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과 회개

오늘은 대림 제2주일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대림 시기에 우리 삶의 과제에 대해서 함께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두 개의 과제가 놓여있습니다. 첫째는 생존의 과제입니다. 먹고 살아야 하는 과제입니다. 둘째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의 과제입니다.

먼저 생존의 과제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사실 우리가 하는 거의 모든 일은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직장을 다니고 돈을 벌고, 자식을 낳고 가르치고 키우는 모든 것이 생존을 위한 일에 들어갑니다. 생존을 위해 우리는 더럽고 치사한 일도 온갖 수모도 견디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있어도 하는 수 없이 하는가 하면, 양심이나 인간적 도리 또는 체면을 일정 부분 포기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게 다 생존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존재는 생존만으로는 만족도 행복도 느끼지 못합니다. 뭔가 부족하다고 여깁니다. 실상 동물과 인간이 다른 점이 바로 이점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삶의 또다른 과제는 의미 있는 삶 그리고 가치 있는 삶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당위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삶을 원하고 추구합니다. 인간의 존재가 그런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신앙적으로 표현해 보자면,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는 생존의 문제를 넘어서서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본성이 자리잡고 있고, 이는 결국 인간 존재가 하느님을 향해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은 실상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하느님을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기도 하고, 이런 저런 봉사를 하기도 하며, 명상과 기도의 삶을 살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일은 생존의 과제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이런 것을 합니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가장 근원과 핵심은 바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참다운 자기 자신을 찾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장 좋고 아름다운 모습, 참다운 자기 자신을 찾으려는 노력입니다. 그것을 찾을 때, 우리의 인생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으로 변하고, 우리 자신은 참으로 행복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찾는 여러 힘과 방법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힘은 성찰의 힘입니다.

성찰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능력입니다. 자신의 맨 얼굴을 보는 용기입니다. 성찰은 쉽게 말하자면 거울을 보는 능력입니다. 거울을 보아야 자기 얼굴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거울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입니다. 인간과 가장 닮은 침팬지는 학습을 통해 거울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만, 인간만이 거울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자기를 되돌아볼 수 있을 때, 자기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을 가장 잘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성찰하는 힘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고, 인간이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수 있도록 도와주는 힘입니다.

오늘 대림 제2주일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를 촉구하는 장면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성찰을 신앙의 언어로 바꾸어 표현하자면, 회개입니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 힘이며, 우리 자신을 참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야 말로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오시도록 기다리고 준비하는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성찰과 회개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힘입니다. 성찰과 회개가 우리의 삶을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인도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대림시기의 세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주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에게 우리를 인도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시기에 앞서서 주님의 길을 닦은 예언자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살면서 기도하며 수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와 수행의 결과로 주님의 날이 다가왔음을 그리고 하느님이 보내시는 메시아가 곧 오실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요르단 강 인근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며 회개의 세례를 베풉니다. 세례자 요한이 가르치듯,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란 삶의 방향 전환을 뜻합니다. 그러나 막상 우리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어떻게 어디서부터 방향 전환을 해야 하는지 막막합니다.

이런 맥락 안에서 오늘 복음은 군중들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군중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요한은 두 가지 실천을 요청합니다. 첫째로 요한은 군중들에게 여벌의 옷과 음식을 가난한 사람과 나누라고 요청합니다. 두번째로는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말 것을, 그리고 군인들에게는 다른 이의 것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 것을 요청합니다. 한마디로 세례자 요한이 요청하는 회개란 자선을 베풀고 정의를 세우라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사실 자선과 정의는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의 요청이자 그리스도교 전통이 가르치는 바이기도 합니다.

자선은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가장 구체적인 형태입니다. 자선은 단순히 자신이 가진 것의 일부를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참다운 자선은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의 자리 그들의 입장에 함께 서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다운 자선은 사회적 연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자선은 자신의 소유를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선은 우리가 현세 사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어 줍니다. 더 나아가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실상 나만의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참으로 자선은 자선이라는 행위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가 자선의 의미를 더욱 묵상하면 할수록, 자선은 정의의 요청에 맞닿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거나 강탈하거나 갈취하는 마음으로 자선을 행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의 몫을 돌려주지 않는 정의란 거짓 정의에 불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선과 정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덕목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사랑의 두 얼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기 위해 회개를 요청합니다. 회개란 자선을 베고 정의를 세우는 일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한국교회는 대림 2주일을 인권주일 및 사회교리주간으로, 그리고 대림 3주일을 자선주일로 보냅니다. 자선을 베풀고 정의를 세우는 일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묵상하고 실천해야 하는 덕목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더 잘 이해하고 우리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주님께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대림 시기의 네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에 대해 전해줍니다.

엘리사벳은 젊어서도 아이가 없었고 이제는 늙어 자식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이를 가집니다. 그 아기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사회적으로 그리고 율법상 아이를 가져서는 안되는 여인이었습니다. 이 두 여인은 각자의 배 안에 아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출산을 도우려 먼 길을 찾아왔습니다.

