 젊은 수사에게
새 축일 시간전례 기도문을 만들 것을 부탁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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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 시대까지 사용되고 있는,
교황의 교서에 함께 붙어 있는 시간전례 기도문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근대의 연구는, 이 축일을 위한 미사와 시간전례 기도문은
 성 토마스가 만든 것이라는 전통적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 경향이다.

교황이 새 축일을 서방 교회 전체가 지키도록 자신의 권위로 명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오랫동안 이 축일은 "새 대축일"이라 불렀다.
또한 성체성사 축일, 하느님 축일, 지극히 고귀한 성사 축일,
그리스도의 몸과 피 대축일로도 불렀다.

우르바노 4세가 새 축일을 세운지 두 달 후에 죽은 까닭에 그의 교서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클레멘스 5세(1311-1312)와 요한22세(1317)가 이 교서를 새로 확인한 다음에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이 전 교회에 받아들여졌다.

이 축일을 진작시킨 세 교황 가운데 성체 행렬에 대해 언급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러 지역에서는 빠스카 아침 지성소의 그리스도의 "무덤"에 빨마 가지를 든 채
 성체를 모시고 행진하거나 또는 성대하게 성체를 옮겼다.
본래 의미의 성체 행렬(성체 거동)은 13세기 말 산발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풍습은 14, 15세기에 퍼져나갔다.
로마교회는 15세기에 이를 받아들였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홈에서)
 
*세계성체 대회 수호성인.성 파스칼 바이런 수도자 축일:5월17일.게시판1768번.
*몽 꼬르니용의 복녀 쥴리앙 축일:4월5일(4월6일)게시판1787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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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성사는 우리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그 깊은 신비에 도달하려면 보이는 것에서 출발하여 믿는 것이 이르고
, 더 나아가 믿는 것을 실행하여야 한다.
’보이는 것’이란 빵과 포도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물질적인 빵과 포도주를 사람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주신다.
주시고 받는 양쪽의 행위가 그리스도와 우리의 계약을 암시한다.

’믿는 것’이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미리 보여 주신 제사이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표징으로 인류에게 당신의 생명을 내주시며
당신의 파스카에서 온갖 은혜를 받아 누리게 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빵을 나눌 때마다,
당신을 내주시는 그리스도의 현존과 제대 위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는
 성사의 현존을 깨달아야 한다.
이제 ’믿는 것을 실행’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삶은 인간 존재를 충만하게 할 것이다.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사람들 가운데 살아 계시며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다.
여기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중 계명이 하나 되고,
 믿음과 삶은 다르지 않다는 체험을 입증하게 된다.

복음서가 전하는 성체성사의 제정은 예수님의 죽음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앞당겨 거행한 성사적 표징이다.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의 살과 피를 제자들에게 주신다.

이것은 새로운 계약의 예고이며, "흠 없는 어린양"의 희생으로 날인될,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의 죽음을 실현하는 성사가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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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렐루야.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리라.
◎ 알렐루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사는도다.
우리는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구원의 보증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희망과 기쁨을 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모실 때마다 희망을 갖고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잔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매일미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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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per at Emmaus-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48.Oil on canvas, 42 x 60 cm.Musee du Louvre, Paris
 
성 프란치스코의 권고1
 
그리스도의 몸
1) 주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2)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
3)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4)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희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나의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6-9).

5) 아버지는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고"(1디모 6,16),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며"(요한 4,24),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요한 1,18).
6) 그래서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주기에"(요한6,63)
영적으로써가 아니면 그분을 뵈올 수 없습니다.
7) 이와 같이 아드님도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기에 아버지를 뵈옵는 방법과 다르게
또한 성령을 뵈옵는 방법과 다르게는 아무도 아드님을 뵈올 수 없습니다.

8) 이 때문에 주 예수를 그분의 인성에 의해 보았지만 영과 천주성에 의해 그분이
하느님의 참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은
 모든 사람들은 단죄 받았던 것입니다.
9)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제대 위에서 사제의 손으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성되는 성사를 보면서 영과 천주성에 의해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것을 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모든 사람들도 단죄받습니다.
10)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이것을 증명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
"이것은 내 몸이며 많은 사람들을 위해 흘릴 새로운 계약의 나의 피이다"(마르14,22.24).
11) 또한 말씀하십니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요한 6,54).

12) 이 때문에 당신을 믿는 이들 안에서 머무르시는 주님의 바로 그 영이
주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13) 이 영의 한 몫을 지니지 않은 채 방약무인(傍若無人)하게 주님을 받아 모시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1고린11,29).

14) 그러니 "한다한 사람들이여, 언제까지나 굳은 마음을 가지렵니까""(시편 4,3).
15) 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의 아들을 믿지 않습니까?(요한 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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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보십시오! 그분은 어좌에서
 동정녀의 태중으로 오신 때와 같이 매일 당신 자신을 낮추십니다.
17) 매일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로 오십니다.
18)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하여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제대 위에 내려오십니다.
19) 그리고 당신 자신을 실제로 육(肉)으로 거룩한 사도들에게 보여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축성된 빵으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십니다.
20) 그리고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는 그분의 육신만을 보았지만 영신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믿었습니다.
21) 이와 같이 우리들도 육신의 눈으로 빵과 포도주를 볼 때,
그것이 참되고 살아 있는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것을 보도록 또 굳게 믿도록 합시다.

22) 이와 같이, "나는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하고
당신 자신이 말씀하시는 대로 주님은 당신을 믿는 이들과 함께
이런 형상으로 항상 계십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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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대사전에서

성체 聖體
라틴어 Eucharistia
영어 Eucharist


빵과 포도주의 외적인 형상 속에 실제로,
 본질적으로 현존(現存)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말한다.
어원적으로는 희랍어 ’유카리스티아’(eucharistia)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말의 본래의 뜻은 ’감사하다’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은혜에 감사함을 의미한다.

