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옵니다.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율법대로라면 돌을 던져 죽여야 하는데, 예수님의 생각은 어떠한 지 묻습니다. 바리사이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였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다시는 죄짓지 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죄와 율법, 구체적인 한 죄인에 대한 태도 등 여러 관점과 태도들이 얽혀 있습니다.

먼저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단순히 율법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을 죽이지 말라고 한다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이 여인을 죽이라고 한다면 그동안 예수님이 보여준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가 거짓이 되어 버립니다. 바리사이 사람들이 이 여인을 끌고 온 진짜 이유는 율법을 어긴 이 여인을 벌하고, 이 여인의 비윤리적 행위를 단죄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의 진짜 의도는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욕망을 단죄함으로써 자신들의 숨겨진 의도와 욕망을 채우고자 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좀 더 성찰해 봐야 할 점은, 바리사이들의 이러한 숨겨진 의도는 우리들의 마음 안에서도 그리고 우리들의 사회와 역사 안에서도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수많은 사람을 학살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과 소수 민족, 동성애자, 집시들에 대한 사회적인 혐오를 조장하였고, 그들을 학살했습니다. 특정한 이웃을 지나치게 미워하거나, 이웃을 배제시키고자 하거나, 이웃을 지나치게 모욕하고 혐오하는 마음 속에는 자기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마음이 숨어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우리 자신들은 바리사이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의 숨은 욕망은 우리의 숨겨진 욕망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맞서, 예수님께서는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웃에 대한 미움과 혐오의 마음이 우리에게 없는지 우리 자신과 대면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이웃에 대해 쉽게 판단하고 단죄할 수 있는 존재인지 우리 스스로에게 묻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이 많은 사람부터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하듯이,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웃을 손쉽게 판단하고 단죄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죄 지은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이 여인에 대한 태도가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지닌 마음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죄를 단죄하거나 이 여인의 죄의 크기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인의 미래를 신뢰해주시고, 새로운 삶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이웃을 미워하고 혐오하는 마음 속에는 우리 자신의 더 큰 욕망이 숨어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실상 이웃을 단죄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우리가 이웃을 단죄하지 않을 때, 주님 역시 우리를 단죄하지 않고 우리의 새로운 미래를 믿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용서와 화해,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우리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주님의 마지막 일주일

예수님의 일생은 기껏해야 30년 남짓 됩니다. 그러나 그 30여년 세월의 대부분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활동하신 1년 남짓, 요한복음에 의하면 길어야 3년 남짓한 기간에 있었던 일 뿐입니다. 더구나 네 복음서 모두 예수님의 죽음 직전의 2-3일의 일들을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실상 복음서가 우리에게 가장 전하고 싶었던 내용은 바로 이 2-3일에 일어난 일들이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증언들이며, 오늘부터 우리가 그 여정을 따라 걷게 될 첫번째 성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가장 큰 축제인 파스카 축제에 맞추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탈출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이 축제는 일주일 동안 진행되는데, 맨 마지막 토요일 안식일을 마치면 끝납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에 파스카 식사를 합니다. 이 식사 때에 이집트 노예생활과 광야 생활을 되새기며 누룩없는 빵과 쓴 나물을 먹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목요일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식사를 합니다. 이 식사 중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지는 새로운 계약이며, 이 파스카 식사가 바로 당신의 죽음을 기억하고 부활을 준비하는 식사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첫번째 성목요일의 주님의 만찬을 우리는 성목요일 밤 주님 만찬 미사로 재현합니다.