두 어머니 모두 자신의 임신을 숨기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루카 복음서는 엘리사벳이 임신 후에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냈다고 말합니다. 마리아 역시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릴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두 어머니 모두 비슷한 처지에 있었으니, 서로의 처지를 서로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고,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가 자신들을 감싸고 있으며 하느님의 힘이 그들을 이끌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러기에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도 복되십니다하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지는 않지만, 엘리사벳의 인사에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뛴다고 화답합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두 어머니를 통해 서서히 드러나고, 하느님의 약속은 성취를 향해 서서히 전진하고 있음을 오늘 복음은 전해줍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표면적으로는 두 어머니의 만남을 전해주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두 여인의 아들들의 만남을 전해줍니다. 마리아의 태중의 아들을 본 엘리사벳의 태중 아이는 즐거워 뛰놀기 시작했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엘리사벳의 태중의 아들, 세례자 요한은 구약성경의 예언전통 전체를 대표합니다. 그는 광야에 살았으며, 주님 심판의 날을 선포했으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 예언자가 다시 왔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구약성경을 대표하는 요한이 신약성경을 대표하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즐거워 뛰놀기 시작합니다. 두 어머니의 만남을 통해 요한의 길이 예수님의 길로 이어지고 있고, 구약의 예언이 신약의 성취를 향해 전진합니다. 두 어머니의 만남은 구약과 신약의 만남을 상징하고 있고, 구약이 신약에서 비로소 이루어질 것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 두 어머니의 만남은 두 아들의 만남을 보여줍니다. 두 아들의 만남은 구약과 신약의 만남을 상징합니다. 이 만남은 이제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을 암시하고 상징합니다. 마리아 태중의 아들의 이름을 마태오 복음은 임마누엘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이제 곧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실현되고,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를 감싸게 될 것이며, 하느님의 구원이 우리의 인생을 이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만남은 믿는 이들에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신앙이 이 만남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엘리사벳이 외치며 말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주님의 오심을 이틀 앞둔 오늘, 우리가 굳건한 믿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오늘은 성탄 대축일입니다. 오늘밤 우리가 들은 하느님 말씀은 루카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탄생과 목자들이 주님 탄생을 알게된 경위에 대해서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로마 황제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예수님 탄생 시기의 로마 제국의 황제는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입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첫번째 황제이기도 합니다. 원래 로마는 오늘날의 국회와 비슷한 원로원이 권력을 가진 공화제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 원로원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리고 지중해 주변 지역의 온갖 내란과 전쟁을 평정함으로써 이른바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이룬 사람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비롯해서 중동 지역 역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파견한 로마 총독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제국에 반항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에게는 십자가형이라는 처형으로 지중해 세계를 제압했습니다. 로마의 평화라고 하지만, 실상 로마 제국의 눈으로 볼 때 그렇지, 실상은 군사력과 폭력으로 이루어 놓은 강요된 평화였습니다.

반면에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계획과 뜻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보여줍니다. 당시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서 보자면, 변방 가운데 변방에서, 온갖 힘센 제국들의 틈바구니에서 겨우 겨우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그리고 다윗 왕가의 자손이라고는 하지만 아이 낳을 방 하나 구하지 못한 가족들에게 하느님의 계획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새로난 아기는 포대기에 싸여 가축들의 여물통에 눕혀집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그리고 가장 연약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그 아기의 탄생의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이들은 밤새 들판에서 양떼를 지켜야했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오신 하느님을 알아보는 이들 역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천사는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을 찾지 않았고, 목자들에게만 구세주의 탄생 소식을 알립니다. 천사의 알림과 더불어 목자들은 영광의 빛을 보고, 하늘 군대의 찬양노래를 듣게 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이렇게 오늘 복음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하느님은 세상의 중심에서 모두가 우러러보는 가운데 오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가장 낮은 곳에, 가장 연약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풍요로운 삶이 있음을 가르쳐 주시고, 그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경제적 능력이나 군사적 권력에서 이룰 수 있는 로마의 평화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입니다. 주님의 평화는 힘으로 얻거나 힘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목자들과 같은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이렇듯 가장 낮고 초라한 구유 앞에서 또 가장 가난하고 작고 약한 아기 앞에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혀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더욱 낮아지고 가난해지도록, 그래서 가장 낮고 초라한 곳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오늘 주님의 성탄 대축일을 맞아, 우리의 마음이 목자들의 마음으로 채워지길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쁨과 희망이 구유에 잠든 아기의 꿈으로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더 강하게, 더 채워서, 더 편하게 살고자 했던 내 마음과 화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을 때, 우리는 가장 약한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만나고, 주님이 주시는 더욱 충만하고도 영원한 평화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밤 모든 신자들과 그 가정에 주님께서 주시는 참다운 평화가 충만하기를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오늘은 성탄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들은 하느님의 말씀, 요한복음은 성탄의 의미에 대해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우리 가운데 오심을 뜻하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오늘 복음은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려줍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은 세상이 생기기 전에 계셨고, 실상은 세상은 하느님과 그분 말씀으로 나왔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세상 만물이 하느님과 그 말씀을 통해서 나왔으니, 바로 그분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줍니다. 세상을 비추는 그 빛이,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그 빛이 이제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생명을 당신 아들을 통해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고, 당신의 빛을 당신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동시에 오늘 말씀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도 알려줍니다. 세상 만물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듯이 인간 역시 하느님에게서 왔습니다. 인간은 하느님 생명을 나누어 받아 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인간은 하느님 생명의 빛을 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인간의 삶이 비루하고 허무하게 느껴질 때라도, 우리의 삶은 하느님 생명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우리의 삶이 부조리하고 세상이 악한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우리는 하느님의 빛에 비추어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하느님 생명이 숨쉬고 있으며, 인간 삶이 하느님의 빛으로 인도받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 아름다울 수 있고, 더 거룩해질 수 있으며,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하느님 빛이 있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을 때, 더 의미있고 더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음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니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존재는 더 빛나고 더 완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 생명의 빛이 이 세상에 왔습니다. 이 빛이 우리를 더욱 환하게 비추어 줍니다. 우리가 이 빛을 따라 살 때,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오신 빛,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 생명의 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줍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은 이제 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지만, 우리에게 오신 그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제 하느님 곁에 그리고 하느님 안에 있게 됩니다. 하느님 생명이 빛이 우리에게 비추입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은총으로 우리의 삶이 새로워집니다. 우리의 삶을 은총이 감싸고 있고,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십니다. 엄마의 사랑을 깨달은 아이와 깨닫지 못한 아이의 삶이 다를 수밖에 없듯이, 하느님의 은총을 깨달은 사람의 삶은 그렇지 못한 삶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삶은 새로운 의미와 가치로 가득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시련과 아픔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요 슬픔과 절망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심으로써 하느님 생명의 빛이 우리를 비추고 있으며,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삶 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신비입니다.