구약성서에는 성체에 대한 많은 예표(豫表)들이 나오는데 창세기 14장 18절의
 ’떡과 술’의 표현이 그 한 예이다.
또한 예수는 스스로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라고 하셨으며,
최후만찬 때 하신 말씀(마태 26:26-28, 마르 14:22-24, 루가 22:19-20, 1고린 11:23-25)을 통하여
성체성사(聖體聖事)를 설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성체에 대한 확신은 예수의 강력한 말씀에 근거하므로 성체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성체는 미사 중 성찬의 전례 부분에서 축성되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해져
 한 가지 신비를 세 가지 측면에서 보여준다.

우선 성체는 세상 끝날까지 인간과 함께 계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비롯된
 ’실재적’이며 ’신체적’인 현존이다.
또한 성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이다.
즉, 미사성제를 통해 이 희생이 계속됨으로써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체는 사랑의 일치를 보여준다.
즉 신자들은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하느님과의 일치라는
 영혼의 초자연적 생명을 기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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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혈 聖血
라틴어 Sanguis Pretiosissimus
영어 Precious Blood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 성혈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이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상징한다.
예수께서도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피다"(마태 26:28)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성혈은 사도시대 이래로 신자들의 흠숭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특히 성체성사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미사 때 봉헌되는 포도주가 사제의 축성으로 성혈로 변화되어 포도주의
 외적 형상 속에 그리스도가 현존하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성체를 받아 모심과 마찬가지로
 성혈을 받아 마심으로써 살아있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게 된다(요한 6:54-56 참조).
성혈에 대한 신심은 전통적인 것으로서
특히 교황 글레멘스(Clemens) 6세(재위: 1342-1352)는
그리스도의 피는 성자와 함께 결합되어 있기에 너무나 귀중하여
단 한 방울의 피로써도 모든 인류의 속죄에 충분하다고 하였다.

또한 1849년, 교황 비오(Pius) 9세는
 7월의 첫 일요일을 성혈 축일로 지정하여 모든 교회가 지키도록 했으며,
1914년 교황 성 비오(St. Pius) 10세는 축일을 7월 1일로 변경시켰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성혈 축일을 성체 축일에 함께 기념하게 되었다.
즉 삼위일체 주일 후의 첫 목요일이나 첫 일요일은
 성체 성혈 대축일의 이름으로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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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Supper - DUCCIO di Buoninsegna
1308-11. Tempera on wood, 50 x 53 cm.
Museo dell'Opera del Duomo, Siena
 

최후만찬 :
예수께서는 공생활 3년을 마칠 무렵
 그 당시의 관습대로 예루살렘에서 파스카 축제를 지내려고 하셨다.
자기의 죽음을 예견하시고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같이 하기로 하셨다,
그것은 평소 예수께서 제자들과 같이 이 파스카 축제를 지내려고 하셨기 때문이다(루가 22:15).
예수께서는 ’만찬 도중에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먹는 예식을 하시다가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니라"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26:26).
식사를 마치시고 포도주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내 피를 흘리는 것이다"(루가 22:20) 하시며
제자들에게 "나를 기념하여 이 예를 행하라" 하시며 마시도록 권하였다.

이로써 최후만찬 때 예수께서는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새로운 계약을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과 맺었던 것이다.
사도들에게 파스카 축제를 같이 하기로 한 이유는 모든 이의 죄사함을 위한
 새로운 계약에 제자들을 참여시키고
그들 제자들로 하여금 ’이 예(禮)를’ 영속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미사성제(성체제의)는 영적 생명을 위한 양식이고
 천상의 파스카 잔치의 전신인 것이다.

구약의 파스카와 신약의 파스카(최후만찬)를 비교해 보면 그 뜻이 확실해진다.
구약의 파스카- 어린양의 희생 · 양고기(음식) ·
양의 피(해방의 표시) · 노예생활에서 해방(육체적)
신약의 파스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 · 그리스도의 몸(빵, 음식) ·
그리스도의 피(포도주, 새로운 계약) · 죄와 죽음에서의 해방(영생)
이렇게 비교해 볼 때 구약의 파스카와 신약의 최후만찬은 형태는 비슷하지만
내용은 전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약의 파스카는 상징적이고
 현세적 생명을 말하며 신약의 최후만찬은 실체적이고 영생을 위한 것이다.
또한 구약은 신약의 준비이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완전한 해방,
즉 죄와 죽음에서 벗어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신약에서 자신의 몸과 피를 제물로 바쳐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 희생되시고
’모든 사람들의 죄 사함을 위해’ 자신의 몸과 피를 제물로 바쳐 영적 양식으로
 우리에게 남겨 주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을 신약에 참여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의 혈제를 피 흐르지 않는 제사
즉 빵과 포도주의 형태 안에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 것이 바로
 미사성제(성체성사, 성체제의)이다.
 
*[성목요일]주님 만찬 미사:4월8일(이동축일).게시판1703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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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희생과 미사성제 :
성체의 제전은 초대 교회 때부터 그리스도 신자 공동체의 중심이었다.
"이 예를 나를 기념하기 위해 행하여라"란 말씀으로 가톨릭 교회는 오늘날까지
세상 어디서든지 사랑과 신뢰와 신앙으로 성체의 제정을 행하여 왔다.
 이 성체제전은 미사성제이다.

십자가의 희생은
그리스도가 인류 구원의 대사업을 위해 스스로를 제물로 봉헌했기 때문에
봉헌자도 그리스도이시고 제물도 그리스도이시다.

남을 위해, 남의 속죄를 위해 바치는 희생제물은 참다운 봉헌이고 참다운 제사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위대한 사업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성교회 안에,
특별히 전례행사 안에 항상 현존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미사성제에 있어서 특히 성체 형상 안에 현존하시지만,
 사제의 인격 안에도 현존하신다.