파스카 식사가 끝난 후 예수님은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시는 중에 유다 최고의회의 병사들에게 체포되십니다. 최고의회로 끌려가서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판결을 받았지만, 유다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금요일 새벽에 로마 총독에게 예수님을 끌고 갑니다. 예수님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자처했다는 정치범으로 몰려 십자가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파스카 축제를 위한 어린양을 잡는 시간인 오후 세시에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우리는 성금요일 오후 세시에 주님을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을 것이고, 성금요일 저녁에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수난예식을 거행합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 당일인 토요일은 안식일이기에 아무도 무덤을 찾아가지 못합니다. 토요일이 끝난 후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해서 사도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지만 예수님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그날부터 예수님께서는 여인들과 사도들에게 계속해서 나타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생명으로 부활하셨음을 보여주시고, 사도들에게 이 사실을 세상에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토요일밤 우리는 주님부활 파스카 성야미사를 봉헌합니다. 유다인들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첫번째 파스카,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신 두번째 파스카를 기억하며, 우리 역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갈 우리들의 파스카를 기도할 것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죽음을 눈 앞에 둔 주님의 마지막 일주일의 여정을 함께 걸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명의 절정의 여정이 오늘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에 동반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느끼고, 예수님께서 남겨주신 성체성사와 부활의 신앙을 다시 새롭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여정의 시작,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심을 묵상하며, 오늘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네 복음서 모두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실상 복음서들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과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나 최후 만찬은 예수님께서 체포되기 직전에 제자들과의 마지막 시간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최후 만찬이야말로 예수님 삶과 사명의 핵심이자 종합이며,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유산이자 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 2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을 통해 당신 죽음의 의미를 분명히 밝혀 주십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최후 만찬의 의미, 다시 말해서 당신이 우리에게 남겨 주신 성체성사의 의미를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헌신과 봉사의 모습으로 보여주십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말씀, 최후 만찬 때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제2독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어서 당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시고, 포도주 잔을 들어 당신 죽음의 피라고, 그리고 최후의 만찬이 바로 당신 피로 맺는 새 계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단어는 바로 계약입니다. 사실 성경의 이름도 계약의 책입니다. 구약은 옛 계약을 뜻하고, 신약은 새 계약을 뜻합니다. 계약은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의 관계를 드러내 주는 단어입니다. 이 계약은 탈출기 24장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과 모세 사이에 이루어진 계약입니다. 그리고 이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서 소를 잡아서 하느님께 바치고, 그 피의 절반은 제단에 뿌리고 나머지 절반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백성에게 뿌립니다. 이 계약을 통해,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돌보아 주시는 주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야훼를 섬기는 하느님 백성이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계약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을 배반하여 우상을 섬기기도 했고, 하느님 보다는 세속의 기회를 쫓아 살았습니다. 실상 인간의 죄 때문에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은 파기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끝까지 계약에 충실한 분이시고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하느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고 새로운 계약을 맺도록 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계약의 제물이 되고 계약의 증거가 되고자 했습니다. 소를 잡아 그 피를 제단과 백성에게 뿌리듯이, 예수님 스스로 당신 피를 하느님의 제단에 그리고 백성에게 나누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최후 만찬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시어 하느님 백성이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고, 당신의 피를 쏟아서 하느님과 백성이 새로운 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 최후의 만찬을 영원히 거행하여,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화해와 결합을 잊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과 백성이 맺는 새로운 계약이며, 그 계약을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 영원히 기억하고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 직전의 예수님이 우리에게 남겨 주신 유산이며 유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유산과 유언을 매일 매일 미사 안에서 행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 만찬 미사의 의미와 정신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밤 우리는 당신의 몸과 피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생명을 주시는 첫번째 성 목요일 밤의 만찬 속으로 들어갑니다. 오늘 우리가 거행하는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는 첫번째 성 목요일 밤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실 때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합니다. 오늘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하느님의 어린양

요한 복음에서는 여러 차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릅니다. 요한 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하고 소개합니다. 이 말 자체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린양희생양을 의미합니다. 희생양이란 공동체가 어떤 위기 상황을 맞이했을 때, 책임을 대신 지는 사람이나 대상을 뜻합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희생양은 공동체 전제의 집단적인 회개와 속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 1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속죄의 날에 염소 두 마리를 잡아 한 마리는 속죄제물로 바치고 다른 한 마리는 공동체의 죄를 뒤집어 씌워서 광야로 내쫓았습니다. 반대로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은 유대인과 동성애자를 박해함으로써 자신들의 전쟁과 민족적 우월성을 정당화하고자 했고, 일제 제국주의는 관동대지진의 책임을 조선인들에게 몰아서 자신들의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희생양은 공동체가 소수의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가 되더라도, 인간 내면에는 소수의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하고 존속하고자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요한 복음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부른 이유는 예수님이 바로 희생양과 같은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수난기에서도 대사제 카야파의 말이 언급됩니다. 카야파는 유다인들에게 백성을 위해서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충고했습니다. 백성 전체를 위해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희생양의 죽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어린양파스카 어린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탈출하기 전, 죽음의 재앙이 이집트 전역을 덮칩니다. 죽음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은 흠 없는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자기집 문설주에 바릅니다. 어린양의 죽음,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고,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약속의 땅으로 건너가게 합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파스카 축제 때 속죄제물로 바치는 어린양을 잡는 시간에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십니다.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할 파스카 어린양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이 말은 첫째로 예수님은 희생양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모두의 죄 때문에, 모두의 죄를 뒤집어쓰고, 모두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하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희생양이십니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모두의 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파스카의 어린양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기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죽음입니다. 예수님 죽음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대속의 죽음이요, 우리의 생명을 위한 죽음, 우리를 위한 죽음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죽음을 함께 묵상하며,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식을 정성껏 봉헌합시다.