오늘 주님의 성탄 대축일에 우리 본당 모든 신자분들이, 그리고 오늘 세례를 받으시는 우리 예비신자들이 하느님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고 하느님 은총 안에서 살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저는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주님의 성탄 대축일이 지나고 처음 맞이하는 주일을 교회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로 지냅니다. 모든 사람이 비슷비슷하듯이, 예수님 역시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서 양육받고 성장했습니다. 한 사람이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태어나서 1-2, 길게 잡아도 6-7년의 시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 시기 동안 아기는 엄마 품에서 사랑으로 느끼며, 최초의 성격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가정은 우리 모두에게도 그러하듯이, 이제 갓 태어난 예수님에게도 가장 중요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가정이 다 그렇듯이, 시련과 고통없는 가정 역시 없을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을 보면, 헤로데 임금은 유다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그 유다인의 왕을 없애기 위해 예루살렘 근방의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죽입니다. 주님의 천사는 요셉에게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명하고, 요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족을 이끌고 이집트로 피신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무 말없이 자신들에게 들이닥치는 온갖 어려움과 괴로움을 받아들입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과 마음을 보여줍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그들의 가정을 지키고 그들의 자녀를 지키기 위해 쏟아야 하는 땀과 눈물을 요셉과 마리아가 보여줍니다. 특별히 오늘 가정과 자녀를 지키기 위해 쏟는 세상 모든 아버지의 땀을 응원하고, 세상 모든 어머니의 눈물을 위로합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우리가 묵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오늘 복음에서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 예수님께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하고 말하자, 예수님은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양아버지 요셉이 아니라 성부 하느님께 속해 있음을 은연 중에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모든 자녀들은 부모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마찬가지로 자기 부모를 떠나 하느님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부모들이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나자렛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가진 자녀들입니다. 이 세상에 부모 없는 사람은 없으며, 자녀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부모에게 어떻게 대하며 살았으며, 지금 부모에게 어떻게 대하며 살고 있는지도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맞아 우리 본당 신자들과 모든 가정에 주님의 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도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의 기도와 보호가 있으시기를 빕니다. 시련과 고통 속에 있는 가정에도 주님께서 용기와 위로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우리들의 자녀들에게도 주님께서 그들의 인생을 이끌어 주시고, 그들의 삶을 감싸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 모든 가정을 위해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지난해를 감사드리며 새해에 마리아와 함께

오늘은 2024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는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송년감사미사를 봉헌합니다.