즉 "전에 십자가상에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같은 분이, 지금도 사제들의 봉사를 통하여
제사를 봉헌하고 계시는 것이다"(트리엔트 공의회 제22차 회의, 미사성제에 관한 교리 제2장).

이렇게 미사성제에 있어서도 제물도 제관도 그리스도 자신인 것이다.
사람인 사제는 다만 그리스도의 도구인(道具因)일 뿐이다.
십자가상의 희생이나 미사성제는 방법상 다를 뿐이지 인류 구원과
 속죄의 제사임에는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또한 동정녀 마리아 몸에서 태어난 나자렛의 예수.
공생활 3년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시던 예수,
기적을 행하고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시던 예수,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어 성부께 영광을 받은 천상의 예수,
빵과 포도주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는 다만 한 예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최후만찬 때 자기의 사명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왔다가 이제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 돌아간다"(요한 16:28)라고.
그러나 그리스도는 혼자 아버지께 돌아가기 위해서 오신 것은 아니다.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을 성부께 데리고 가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자기와 같이 사람들을 성부께 데려가기 위한 가장 뛰어난 사업이 성체성사의 제정이다.
그래서 성체는 성부께로 가는 길이다.

성체는 우리를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께로 돌아가게 하는 성사이고,
구원사업의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완전히 실현하는 성사이다.
그리스도 즉 우리들의 사제이시고 중개자이시고
 우리들을 위한 제물이고 길이신 그리스도는 성체 안에서
성부와 우리를 만나게 하신다.
성체성사는 다른 모든 성사의 정점이요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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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

○ 엎디어 절하나이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하느님,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삽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

● 보고 맛보고 만져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
믿나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참된 진리 없나이다.

○ 십자가 위에서는 신성을 감추시고
여기서는 인성마저 아니 보이시나
저는 신성, 인성을 둘 다 믿어 고백하며
뉘우치던 저 강도의 기도 올리나이다.

● 토마스처럼 그 상처를 보지는 못하여도
저의 하느님이심을 믿어 의심 않사오니
언제나 주님을 더욱더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 하소서.

○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사여,
사람에게 생명 주는 살아있는 빵이여,
제 영혼 당신으로 살아가고
언제나 그 단맛을 느끼게 하소서.

● 사랑 길은 펠리칸, 주 예수님,
더러운 저, 당신 피로 씻어주소서.
그 한 방울만으로도 온 세상을
모든 죄악에서 구해 내시리이다.

○ 예수님, 지금은 가려져 계시오나
이렇듯 애타게 간구하오니
언젠가 드러내실 주님 얼굴 마주 뵙고
주님 영광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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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 Thomas More - HOLBEIN, Hans the Younger
1527-28. Black and coloured chalks on paper, 397 x 299 mm. Royal Collection, London

 

축일:6월22일
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
ST. THOMAS MORE
San Tommaso Moro Martire 

Born:1478 at London, England
Died:beheaded in 1535; head kept in the Roper Vault, Saint Dunstan's church, Canterbury, England;
body at Saint Peter ad Vincula, Tower of London, England
Canonized:1935 by Pope Pius XI
Tommaso = gemello, dall'ebraico

Ordo Franciscanus Saecul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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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지도자는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관할권을 가질 수 없다고 한

토마스 모어는 자기 믿음의 대가로 생명을 바쳤다.
1535년 7월 6일, 런던탑에서 참수되어 순교한 토마스 모어는 헨리8세의 이혼과 재혼,

그리고 영국 교회의 창설을 끈질기게 부인했다.


"4계절의 사나이"라고 불린 모어는 문학자이며

뛰어난 법률가로서, 신사였으며 네 아이의 아버지로 영국의 수상이었다.

훌륭한 영적 인물이었던 그는 앤 볼레인과 결혼하기 위하여

아라곤의 카타리나와 이혼한 왕의 처사를 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로마 교회와 관계를 끊고 교황의 수위권을 부정하는 헨리 8세를

 영국 교회의 최고 우두머리로 인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반역죄로 재판을 기다리면서 런던탑에 갇혀 있었다. 그 반역죄란 계승 법령과

영국 왕이 영국 교회의 우두머리라는 내용의 문서에 서약하지 않은 것이었다.


토마스 모어는 확신을 가지고 "나는 모든 그리스도교계의 공의회를 알고 있지만

 자기 양심의 판단에 따르지 않은 것은

오직 한 나라의 공의회뿐"이라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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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후인 1935년에 토마스 모어는 하느님의 거룩한 인물인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몇몇 성인들은 20세기에 와서 더욱 두드러진다. 최고의 외교관이며 조언자였던

그는 왕을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윤리적 가치관과 타협하지는 않았다.
권위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맹목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것이 권위에 대한 진정한 충절은 아님을 알았던 것이다.
헨리8세 자신도 이것을 잘 알았다. 그는 토마스 모어란 인물이 신중한 사람이며

 그의 인격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수상인

그를 자기 편에 두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헨리 8세에게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두 가지 문제를 인정할 수 없었던

 토마스가 수상직을 사임하자 헨리 8세는 그를 없애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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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집행인이 토마스 모어에게

눈가리개를 하려고 하자 그는 자기 스스로 그것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처형대의 받침 위에서-그것은 단순한 나무토막이었다-

자기 머리를 쳐들고 잠깐만 기다리라는 신호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 농담을 했다.