우리 삶의 파스카

탈출기 12장을 보면,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에 대한 규정이 나옵니다. 유다인들은 봄이 시작되는 때에 맞춰 새해를 시작하고, 새해 첫 달을 닛산 달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닛산 달의 열 나흘째에 파스카 축제를 시작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달력으로 계산하면, 닛산 달은 춘분에 시작합니다. 춘분이 지나고 첫 보름이 되면 파스카 축제가 시작됩니다. 올해 춘분이 3 20일이었고, 춘분이 지나고 첫 보름이 바로 지난 주 토요일 4 12, 음력으로 3 15일입니다. 바로 우리가 지난 토요일 밤부터 보낸 한주간, 성주간이 바로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 기간입니다.

파스카라는 말은 원래 건너가다, 넘어가다는 뜻입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탈출한 사건에서 유래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노예살이에서 약속의 땅으로 건너가게 해 주신 사건,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 넘어간 사건을 기념하고 재현하는 것이 바로 이 축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느님이 이집트에 죽음의 재앙을 내리셨을 때,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명에 따라서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자기 집 문설주에 발라, 죽음의 재앙이 자신들을 건너가고 넘어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영도로 이집트를 탈출하고, 어린양의 피로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건너갔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파스카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파스카 축제 기간에 맞추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축제 기간 내 목요일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셨습니다. 이 만찬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이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도록 했던 어린양의 죽음과도 같은 것임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더불어 당신 백성 역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갈 것임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파스카 기간의 금요일, 성전에서 어린양을 죽여 봉헌하는 그 시간, 오후 3시에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죽음을 넘어 하느님의 생명으로 넘어가도록 스스로 피를 쏟으신 파스카 어린양이시며, 당신 스스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께로 건너가신 파스카 자체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두번째 파스카입니다.

오늘밤 우리는 죽음의 재앙이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건너갔던 그 밤, 주님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던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빛의 예식을 통해서 어둠에서 빛으로 건너갑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들으며 그 밤 속으로 들어갑니다. 하느님이 우주 만물과 사람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하느님이 어떻게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는지, 하느님이 어떻게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고 당신 백성을 돌보시는지, 그리고 하느님이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영을 당신의 영으로 채워주시는지 읽었습니다. 오늘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들으면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갑니다. 하여 오늘밤은 세번째 파스카의 밤, 우리들의 파스카입니다.

오늘밤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우리의 삶이 이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넘어서 희망과 생명으로 건너갑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 안에 부활이 숨어 있었듯이, 우리의 고통과 슬픔 속에 우리의 부활이 숨어있음을 믿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오늘에 절망하지 않고 미래를 희망합니다. 바로 오늘밤에 우리의 삶이 주님의 평화로, 하느님의 생명으로 건너갑니다. 오늘밤이야말로 우리들의 파스카 입니다.


마리아 말하여라 무엇을 보았는지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 전날, 다시 말해, 금요일에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다행히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라는 사람에 의해 예수님은 무덤에 묻힐 수 있었습니다. 토요일, 유다인들의 축제이자 안식일에는 율법에 의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둠이 다 걷히지 않은 시간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의 무덤을 찾습니다. 그리고 무덤이 비어 있음을 깨닫고 베드로와 요한 사도에게 알립니다. 사도들이 주님의 무덤이 비어 있음을 확인했지만 주님의 부활을 온전히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다음 구절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맨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그리고 사도들에게 여러 차례 나타나십니다. 주님을 보고서야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온전히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 부활의 첫 증인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리아가 부활의 첫 증인 될 수 있었는지, 도대체 그녀가 보고 느끼며 깨닫게 된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 생깁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부속가>에서도 말합니다. “마리아 말하여라 무엇을 보았는지.” 오늘 마리아 막달레나의 시선으로 우리도 주님의 빈 무덤 속으로 들어가 보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른 아침 주님의 무덤을 찾아옵니다. 안식일 율법이 해제되는 가장 빠른 시간에 마리아는 주님의 무덤을 찾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무덤을 찾아와 무덤 곁에 머물면서 주님의 고통과 죽음에 동참합니다. 주님의 고통과 죽음의 가장 밑바닥까지 동참했던 이 여인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가장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이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과 죽음을 체험한 이에게 부활은 현실이 됩니다. 자기 인생의 무덤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본 이들에게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통에 참여할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우리의 고통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부활을 체험하게 됩니다.