오늘 송년감사미사를 봉헌하면서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로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에 대해 잠시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는 노벨상 수상 강연에서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이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말합니다. 저자의 이러한 질문과 문제의식은 그리스도교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제는 어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제는 언제나 오늘 안에 살아있고, 오늘은 여전히 내일 안에 살아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언제나 자기 민족의 과거 역사를 되돌아보며 하느님의 뜻을 찾아냈습니다. 또한 자기 민족의 오늘을 바라보며, 미래를 예언했습니다. 어제는 오늘 안에 살아 있고, 오늘은 내일 안에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과 살아있는 이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를 위해 도움을 준다는 것이 모든 성인의 통공이 말하는 바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과거와 역사의 결정체이며 동시에 다른 모든 이들의 도움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찰 없는 삶은 어리석은 삶이며, 감사하지 않는 삶은 교만의 삶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밤 우리는 송년감사 미사를 봉헌하며, 오늘까지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동시에 우리의 삶이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성취와 결과를 얻어야만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함께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이고 모든 이들의 도움입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는 송년감사 미사를 봉헌하면서 동시에 새해의 첫날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는 우리가 성모송을 바칠 때마다 외우는 구절입니다. 이 표현이 뜻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마리아가 천주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마리아에 대한 교리를 훨씬 넘어섭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교리와 전례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참으로 인간이시며 참으로 하느님이시라는 신앙고백입에 있습니다. 마리아는 참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어머니됨은 하느님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하는 데서 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목자들이 전한 말에 놀라워하며, 그 일들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히 되새깁니다. 비단 오늘 복음만이 아니라 루카 복음 전체를 통해, 마리아는 항상 하느님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합니다. 아기를 가질 것이라고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 잃었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되찾았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 이 모든 말씀들을 마리아는 마음 속에 간직했다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 태중에 품고 사는 어머니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어머니입니다. 마리아의 이런 모습은 그리스도교의 기도와 영성의 원형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넣고 되새겨 묵상하며, 그 묵상한 말씀에 순명하여 실천하는 것이 기도요 영성입니다.

오늘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에, 우리 모두가 하느님 말씀을 품고 사는 어머니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용기와 평화, 하느님의 능력과 축복이 되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맞이하는 새로운 한 해가 하느님 말씀으로 새로워지고, 온 세상의 평화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과 기도를 모아,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말씀을 품은 어머니 마리아

2025년 새로운 한 해가 오늘 시작됩니다. 새로운 한 해의 첫날을 교회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경축합니다. 또한 매년 11일은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정한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성모님의 보호에 우리를 의탁하면서 그리고 우리 가정과 온 세상에 주님께서 평화를 주시도록 기도하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성모송을 바칠 때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여하며 성모님을 부릅니다. “천주의 성모라는 말은 곧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천주의 성모 또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신앙고백은 마리아가 누구인지에 대한 교리이기 보다는 실상 마리아가 낳은 아기가 누구인지에 대한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성탄 대축일이 1주일이 지난 후, 우리는 1주일 전에 태어난 아기,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기가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그분이 바로 참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1장을 보면, 하느님의 말씀이 한 처음에 있었고, 그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있었고, 그 말씀이 곧 하느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과 함께 있었던 하느님의 말씀이 마리아를 통해 사람이 되었고, 그 말씀은 곧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이 바로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그 분이 바로 참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고, 하느님은 우리 인생을 감싸고 있는 분이시며, 하느님이 바로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신앙고백은 우리가 어떻게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마리아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리아는 참으로 그리스도인의 모범이자 원형입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모범은 그녀의 어머니됨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어머니됨은 단순히 출산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삶의 자세와 태도로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목자들이 전한 말에 놀라워하며, 그 일들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히 되새깁니다. 루카 복음 전체를 통해, 마리아는 항상 하느님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합니다. 아기를 가질 것이라고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 잃었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되찾았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 이 모든 말씀들을 마리아는 마음 속에 간직했다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 태중에 품고 사는 어머니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어머니입니다. 실로 말씀을 품은 어머니의 모습은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자기가 품고 있는 그 말씀에 순명하여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의 위협을 이겨내고 불의와 싸우며, 어떤 그리스도인은 물질문명에 저항하여 가난을 선택하고, 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온 삶을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데 바칩니다. 말씀을 품고 사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힘이 내립니다. 말씀을 품고 사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용기와 평화, 하느님의 능력이 일어납니다.

오늘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에, 우리 모두가 하느님 말씀을 품고 사는 어머니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용기와 평화, 하느님의 능력과 축복이 되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맞이하는 새로운 한 해가 하느님 말씀으로 새로워지고, 온 세상의 평화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과 기도를 모아,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내려오시고 하느님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를 통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 선언되고 표명됩니다. 예수님의 세례로 이제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도 우리 위에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원래 세례는 유다교의 정결례 예식 중의 하나입니다. 세례라는 말은 물에 잠기다또는 물로 씻다는 뜻으로써 몸과 마음의 정화를 상징합니다. 복음서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식사 전에 손 씻는 예식을 하지 않았다고 시비를 거는 장면이 있는데, 이 손씻는 예식 역시 정결례 예식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례는 유다인 가운데 큰 죄를 지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벗기 위해서 또는 유다인이 아닌 사람이 유다교로 개종할 때 거행하는 예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거행한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날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하고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메시아의 오심을 회개하며 준비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를 통해 모든 죄를 씻고 새로운 메시아의 백성이 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면서 세례의 의미는 새로워집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세례 때에 예수님 위에 비둘기 모양으로 성령께서 내려오십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구약의 예언에 따라 메시아의 사명을 부여받았음이 드러납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이가 성령을 받는 성령 강림이 예고됩니다. 또한 예수님을 두고 하느님께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선언되고 표명됩니다. 동시에 이 말씀으로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의 사슬을 끊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고, 성령의 은총을 받으며,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1 코린 10,1-2)는 그리스도인의 세례를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 바다의 세례를 거쳐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세례성사는 우리 각자 개인에게 일어나는 출애굽 사건이고, 죄와 죽음을 건너가는 파스카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를 통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리를 괴롭히는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고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새로 시작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가 생길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세례성사로 우리가 새롭게 태어났으며, 하느님의 자녀로 우리 삶을 새로 시작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삶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더럽혀 지고, 세상 안에서 새로움이 무디어져 가기도 합니다. 세례성사의 은총을 매일 체험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고해성사와 견진성사가 있습니다. 고해성사는 우리를 세례성사의 은총으로 회복시킵니다. 부족함과 욕심으로 일그러진 우리 자신의 모습을 세례성사 때의 모습으로 회복켜주는 것이 바로 세례성사입니다. 견진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성령을 받습니다. 세례 때 우리에게 내려오신 성령께서 다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우리를 열어놓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다시 우리를 감싸고 우리의 삶을 지탱하게 하는 것이 바로 견진성사입니다.