나무토막 위에 놓여 있는 자기 수염을 치우고 싶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것(수염)은 반역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거운 도끼가 천천히 들려 올라가서

 잠깐 동안 공중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테오도르 메이나르, "영웅 인문주의자")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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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for the Family Portrait of Sir Thomas More-HOLBEIN, Hans the Younger
c. 1527. Pen and brush in black on top of chalk sketch, 38,9 x 52,4 cm
Kupferstichkabinett, Öffentliche Kunstsammlung, Basle


인간은 보통 선뜻 눈에 띄는 공훈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앞에는 초자연적 성덕만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자연과 초자연적인 것을 다 겸한 공적을 남긴 사람도 있으니,

그런 이는 물론 세인의 갈채와 아울러 하느님으로부터의 상급도 받게 되는 것이다.

바로 지금 말하려는 성 토마스 모어가 바로 이 같은 분이다.

 

그는 1480년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매우 강직한 성격으로 지방민의 신망이 두터운 판사였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토마스는 엄격한 아버지 슬하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그는 그 당시 재산의 중직에 있던 캔터베리의 대주교

 요한 머턴 추기경의 슬하에서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솔직하고 담백한 그의 성품은 곧 추기경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그의 도움으로 유명한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대 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당시 문학을 한다는 이들은 연약하고 게을러 자연 타락의 구렁에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런 환경에 휩쓸릴 겨를도 없이 오직 면학에만 열중했다.

이는 엄격한 아버지가 가끔 보내주는 약소한 학비로 그런 방면에 여유를 갖지 못한 데도

 그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그의 유년 시절부터 마음속에 굳게 간직한

 신앙과 열렬한 기도 생활의 힘이 더욱 컸던 것이다.

그는 다윗 성왕의 시편에서 마음에 맞는 구절을 마음대로 선택하여

스스로 기도문을 만들어 조석으로 열심히 기도했다.

 

그의 학교 성적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모두가 수(秀)였다.

 특히 그는 라틴어에 능숙하여 어려운 문구를 자유자재로 구사(驅使)하며 시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어렵다는 시인 루싱아의 소설 중의 회화 편을 손쉽게 영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

 

그러나 토마스의 입신 출세만을 바라던 아버지는 그를 더 이상 그곳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그는 곧 런던에 돌아와 법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의 공명정대한 사건처리 솜씨는 귿 그 지방민들의 깊은 신망을 받게 되어,

불과 25세라는 약관으로 민의원에 당선되는 영광을 차지했다.

 

민의원이 된 그는 개인의 이익보다 오히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해야된다는 결심아래

그야말로 분골쇄신하여 활약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어떤 추가 예산안 작성시에 10만 파운드의 예산액을 3만 파운드로 삭감하려는 논쟁을 벌여

그 결과 불행히도 의원직을 사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일단 의원직을 사퇴했으나, 정의를 위해 싸운 그의 공적은 잊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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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가 법률을 더 깊이 연구할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그 뒤 4년 동안 가끔 가까운 수도원을 찾아 수사들과 같이 고해의 생활을 하는 것을 배웠고

그것으로써 일신상의 덕을 닦았다.

그동안 그는 수사나 혹 사제가 되려는 생각으로 이를 지도 신부에게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끝내 승낙을 받지 못하고 다만 성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2년간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에 유학했다.

거기서 돌아온 그는 다시 변호사업을 시작하고 경건하 요안나 골드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모진 바람은 다시 불어왔다.

 즉 요안나는 남매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자녀의 양육을 위해 토마스는 다시 과부인 알리스와 결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마스의 가정은 신심생활의 거울이었다.

그는 가장으로서 모든 면에 잇어 모범이 되어 매일 미사에 참여함은 물론,

 식사때에도 성서 구절을 낭독하고 처자와 더불어 성서에 대산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다른 이들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말할 것도 없었고 손님을 대접할 때도 얼마나

 정성껏 친절을 베풀었던지,

사방에서 찾아든 손님들로 집안이 들끓었으며, 그 중에는 외국손님도 많이 끼어있었다고 한다.

 첼시에 별장을 둔 후부터는 더욱 많은 손님을 대접했다.

 

그러는 동안 토마스의 명성이 날로 높아가 마침내 대심원장이라는 중직에 오르게 되었다.

국왕 헨리 8세는 그를 신임하여 그에게 프랑스와의 화친 문제등 기타 여러가지 중책을 맡겼으며,

그때마다 그는 대 성공리에 책임을 완수 했다.

 그러자 국왕은 그를 더욱 더 믿게 되어 1529년 10월에는 그를 재상직에 올려 주었다.

본래 겸허한 토마스는 그 같은 고위 영직을 탐하지 않았으나

 국왕의 명이므로 그를 받들어 그 선정에 적극 조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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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그가 대심원장 때의 일화 한 토막이다.

그는 중대한 사건의 결심판결에 앞서 일개 판사에 불과한 노부(老父)앞에 꿇어

 올바른 판결을 위한 축복을 빌었다 하니,

그가 얼마나 책임감에 충실했던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같이 국왕의 총애를 받은 토마스는 신(臣)과 민(民)으로서의 모든 영예를 다 지녔다고 볼 수 있지만,

그는 결코 국왕의 비도(非道)에 대하여 묵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즉 헨리 8세가 안나 볼레인과 결혼하기 위해 본처인 황후와 이혼하고자

 모어에게 동의를 청한 때이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헨리 8세의 사건이다.

 

이로 말미암아 오늘의 영국 성공회가 시작된 것이지만,

가톨릭적 결혼관은 "주님께서 맺어주신 바를 사라미 능히 이를 풀지 못하느니라"하신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혼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토마스는 국왕에게 그렇게 할 수 없음을 권유하려 했으나

국왕이 도저히 이를 들어주지 않았기때문에 마침내 사표를 내게 되었다.

물론 왕은 이를 수리하지 않았다. 토마스의 고민은 날로 커져만 갔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정적들은 때를 이용하여 여러 자기 모략으로 토마스에게

 역적의 죄목을 씌웠다. 토마스의 충성은 세인이 다 알기 때문에,

그런 죄목에 대한 혐의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다만 신조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일보도 양보치 않을 것은 분명했던 것이다.