둘째로, 오늘 복음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하고 전합니다.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가고 무덤을 지키며 무덤을 대면할 수 있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참으로 우리 각자의 무덤을 찾아가고 그 무덤 끝까지 들어가며, 자기 무덤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무덤의 돌이 치워져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내 인생을 가로막던 돌, 나를 억압하던 돌, 나를 무덤에서 나오지 못하게 막았던 그 돌을 치워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용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을 찾아간 시간은 이른 아침, 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러하고 제자들 역시 주님의 부활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부활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고, 우리 인생의 참다운 의미도 온전히 깨달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온전히 날이 밝으면, 온전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면, 주님의 부활도 우리 인생의 의미도 온전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상처 앞에 머무르며 우리의 상처와 아픔을 새롭게 이해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머무르시게 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부활로 우리 역시 우리 상처와 아픔을 딛고 우리의 무덤을 열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비추어 주시고 용기를 주시기를 함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물

오늘은 원래 부활 제2주일이지만, 우리 교구 모든 본당에서는 교황님의 추모 미사로 봉헌합니다.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삶과 가르침을 묵상하고 또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성경 구절이 있었습니다. 마침 지난 주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독서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다가, 태어날 때부터 불구자인 사람을 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가 말합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이 말을 마치고 베드로 사도가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가 벌떡 일어나게 되었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하느님을 찬양하며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사도행전의 이 구절과 관련하여 교회 안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중세에 가톨릭 교회가 승리와 번영을 누리고 있을 때, 어느 교황님이 자신의 고백 신부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불구자를 일으키는데, 왜 자신은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데도 불구자를 일으켜 세울 수 없는지를 물었습니다. 고백 신부가 대답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금도 은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 베드로의 후계자는 금도 있고 은도 있고 권력도 있지요.”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야말로 사도행전의 베드로 사도와 같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금과 은의 힘으로가 아니라, 오로지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신 분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분은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베드로 광장에 모여든 신자들에게 강복하기 전에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먼저 청했습니다. 그분은 이기고 설득하기 위해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정치 지도자와 만날 때도 정치적 역학관계를 고려하지 않았고, 어떤 종교 지도자들과 대화할 때도 종교적 교리를 놓고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을 대변했습니다.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우리가 지구의 모든 피조물과 형제자매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촉구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황님은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하고, 상처입은 모든 사람을 위한 야전병원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분의 겸손이야말로 참다운 권위였고, 그분의 듣는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외침이 되고, 그분의 가난이 우리를 풍요롭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프란치스코 교황을 좋아하고 지지한 것은 아닙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교황님은 미국 정부와 이태리 정부와 상당한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이민과 난민 문제 때문입니다. 교황님은 지속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배제하는 정부를 비판해 왔기 때문입니다. 교황님의 입장은 너무나 분명하게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2016년 우리나라에 오셨을 때, 계속 세월호 뺏지를 달고 계시자 옆의 누군가가 정치적인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뺏지를 빼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말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이렇게 교황님은 금과 은이나 또 다른 힘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시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관점에서 교회를 이끄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도 직무 역시 역사의 한페이지가 되었습니다.