오늘 주님의 세례 축일에 우리 자신이 세례 때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묵상하고 감사드리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카나의 혼인잔치

오늘은 연중 제2주일입니다. 성탄 시기가 끝나고, 두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동시에 오늘은 우리 본당이 축성되고 설립된 본당의 날이기도 합니다. 1978년 오늘 바뇌의 성모 마리아를 주보 성인으로 모시고 우리 당감성당이 축성된 날입니다. 지난 주 수요일 1 15일에 바뇌의 성모님을 기념하며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오늘 우리 본당의 축일을 맞아 우리 본당 모든 신자들의 가정에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길 함께 기도합니다. 동시에 2028년이면 우리 본당이 설립 50주년을 맞이합니다. 우리 본당 공동체 모두가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또한 외적으로도 더 나은 성전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카나에서 혼인잔치가 있었고, 성모님도 그 잔치에 참석하였고, 예수님 역시 제자들과 함께 초대받아 그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잔치에는 어련히 술이 빠질 수 없는데, 카나의 잔치에서는 그만 술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술이 떨어지면 잔치가 끝나기 마련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께 술이 없다고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지만, 물독의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주십니다.

인생의 고비 고비에서 맞는 축제와 잔치는 고달픈 삶 속에서도 인생의 기쁨과 희망을 드러냅니다. 혼인잔치에 예수님께서 초대받으시고 참석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도 우리 인생의 기쁨과 희망을 축복해 주심을 뜻합니다. 뿐만 아니라 물을 술로 변화시켜 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기쁨과 희망이 더욱 커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전해주듯 우리가 마련한 포도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 인생의 기쁨과 희망은 우리가 준비한 포도주로는 한계가 있음을 오늘 복음은 말해줍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포도주가 있어야만 우리의 잔치는 계속될 것이고, 우리 인생의 참다운 기쁨과 희망이 계속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기쁨이요 희망이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마련한 포도주로 우리 인생의 더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성모님의 역할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혼인잔치에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가장 먼저 느끼고 알아차립니다. 성모님은 잔치가 끝나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 알립니다. 그렇게 성모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에 동참합니다. 성모님 역시 우리가 기쁨과 희망 속에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슬픔과 아픔을 가장 먼저 느끼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부족함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시며, 그것을 예수님께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분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본당의 주보 성인이신 바뇌의 성모님께서 우리의 어려움과 아픔을 누구보다 먼저 아시고, 우리를 위해 주님께 기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마련한 포도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주님의 포도주로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포도주로 참된 기쁨을 누리도록 성모님께서는 주님께 청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슬픔과 아픔을 가장 먼저 아시는 성모님께 우리의 삶을 의지하며, 특별히 바뇌의 성모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님께 빌어 주시길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첫 시작에 대해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첫째는 루카 복음서가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를 들려주고 있으며, 둘째는 예수님의 공적 활동의 첫 시작에 대해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특별히 루카 복음서의 첫 문장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복음서를 저술한 사람이 이 복음서를 왜, 어떻게 저술하게 되었는지를 밝혀 줍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복음서가 어떤 책인지, 예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에게 전해지고 또 어떻게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루카 복음서의 첫 구절은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대해서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이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누구로부터 받아서 썼는지도 밝히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 하고 복음사가는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목격자들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이자 사도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서는 사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배웠던 가르침,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직접 듣고 본 목격자들의 증언입니다. 그리고 그 증언 안에, 복음서 안에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과 행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묵상해야 할 점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일회성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늘 화답송에서 우리가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하고 노래했듯이, 예수님의 말씀은 그 때 거기서 말씀하심으로써 종결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이 기록된 문자 안에 굳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 자체가 바로 영이며 생명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그 때 거기서 종결되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예수님 치유의 기적은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도 그대로 실현되고, 예수님 사랑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는 이에게서도 이루어집니다. 성경의 말씀은 그냥 글자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는 사람과 더불어 자라납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는 사람의 영이 성장하게 되고, 읽는 사람의 영이 성장하면 성경 말씀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사건이 됩니다. 하느님 말씀은 영이시고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의 두번째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시고 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의 말씀이 글자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 가운데서 실현된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오로 사도 역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 17)하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믿음이 오고, 믿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그 말씀이 살아서 우리에게 실현됩니다. 그리스도교 2000년의 역사가, 수많은 성인들의 삶과 죽음이 이를 증언합니다. 하느님 말씀은 영이시며 생명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경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이 우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크신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에서 우리 각자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함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주님의 봉헌