 

이것이 국왕의 비위에 거슬리게 되어 그는 즉시 감옥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재산까지도 몰수당했다.

그는 최후 판결을 받는 날 눈물겨운 심정으로 고해 영성체하고 미사 참여를 마친 후

일단 신자들에게 이별의 인사를 고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몸이 되고 말았다.

 

재감 1년간, 정적들은 수차에 걸쳐 그의 배교와 번의 (飜意)를 꾀했다.

심지어는 그의 사랑하는 딸 마르가리타를 보내 "피셔 주교님도 국왕의 이혼을 승낙하셨는데

 아버지도 마음을 돌리세요"라고 말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 죄를 지을 수는 없다"하며

 끝까지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다음은 사랑하는 아내 알리스가 와서 애걸했다.

남편이 없는 가정이란 말할 수 없는 형편이라는 등 여러 가지 사정을 들어 눈물로써

 토마스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토마스는 "알리스, 내가 양심을 어겨서 국왕의 비행에 동의하고 형벌을 면한다 합시다.

 우리가 앞으로 얼마동안 더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며 살 수 있겠소?"

 

"한 20년쯤은.."

"뭐 20년쯤? 그래 그것 더 살려고 죽어서 영원한 지옥 불을 당해도 좋단 말이오?

그건 너무나 미련한 짓일 뿐이오" 하는 대답뿐이었다. 토마스의 옥중 생활을 편지를 쓰거나

 저서를 저술하는 것 등이었다

. "신앙을 위한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등은 재감 중에 저술한 서적이다.

 얼마 후 그는 펜과 잉크까지도 압수당했다. 이렇게 되자,

그는 기도를 드리는 것 외에는 위로를 삼을 길이 없게 되었고,

가끔 종이 조각에다 숯 부스러기로 편지를 써서 처자에게 소식을 전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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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5년 7월 1일에 토마스에게 추상같은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형 집행은 6일이었다. 그가 단두대에 섰을 때,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기는

 무수한 군중들에게 전래대로 고별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그것마저 인심을 소란케 한다는 이유로 금지 당하고 말았다.

 "나는 가톨릭 신앙을 위해 죽는다"는 간단한 한 마디와 십자가를 손에 꼭 쥐고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자비를 베푸소서"를 외쳤다.

 

변천 무상함은 세상의 상사인지라, 한때는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었던

 대 재상이 지금은 역적의누명을 쓰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려는 찰나에

아무리 심장이 강철같은 집행인일지라도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본 토마스는 침착한 발걸음으로 그들 앞으로 가까이 가서 등을 두드리며

 "걱정할 것 없어. 지금은 당신들이 나의 가장 고마운 친구들이야"하며

오히려 격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잠깐동안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고스스로 단두대에 머리를 눕혀 형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국왕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으나 그러나 먼저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던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그의 머리는 가장 번화한 거리인

 런던 다리 위에 매달아 오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도록 했다 한다.

 

그러나 정의를 위해서는 어떠한 권력에도 굽힐 줄 모르는 철석같은

 신앙은 마침내 상급을 받았으니, 즉 1934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토마스는 요한 피셔와 더불어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오늘날 가장 근대적인 성인으로

 전세계 신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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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모어가 옥중에서 자기 딸 마르가리따에게 보낸 편지에서

(The English Works of Sir Thomas More, London, 1557, p.1454)

 

하느님께 내 모든 희망을 걸고 내 전부를 맡기겠다.

내 사랑하는 마르가리따야, 내 지난 날의 죄를 볼 때 나는 하느님께로 부터

 마땅히 버림받아야 할 몸임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다 내 신뢰를 걸고 또 마음을 다하여 희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까지 하느님의 거룩한 은총은 나를 굳세게 해주시어 나로 하여금 양심을 거슬러

 서약하는 것보다 기쁜 마음으로 재물과 토지와 생명마저 잃을 수 있게 해주셨다.

하느님께서는 또 국왕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그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주시어

 아직은 나에게서 자유만을 빼앗도록 하셨다.

이 자유를 나에게서 거두실 때 하느님께서는 이제까지 내 신앙을 북돋아 주시고자

그토록 허다하게 베풀어 주신 당신의 커다한 영적 은혜들 가운데서

내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 가장 큰 은혜라고 생각토록 해주셨다.

그래서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불신할 수없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국왕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나를 대하게 하시어 그가 나에게 아무 해를 입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의 죄 때문에 응당히 받아야 할것

이상으로 고통받게 하기를 원하신다면,

그분의 은총이 나로 하여금 인내의 마음으로 그리고 어쩌면 기쁜 마음으로까지

그것을 받아들일 힘을 주실 것이리라고 확신한다.

내가 고통을 잘 참아 낸다면 이것을 내 인내심의 공로를 훨씬 초월하는 주님의 쓰라린

수난의 공로와 결합시키시어,

내가 연옥에서 당할 고통을 줄여 주시고 천상에서 받을 상급을 늘려 주실 것이다.

 

마르가리따야, 내 비록 허약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느끼고 있지만, 절대로 하느님을 불신하지 않겠다.

나를 쓰러뜨릴 정도의 두려움을 내가 느끼어 되어도

 성 베드로에게 생긴 일을 기억하겠다.

돌풍이 일자 약한 믿음 때문에 물 속으로 빠져 들기 시작한 그가 그리스도를 부르면서

 도움을 간구한 것처럼 나도 그를 본받아 그리스도께 간구하겠다.

그때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손을 뻗치시어 폭풍에 휩싸인 이 바다에서 나를

붙들어 올리시어 물에 빠져 들지 않게 하시리라.

