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

1866년 병인박해(1)로 12명의 프랑스에서 온 선교사 중 9명이 순교하고 살아남은 3명도 조선 포교지를 떠나 조선은 성직자가 없는 공백기를 맞이했다.
박해에서 살아남은 교우들은 뿔뿔이 산간벽지로 피신하여 생명을 유지할 수 밖에없었다.

그러다가 1876년 블랑, 드게트 신부가 입국했고, 다음해에는 두세, 로베르 신부와 함께 뮈델 주교가 입국하였다. 뮈델 주교는 1878년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뒤, 중국으로 추방되었지만,
다른 4명의 선교사는 산간벽지를 피해 다니며 흩어진 교우를 모아,
10여년 동안 목자없이 간신히 생명을 유지해온 조선 교회는 선교사들의 숨은 활동으로 서서히 복구되어 가기 시작했다.
더욱이 조선이 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선교사의 전교활동이 이전보다 나아지게 되었다.

물론 유생들의 천주교 배척과 외교인들의 따가운 시선과 공공연한 박해가 사라지지 않은 가운데 경남 일대에 흩어져 있던 교우들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여, 점차 교우 수가 증가했다.
다만 1883년에서 1886년간 로베르 신부의 교세보고 속에 경상도의 교우수는 700~ 900여명 정도였고, 부산 및 동래는 포교지역으로 올라가 있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동래지역의 교우는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1887년 5월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한불수호통상조약이 비준됨으로써, 프랑스 선교사들은
국내여행을 보다 쉽게 할 수 있었고, 조선정부로부터 공식적인 박해는 면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영남지역을 담당하던 로베르 신부 역시 보다 많은 공소에서 성사 집전을 수행하게 되었고, 1890년에는 영남지역이 분할 독립되는 동시에 부산본당이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부산지역에 본당이 설립된 것은 1890년 절영도 본당이 최초로.
절영도 본당은 얼마 지나지 않은 1891년 초량으로 옮겨 초량본당이 되었다.
초량본당은 1916년 범일동으로 이전되어 '부산진본당'이 되었다.(이하 부산본당)

부산지역 초대신부는 죠조 신부였다.
죠조 신부가 담당하고 있던 지역은 경남 전체와 경북의 동남부 일대로, 이곳에는 공소가 35개 였다. 편견과 박해속에서도 그가 교회의 발전에 노력한 결과 1893년에는 교우 수 1492명,
성인 영세자 136명, 공소가 35개 였다. 1883년에서 1886년 간 경상도의 교우수는 700~900여명 정도였음을 상기하면, 10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기간동안 부산본당의 교우 수가 1300~1400명에 달한 것은 놀랄만한 신장세이다.
이것은 한불통상조약에서 규정한 내지 여행과 선교자유가 커다란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죠조 신부의 보고서에 부산에서는 전교가 진전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어서, 당시 부산에는 교우 수가 적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죠조 신부의 후임으로 우도 신부가 1893년 5월말 경 동래에 도착하였다.


(1) 병인박해 : 1866년(고종3년)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정권에 의해 벌어진 대규모 천주교 탄압을 말하며,
                  병인사옥이라고도 하며, 1872년까지 6년간 진행된 탄압으로 당시 8천여 명 이상의 평신도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의 선교사 등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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