이스라엘의 율법에 따라서, 예수님은 태어난 지 여드렛날에 할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40일이 지난 후에 성전에 봉헌됩니다. 성탄대축일 40일 후에 교회는 아기 예수님이 성전에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여 주님 봉헌 축일을 지냅니다. 그리고 이 축일에 교회는 전통대로 성전의 제대에서, 그리고 각 가정에서 기도할 때 사용될 초를 봉헌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요셉과 마리아는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바치던 제물, 비둘기 한 쌍을 봉헌 제물로 바칩니다. 그리고 이 제물은 성전에서 태워져 하느님께 봉헌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봉헌의 핵심은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제사는 제물을 태워버립니다. 짐승이건 곡식이건 제사를 위한 제물이 되면 모두 태워 없애 버립니다. 오늘날의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면, 유용하지도 효율적이지도 않은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분명합니다.  인간의 손에 닿지 않고, 더 이상 인간이 사용할 수 없도록, 그래서 오로지 하느님의 것이 될 수 있도록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봉헌의 핵심은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고 귀한 것이라도 한낱 재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태워버림의 핵심은 온전히 포기하고 하느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 나의 시간, 나의 노력, 내 영역의 모든 것을 온전히 포기하고 하느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봉헌의 정신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마리아의 삶은 완전한 봉헌의 삶이었습니다.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완전히 자기를 포기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 역시 완전한 봉헌의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기 포기이고 봉헌입니다. 더 나가서 십자가 위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태워버리고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을 봉헌했습니다.

이러한 봉헌, 자기 포기의 가장 가까운 예를 오늘 우리가 함께 축복하고 교회에 봉헌하는 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초는 자신을 태우고, 자신을 버림으로써 다른 이들을 비추어 줍니다. 이것이 자기 포기이고 봉헌입니다. 우리 모두가 오늘 우리가 거행하는 축일의 정신대로 봉헌의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내 시간, 내 노력, 내 마음, 내 자존심, 이 모두를 하느님께 그리고 우리 공동체에 봉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필요 없는 것을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을 봉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각자의 작은 봉헌들이 모여서 우리 공동체와 우리 교회의 더 큰 봉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주님 봉헌 축일은 주님께 자신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기억하는 축성생활의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수도자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우리 자신 역시 포기하고 희생하여 봉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

오늘 두번째 독서인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를 보면, 여러 차례 “복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복음을 전해 받았고, 또한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그 복음을 전해주었다고 말합니다. 과연 바오로 사도가 전해받았고 또 전해준 복음은 무엇인지, 그리고 복음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복음이란 그저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 말하자면 good news입니다. 그런데 이 좋은 소식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된 것은 예수님이 이 ‘복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당신의 공적 활동의 시작 때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하고 선포하십니다. 여기서 복음이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이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그분의 은총과 구원이 우리 앞에 다가왔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아픈 이들을 치유하신 것은 하느님의 구원과 은총이 우리 앞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악령을 쫓아내며 아픈 이들을 치유하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하느님의 구원과 은총이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 안에 있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복음이지만, 예수님 역시 우리에게 복된 소식, 복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그 자체가 복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를 보면,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용법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복음을 전해 받았고, 그 복음을 코린토 신자들에게 전해주었다고 말합니다. 그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다름아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과 연결해서 말하자면,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온전히 우리 자신들에게 실현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은 믿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믿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복음을 믿는 것이 됩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마르코 복음사가의 마르코 복음의 제일 첫 구절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적어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는 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구원의 기쁜 소식,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 안에 사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고백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이 우리의 삶을 감싸고 있음을 믿는 것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실 그리스도임을 믿고 고백하여 복음의 기쁨 속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인지 그리고 누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인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주님께서는 인간의 참다운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에 대해 근본적으로 새롭게 성찰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의 상식이나 통념을 뒤집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말씀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 우리가 찾는 행복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과 가치가 참으로 인간을 행복하고 가치 있게 해줄 수 있는 것인지 질문하고 계십니다. 풍요로운 삶, 안락한 삶, 걱정 없는 삶, 남 보기 부러울 것 없는 삶이 곧바로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고, 그런 삶이 참으로 인간다운 삶이나 가치 있는 삶과 같은 말도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성공을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 주시고자 합니다. 가난과 풍요를 가르는 근본적인 잣대에서 우리가 자유롭고 해방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사회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잣대에서 해방되어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참다운 행복을 찾기를 주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여러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용기 있게 참다운 행복을 찾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반대로 주님께서는 지금 부유하고 웃고 있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풍요로운 삶이 주는 위험도 깨달어야 하고, 안락한 삶이 주는 유혹도 경계해서 합니다. 삶의 물질적인 조건이 우리가 인간적 품위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지나친 물질은 오히려 우리에게서 인간의 마음과 얼굴을 빼앗아 가기도 하고, 우리 자신을 물질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우리가 쌓아놓은 것이 곧바로 행복의 조건도 아니고, 인생의 성공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모든 것을 갚아주실 것이라는 굳센 믿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가난하고 울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불행은 아니요, 지금 부유하고 웃는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깊은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더욱 더 깊이 하느님께 신뢰하고 의탁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야말로 우리의 용기이며 참된 행복입니다. 그래서 오늘 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주님께 신뢰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세상 모든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 역시 이 연결망 안에서, 다시 말해서 관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절대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특별히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인간이 관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임을 일깨워 줍니다. 인간은 이웃 인간과의 관계, 자연 만물과의 관계,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관계 안에서 살아간다는 말은, 나의 행동 하나도 개인적이거나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이웃과 자연 만물에 그리고 하느님께 깊은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뜻입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우리는 관계 안에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오늘날 기후변화나 코로나19와 같은 질병 역시 우리가 자연 만물을 착취하고 파괴한 결과로 우리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이웃에게 내뱉은 말 한마디 역시 좋은 것은 좋은 대로, 나쁜 것은 나쁜 대로 고스란히 다시 나에게 돌아옵니다. 우리가 관계 안에 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창세기가 우리에게 주는 신앙의 빛입니다.