그런데 내가 베드로를 답습하여 나도 그처럼 유혹에 넘어져 주님을 모른다고 맹세하고 또 맹세하게 된다면,

(하느님의 자비는 내가 그런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해주시고 혹시라도 빠진다면

유익보다는 해가 되게 해주기를)

그때에도 베드로를 인자하게 굽어보신 것처럼 나도 연민에 찬 시선으로 굽어보시고

 다시 일으키시어 내 양심의 진실을 다시금 고백하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 내 잘못에 대한 수치와 마음의 괴로움을 느끼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여하튼 나는 이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마르가리따야,

하느님께서는 내 잘못이 아니라면 결코 버림받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을 허락치 않으실것이다.

나는 하느님께 내 희망을 걸고 내 전부를 그분께 맡기겠다.

그러나 내 잘못 때문에 버림받은 자 된다 해도 이것은 하느님의 정의와 찬미와 영광이 될 것이다.

마르가리따야, 하느님이 너그러우신 자비는 이 불쌍한 영혼을 구하시고 내가

그 자비를 찬미할 수 있게 해주시리라 굳게 믿으며 이를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내 사랑하는 딸아, 이 세상에서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걱정하지 말아라.

하느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그 어떠한 일도 생길 수 없다.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겉보기에 그것이 나쁜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참으로 가장 좋은 것이 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가톨릭굿뉴스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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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률학자이자 판사이던

 요한 모어(Joannes More)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 모어는 12세 때에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인

 요한 모턴의 조수생활을 하다가 옥스퍼드로 가서

 링컨 법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1501년 법조계에 진출했다.

1504년에 그는 영국 의회에 진출했으며 카르투지오 회원이 되려는 꿈을 포기하고

 1505년에 제인 콜트(Jane Colt)와 결혼하였다.

   그들의 집은 영국의 문예부흥 및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 이유는 당대의 석학들과 지성인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였기 때문이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기지는 만인의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영국 인본주의자들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최고 석학이었다.

그는 시, 역사를 비롯하여 프로테스탄트를 반대하는 논문,

신심 서적과 기도문 등을 저술했고 고전 번역 작업도 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유토피아”(1515-1516년)는 이성이 지배하는

 이상적인 국가상을 묘사한 것으로 세계의 고전이 되었다.

 또 “루터를 배격하는 헨리의 변명”(1523년)은 그가 가르쳤던

 헨리 8세에 대한 강력한 옹호가 담긴 서적이다.

   1510년 그는 런던의 주 장관대리가 되었고,

1511년에는 아내와 사별한 뒤에 과부이던

 엘리스 미들턴(Alice Middleton)과 재혼하였다.

 헨리가 그의 형 아서(Arthur)의 사망으로 왕으로 등극하면서부터

그는 프랑스와 플랑드르(Flandre)의 외교사절로 활약했고,

 1517년에는 추밀원에 진출했으며, 1521년에는 기사작위를 받았다.

 또한 그는 1523년에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529년에는 월시(Walsh) 추기경 후임으로 재상이 되었다.

 모어는 이때 왕의 이혼에 대하여

강력한 어조로 반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상으로 기용된 것이었다.

   그 후 그는 헨리 8세 왕의 이혼 문제에 침묵을 지킴으로써

 왕의 혼란을 가중시킴과 아울러 분노케 하다가,

 헨리 8세가 카타리나(Catharina of Aragun) 왕비와의 이혼 허가를

 교황청에 제출하는 서류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을 때

 국왕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또 교회를 반격하는 일련의 서류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한 후

 모어는 재상직을 사임하고, 1532년에 첼시(Chelsea)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또한 그는 헨리 8세가 카타리나의 시녀였던

 앤 불린(Anne Boleyn)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에게

 후계 지위를 양도한다는 소위 왕위 계승 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왕에게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534년에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고,

15개월 동안 옥중 생활을 하는 중에도

 영국 교회에 대한 왕의 수장령에 서명할 것을 요청하

는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에게 침묵권을 행사하며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 이 일로부터 꼭 5일 째 되는 날인 7월 6일,

 마침내 그는 참수형을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국왕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으나

 먼저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던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1935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법률가의 수호자로서 공경을 받는다.
 
 참고자료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392-397쪽. 
  성 토마스 모어 저, 성찬성 역, 고난을 이기는 위안의 대화, 서울(가톨릭출판사), 2007년. 
  제임스 몬티 저, 성찬성 역, 성 토마스 모어, 서울(가톨릭출판사), 2006년. 
  페르디난트 홀뵉 저, 이숙희 역, 성체의 삶을 위한 성체와 성인들 - '요한 피셔 성인과 토마스 모어 성인',

 서울(성요셉출판사), 2000년, 195-209쪽.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4권 - '모어, 토마스',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7년, 2700-2702쪽. 
  한스큉 저, 장익 역, 세속 안에서의 자유 - 토마스 모어, 왜관(분도출판사), 1989년.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토마스 모어 순교자', 서울(성바오로), 2002년, 150-151쪽. 
(가톨릭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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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함


‘사계절의 사나이’로 불리는

 성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 때 대법관이자 법률가, 신학자, 철학자, 작가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지위나 재능보다도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으로 더 높이 평가되고 있다.

헨리 8세는 토마스 모어가 두 번째 아내 앤 불린의 딸(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적법한 왕위 계승자임을

공표하는 법령에 서명하기를 거절하자 그를 옥에 가두었고, 설득에 실패하자 결국은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가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어 영국 교회를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시켜는 의도가

그 서류에 담겨 있음을 간파했다.

그는 자신이 그 서류에 서명하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나는 왕의 좋은 신하로 죽지만 그보다 먼저 하느님의 착한 종이다.”

 

그는 법률가였고 정치인이었으므로 법에서 빠져 나갈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양심에 걸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날마다 강도와 불륜, 사기 사건으로 가득 찬 신문을 읽는다.