교황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닙니다. 교황의 죽음 이후는 교회의 방향을 정하는 절차가 시작됩니다. “콘클라베라고 부르는 이 절차를 통해서, 새로운 교황이 선출됩니다. 새로 선출되는 교황 역시 개인이 아닙니다. 그를 통해서 교회가 세상 안에서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갈 것이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말할 것인지가 결정됩니다.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추모미사를 봉헌하며,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하느님의 크신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그리고 교회가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주님의 부활 대축일 이후의 미사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마리아 막달레나가 가장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다음으로 주님의 사도들이, 그리고 사도들이 주님을 만난 사실을 믿지 않았던 토마스도 그분을 만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티베리아스 호수가에서 일곱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일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 역시, 엠마로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고, 그 이후에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그들의 공통된 체험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된 체험을 묵상해보면, 우리 역시 그들과 비슷한 사건과 체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랬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그랬으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일곱명의 사도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들의 곁에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일상 한가운데로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쉽사리 깨닫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또는 어떤 느낌과 체험을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고, 내 삶에 동반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 내 일상 가운데 나와 함께 계셨음을 깨닫게 되면, 예수님께서 나의 인생을 더 풍요롭고 가치있게 변화시켜 주셨다는 것 역시 깨닫게 됩니다. 내가 넘어졌을 때 일으켜 주셨고, 내가 슬플 때 위로해 주셨으며, 내 삶이 헝틀어졌을 때 나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나중에서야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어부였던 제자들이 더 많은 물고기를 잡도록, 그리고 새로운 삶의 길을 시작하도록 해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들의 일상 안에서 우리의 삶이 더욱 풍요롭고 새로워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두번째로, 제자들이 가장 뚜렷하게 예수님을 알아본 때는 바로 빵을 나눌 때였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도 그랬고,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은 아침 식사를 할 때 가장 뚜렷하게 예수님을 만납니다. 제자들은 빵을 떼어 나누면서, 성목요일 밤 빵을 나누어 주시던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제자들의 이 만남과 체험은 성체성사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깨닫게 해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성체성사 안에 가장 뚜렷하게 현존해 계십니다. 그렇다면,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그리고 어떤 노력으로 성체성사에 임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복음을 보면 식사를 마치신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나를 사랑하는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리고나서 나를 따라라하고 명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을 만난 제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로 초대하시고, 새로운 사명으로 불러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으로 우리를 불러 주시고,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사명으로 우리를 불러 주십니다.

우리가 알아보든 알아보지 못하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일상 안에서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인생 여정에 동반하시고 우리의 길을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망설이지 말고 믿어야 합니다.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가치 있게 만들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더욱 기쁜 마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따라 나설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로마 시간으로 지난 수요일 오후에 새로운 교황님이 선출되었습니다. 교황님은 로마와 전 세계에 보내는 첫 강복에 앞서 하신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다리가 되었듯이,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고 주님의 교회는 인간과 인간을 잇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전임 교황님의 말씀 그리스도인은 벽을 쌓으면 안되고 다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에 대한 응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큰 기쁨으로 새로운 최고 목자의 탄생을 지켜보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이 인간적으로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새 교황을 뽑는 추기경 회의 콘클라베는 후보 없이 추기경 2/3의 표를 모아 나가는 과정입니다. 후보로 나서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자기 앞에 거대한 사명의 파도가 자신을 압도할 때, 그가 한 개별 인간으로서 느끼는 무게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운명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운명. 그리스도교는 이 운명과도 같은 일을 부르심이라고 부릅니다. 바로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아주 특별한 부르심입니다. 피하거나 도망가기 힘든 부르심, 거역할 수 없는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를 거룩한 부르심, “성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보통 성소라고 말할 때, 하느님께서 사제와 수도자의 삶으로 불러 주시는 것을 성소라고 말합니다. 전 세계 교회는 오늘 부활 제4주일을 성소주일로 지냅니다. 성소주일에 교회는 더 많은 젊은이들이 사제와 수도자로 하느님의 불림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우리가 성소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한 인간을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으로 불러주신 것과 같은 아주 특별한 성소도 있지만, 하느님은 우리 삶의 일상 가운데에서 우리를 부르신다는 점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결단과 결정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의한 일이 많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결단과 결정의 배후에 있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고, 우리의 다양한 삶의 방식, 사제로서의 삶, 수도자로서의 삶, 그리고 혼인의 삶 역시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르심에는 하느님의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신앙을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열어놓아야 합니다.

하나 더 우리가 묵상해야 할 것은, 부르심 또는 성소라는 말은 자신의 일과 직업에도 연관되어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 역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이고, 우리가 하는 일 역시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일과 직업이 먹고 살기 위해서 또 돈 벌기 위해서 하는 부분도 있지만,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일이 어떻게 하느님의 일을 이루는데 협력하는지 우리가 함께 묵상해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삶, 우리의 신앙, 우리 삶의 방식, 우리가 하는 일 모두의 근원에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실상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불리워졌고, 우리 삶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 삶의 근원에 있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오늘 성소주일에, 내 삶의 근원에서 울려 퍼지는 주님의 목소리, 주님의 부르심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Board Pagination Prev 1 ... 3 4 5 6 7 8 Nex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