불교 전통 안에서도 비슷한 통찰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인과 연으로 묶여져 있고, 지금 나에게 생기는 일들은 업보, 다시 말해서 과거 인연의 결과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과거 행동의 결과대로 오늘을 살아가고, 인간은 어제 이웃에게 한 것은 오늘 고스란히 되돌려 받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주는 깨달음 그리고 불교의 종교 전통이 주는 통찰을 바탕으로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요, 그리스도교 교리의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구약의 율법을 하느님 사랑과 연결시키십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을 넘어서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인간의 관계망 안에서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 내가 상대방을 원수로 대하면, 상대방 역시 나를 원수로 대할 것이고 이 관계는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수조차도 사랑할 수 있다면, 나에게 잘못한 이를 내가 용서할 수 있다면, 나를 미워하고 욕하는 사람에게 잘해줄 수 있다면, 우리는 악과 죄의 사슬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내가 원수를 사랑한다고 원수의 태도가 즉각적으로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나의 태도와 진심은 관계 안에서 돌고 돌아 나에게 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과거는 그냥 그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 살아있고, 오늘 우리의 마음은 미래에 우리의 삶에 되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오늘 내가 참고 견디며 사랑하는 것이 당장 나에게 돌아오지 않더라도, 설령 나의 진심이 다시 나에게 돌아올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웃 사람들과 갖는 관계 그리고 자연 만물과 갖는 관계의 가장 밑바닥에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진심을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받아 주실 것이고 하느님이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에서 다윗이 말합니다. “주님은 누구에게나 그 의로움과 진실을 되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진심과 사랑의 행위는 이웃을 통해서 나에게 되돌아올 것이고,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우리의 의로움과 진실을 갚아 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사람의 말, 하느님의 말씀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열매는 좋은 뿌리에서 나오는 것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은 단지 말한 것을 너머서서 그 마음을 전해주며, 그 말의 뿌리를 드러내 준다는 뜻입니다. 1독서 역시 사람의 말은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낸다고 전해주며, 말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묵상하도록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실상 사람의 말은 입에서 발설되는 그것 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말은 어떤 사실을 전달하거나 서로의 의사소통을 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그러기에 아픈 이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은 그 사람에게 용기를 불러 일으킵니다. 넘어진 이에게 건네는 격려의 말은 그를 일으켜 세웁니다. 진정한 용서와 사과의 말은 화해의 현실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냅니다.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사람의 말은 사람을 바꾸고,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냅니다. 말은 힘이 셉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말씀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을 구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려라하시니 앞을 보지 못하는 이의 눈이 열리고 듣지 못하는 이의 귀가 열렸습니다. “일어서라하시니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이 일어섰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자 마라하신 주님의 말씀에 간음한 여인이 용서와 치유를 받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을 변하게 하고, 사람들의 관계를 바꾸어 내며, 사람들의 현실을 새롭게 만들어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을 구원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악령을 쫓아내고 아픈 이들을 치유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는 예루살렘 성전 문 곁에서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하고 말하며 일어서지 못하는 이를 일으켜 세웁니다. 사도행전은 베드로 사도만이 아니라 다른 사도들 역시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병자들을 치유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전통을 받아서 오늘 교회 역시 예수님의 말씀으로 하느님 백성에게 용서와 치유, 생명과 평화를 건네줍니다. 교회는 미사 안에서 사제의 입으로 발설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시고, 당신 몸의 생명을 나누어 줍니다. 교회는 일곱 성사 안에서 사제를 통해 전해지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당신 백성에게 하느님의 생명과 은총을 전달합니다.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 이 말 안에서 하느님의 용서가 현실이 되고,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일곱 성사를 통해서, 사제의 입을 통해서 발설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신자 각자의 기도와 말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새롭게 발설되고, 그 말씀은 신자 안에서 활동하고 효력을 발생시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치유하고 용서하며,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구원하고, 예수님이 내뱉으신 그 말씀이 교회와 우리 자신의 입을 통해 다시 우리를 구원하게 됩니다. 이제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내는 것을 넘어서서,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현존케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는 말의 신비이자 성사의 신비입니다.