어떤 때는 도대체 이 세상에서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일이 의미가 있는가 하고 의심하기도 한다.

토마스 모어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 주는 성인이다.

나 자신뿐 아니라 남에게도 정직한가?

타협의 기준은 외부의 압력이 아니라 나의 양심이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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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6월22일
놀라의 성 바울리노 주교
ST. PAULINUS of Nola
St. Paulinus a Nola, E

San Paolino di Nola Vescovo
Born:c.354 at Burdigala, Gaul (Bordeaux, France)
Died:22 June 431 of natural causes
Canonized:Pre-Congregation
Paolino = piccolo di statura, dal lat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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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닐곱 명의 성인들의 편지에서 칭찬을 받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의심할 나위 없이 뛰어난 성품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으로 파울리노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예로니모, 멜라니아, 마르티노, 그레고리오 그리고 암브로시오와 편지를 주고 받았다.

 

보르도 근처에서 태어난 그는 골 지방과 이탈리아에서 엄청난 부자로 손꼽히던 골 지방 로마 총독의 아들이었다.

파울리노는 뛰어난 법률가가 되엇으며 로마 제국에서 몇 가지 공직을 맡았다.

그는 스페인 여인인 아내 데레시아와 함께 젊은 나이에 은퇴하여 문화적인 여가 생활을 즐겼다.

그들 부부는 덕망있는 보르도의 주교에게서 세례를 받고 스페인에 있는 데레시아의 큰 저택으로 이사했다.

 

여러 해 동안 아이가 없던 그들에게 아이가 생겼지만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죽고 말았다.

이 사건은 그들이 엄격한 생활을 시작하고 애덕을 실천하며

스페인에 있는 재산을 거의 다 나누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뛰어난 모범의 결과이겠지만 파울리노는

성탄날에 바르셀로나의 주교에게서 예기치 않던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뒤 그는 아내와 함께 나폴리 근처의 놀라로 갔다.

 

그는 놀라의 펠릭스 성인(축일:1월14일)을 무척 존경했고

이 성인에 대한 신심을 진작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친척들이 모두 당황해할 만큼 자기의 남은 재산을 거의 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을 위한 일을 계속했다.

빚을 많이 진 사람과 방랑자, 그 밖에는 여러 궁핍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그는 자기 집의 한쪽 구석에서 수도 생활을 하는 것처럼 살았다.

그는 주민들의 요청으로 놀라의 주교가 되어 21년 동안 그 교구를 이끌어 갔다.


놀라시가 훈족의 침략을 받자 그는 슬픔에 젖어 말년을 보냈다.

그의 얼마 안되는 작품 가운데에 초기의 그리스도교 혼인 축가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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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초기에 힘을 발산해 버리고 일찌감치 은퇴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업에 대한 헌신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서 성취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파울리노의 인생은 그가 스페인의 자기 소유지에서 편안히 쉬면서

자기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시작된 것이었다.

인간은 시도하고 하느님은 마련하신다.

 

한 사람의 목격자가 파울리노의 마지막 날을 기록했다.
그가 죽기 3일 전에 한 사제가 와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40은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누군가가 그 가난한 사람의 빚을 갚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심부름꾼이 50은전의 선물을 가져왔다.

마지막 날 저녁 기도를 바치기 위해 불을 켜놓고 있을 때

그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팔을 뻗으면서 말했다.
"나는 나의 그리스도를 위해 등불을 마련했습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 학자 축일:8월28일.게시판1336번.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축일:12월7일.게시판1509번.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축일:9월30일.게시판1394번.

*성 콘스탄티누스 대제 축일:5월21일.게시판1773번.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축일:11월11일.게시판1463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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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년, 콘스탄티노 대제가 자신도 그리스도교에 개종하는 동시에 유명한 밀라노의 칙령으로써

종교에 신앙의 자유를 준 다음부터는 국민도 서로 다투어가며 세례를 받는 등 교회는 한때 융성해졌다.

그러나 이것은 양적(量的)으로 하는 말이고, 질적(質的)으로는 유감스러운 점이 없는 신자도 적지 않았다.

그 이유는 진실한 마음에서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유행을 따른다는 경솔한 마음에서

별로 교리 공부도 하지않고 입교한 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 중에도 그러한 폐풍은 상류 인사층에 더욱 극심해 지금 말하려고 하는

성 본시오 메로비오 바울리노의 양친도 그 중의 하나였다.

즉 신분이 원로원 의원이고 귀족이었던 어버지나 어머니는 명칭이 신자이지

그 일상 생활에는 이교도나 다름없는 생활이 엿보였던 것이다.

 

성 바울리노는 353년 프랑스의 부르도에서 태어났다.

양친이 지금 말한 것과 같이 종교에 냉정한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아들도 그리스도교적인 좋은 감화를 받을 리가 없었다.

 

첫째 그는 세례조차 받지 못했다.

그리고 다만 세속적인 출세만을 목적으로 당시 대학자이며 대시인으로 평판이 높았던

 오소니오의 지도를 받아가며 열심히 고웁했다.

본래 그는 재주가 많았음인지 학업 성적은 가장 우수해

겨우 25세의 청년으로서 일찍이 갈리아(지금의 프랑스)의 집정관으로 임명되었다.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던 그는 경치 좋은 이탈리아의 캄파니아에서 살면서

같은 재산가이며 신앙이 두터운 테레시아라는 스페인 귀부인과 결혼했다.

그때 그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신앙의 눈을 떴다.

 

그는 신심이 깊은 아내의 감화로써 열심히 준비해 이때까지 받지 않고 있었던 세례를

고향 보르도의 주교 델피노에게서 받았다.

그때 그는 당시의 위대한 성인 트리의 주교 마르티노도 만나보고

그의 기도로 인해 눈병이 치유되는 은총을 받기도 했다.

 

바울리노는 열심히 신앙을 보존하고

세례때 약속한 대로 마귀와 그의 모든 행실과 모든 영화를 끊어 버리려고 애썼다.

그리하여 친척 일가의 놀람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진하여 집정관의 영직을 내던지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가서 재산의 대부분을 자선 사업에 기부하고 사랑하는 처자와 같이

검소한 생홣로 들어가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였다.

이런 그의 대변화를 들은 은사 오소니오는 대단히 놀라며 몇 번이나 서간이나 말로써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활발히 활동할 것을 권했으나 바울리노는 그 호의에는 감사하면서도

악마의 유혹이 많은 세속의 높은 지위에 취임할 의사는 추호도 없었다.

특히 귀한 외아들을 어려서 잃은 후에는 아내와 서로 의논하여 남매와 같이 지내며 정결한 생활을 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이전의 대부호는 가난하게 살면서

향락 대신에 자선 사업을 하며 매일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를 도모했다.

그러므로 바르셀로나 신자들은 누구나 바울리노의 덕행에 감동하지 않은 이 없어 자꾸만

사제가 될 것을 권했으므로 그도 그 간청에 못이겨 마침내 393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신품 성사를 받게 되었다.

 

성직자가 되었어도 바울리노의 수도 생활은 결코 허술해지지 않았다.

그는 더욱 수양을 하려고 신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르셀로나를 떠나 이탈리아의 놀라시에 가서

자기가 특별히 존경하는 순교자 펠릭스의 묘지 근처에서 살며 호로 세상을 멀리하고 기도와 고행에 전심했다.

바울리노가 그 성인을 공경하게 된 이유는 전에 그가 무서운 형제 살해의 혐의를 받았을때

펠릭스의 전구를 구해 다행히 그 혐의를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울리노의 감탄할 만한 일상 생활이 어느덧 세상에 알려지자 수도 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은

점차 그의 덕을 사모하여 모여와 그의 지도를 받으며 공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뿐아니라 409년 놀라 시의 주교가 서거하자

신자 일동은 충심으로 바울리노에게 그 후임이 되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는 그곳에 피할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알고 취임을 승낙했다.

그의 겸손, 예지, 박애(博愛)는 주교좌라는 높은 촛대위에 놓이게 되자 한층 더 찬란히 세상을 비추게 되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같은 시대의 사람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성 예로니모 등

쟁쟁한 교부들도 그와 서면으로 연락하는 것을 큰 자랑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유럽에 민족 이동이 일어났을 때 놀라 시에도 처음에는 고트족, 나중에는 반달족이 침입해 마음대로 약탈했다.

그럴 때에 바울리노 주교는 그들의 독수에 걸려 고생하는 이나 노예로 된 불쌍한 이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 지 모른다. 어느 전승에 의하면, 한 노예를 풀어 줄 대금이 부족했을 때에

그는 자기가 대신 노예가 되어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해 주려고 까지 했다고 한다.

놀라시가 야만족 침입의 재앙에서 모면하게 된 것은 오로지 주교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울리노는 놀라의 주교로 20여년간 알뜰히 그 임무를 완수하고, 431년 6월 22일, 성덕의 상을 얻으러

영원한 환희로 들어갔으며 그의 이름은 지금도 성인 명부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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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의 성 바울리노 주교의 편지에서

(Epist. 3ad Alypium, 1. 5.6: CSEL 29, 13-14. 17-18)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모든 종들 안에 당신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참으로 거룩하고 복되며 지극히 사랑하는 주교님,

귀하는 보잘것 없는 나에게 진실하고도 완전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카르타고에서 돌아온 우리 조카 줄리앙을 통하여 귀하의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그 편지는 귀하의 탁월한 덕행을 잘 드러내 주어,

내가 귀하의 사랑을 처음으로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사랑은 틀림없이 세상 시초부터 우리를 예정하신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는 그분 안에 있었습니다.

미래에 성취해야 할 모든 것도 그분이 지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선견과 권능으로

우리는 동일한 의지와 신앙의 일치 또는 일치의 신앙을 갖도록 형성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연결되고 영의 계시를 통하여 마주 보기 전에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 어디서나 유일한 분이신 주님께서 모든 이에게 부어주신 성령으로 당신의 모든 종들 안에서

당신 사랑을 역사하시는 데 대해 우리는 주님께 감사 드리고 찬미 드립니다.

이렇게 하시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넘치는 강물로부터 당신 도성을 기쁘게 하셨고

이 도성의 시민들 위에 "당신 백성의 으뜸으로" 귀하를 선택하시어 주교좌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구부러진 나를 바로 세우시고

미천한 나를 땅에서 끌어올리시어 귀하과 같은 지위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하느님께 감사 드려야 하는 것은 그분이 귀하의 마음에다 내가 들어갈 자리를 마련하시고

귀하와 밀접히 일치시켜 귀하가 나에 대해 지닌 그 사랑의 확신을 느끼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귀하가 베풀어 준 배려와 호의를 볼 때

나로서는 귀하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는 데 주저하거나 게을리할 수 없습니다.

귀하가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도록 내 사정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나는 전에 불쌍한 죄인이었고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서 해방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생명의 공기를 호흡하기 시작하고 쟁기를 잡고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귀하는 기도로써 도와주시기를 청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어 내 짐을 가볍게 해주신다면 귀하의 공로에 상급을 더할 것입니다.

고통중에 있는 이를- 나는 감히 귀하의 형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도와 주는 거룩한 사람은

"큰 도성처럼 드높여질 것입니다."

 

나뉨이 없으신 삼위 일체의 일치와 우리 간의 일치의 표시로 귀하에게 빵 한 개를 보내 드립니다.

귀하가 그것을 드신다면 그 빵은 "에울로기아"(축성된 빵) 가 될 것입니다.

(가톨릭굿뉴스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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