오늘 우리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힘이 되고 우리를 변화시키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유혹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기에 앞서, 성령이 이끌려 광야로 들어가십니다. 그곳에서 사십일을 기도하며 지냈는데, 그 기간 중에 악마에게 유혹을 받습니다. 빵의 유혹, 권세와 영광에 대한 유혹, 그리고 인정받고 능력과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은 예수님이 광야에서만 받았던 것이 아니라, 당신 삶 전체 안에서 이루어진 유혹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 안에서도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첫째로 빵의 유혹입니다.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유혹입니다. 빵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기본 조건이지만, 그것만으로 우리가 참으로 인간으로서 살아가거나 그것만으로 우리가 인간답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간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로, 악마는 예수님께 악마 자신을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이 유혹 역시 예수님의 삶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빵의 기적 이후에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떠받들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유혹을 피해서 그들에게서 거리를 둡니다. 공간적으로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시고, 시간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는 하느님께 기도하심으로써 그 유혹을 피해 가십니다. 이 유혹은 오늘 우리에게도 결코 만만치 않은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조금만 타협하면, 잠시만 눈을 감으면 물질적 이익이 손에 들어올 것 같은 기회가 있습니다. 그런 기회가 바로 예수님이 겪으신 유혹과도 같은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악마는 예수님께 성전 꼭대기에서 몸을 던지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천사들이 보호할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이 역시 예수님의 삶 가운데, 특별히 당신 수난 중에 되풀이되는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달리셨을 때(마태오 27, 39-), 지나가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곧이어 율법학자와 수석 사제들도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예수님은 성전 꼭대기에서 몸을 던지지 않았고 십자가 위에서도 내려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삶의 한가운데서 자신의 존재와 능력을 인정받고자 하고, 또 그것들을 과시하고 싶어 합니다. 이웃과 관계를 맺을 때도 이웃과 더불어 어떤 일을 할 때도,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우리의 생각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 인정받고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깊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유혹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유혹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은, 인간의 불안하고도 온전하지 못한 조건 그리고 인간의 존재 깊이 숨겨진 욕망을 깨달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자신이 유혹받고 있음을 깊이 깨닫는 것은 어쩌면 새로운 삶의 전환을 이룰 수 있는 바탕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약하고 불완전하며 욕망을 감추고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 삶의 한가운데서 다가오는 많은 유혹을 이겨내고 새로운 삶의 전환을 이루도록 노력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유혹을 깨달을수록, 우리가 예수님과 더불어 광야에 서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순시기야말로 우리 삶의 전환을 이룰 기회이고, 우리 삶의 광야입니다.

오늘 내가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자주 넘어가는 유혹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그리고 그 유혹에 맞서 싸울 힘을 주시도록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기도 중에 변모

네 개의 복음서 모두가 한결같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자주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는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 기도하십니다. 그분은 당신 삶의 중요한 순간들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십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십니다. 그분은 당신 아버지께 기도하기 위해 늘 조용한 장소로 피해 가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기도하시는 분이시고, 기도에 있어서도 우리의 스승이십니다.

기도하시는 주님을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가장 먼저 묵상해 볼 점은, 주님께서는 당신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도 기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스러운 십자가 위에서도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기도하면서 극복했습니다. 주님의 모범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어떤 고통과 역경 앞에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가슴이 찢어질 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서 힘과 용기를 주시고, 평화를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겐 기도야말로 힘이자 용기입니다. 우리 역시 고통과 시련 앞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안에서 주님께서는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둘째로 주님께서는 중요한 결정을 하기 위해 기도하시고, 기도하시기 위해서 조용한 장소를 찾으십니다. 신앙인 역시 중요한 결정 앞에서 기도하고, 기도하기 위해 세상의 시끄러움에서 거리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난에 마음을 많이 쓰고 있고, 지나치게 TV나 인터넷에 시간을 많이 보냅니다. 그러나 기도의 본질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세상의 시끄러움에서 한발 물러서야 합니다. 온갖 소음을 피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산에 올라 기도하실 때,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옷이 하얗게 빛났으며 모세와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 하느님은 예수님의 참된 모습, 원래의 모습이 드러나도록 해 주셨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역시 깊은 기도 안에서 자신의 참된 모습, 하느님이 주신 원래의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당신께 사랑받는 존재인지,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의 변모가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사순시기의 두 번째 주간을 맞습니다. 이 사순시기 동안 좀 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기 내면에 머무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줄여야 합니다. 이 사순시기 동안에라도 시간을 정해서 규칙적으로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야 말로 우리의 힘이자 용기입니다. 기도 안에서 우리의 참다운 모습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산에 올라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순시기는 우리 스스로 광야로 나가고 산으로 올라가 주님을 만나고, 자기 자신을 만나는 은총이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번잡한 일상 가운데에서도 우리 스스로 기도하기를 결심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하느님의 이름

오늘 제1독서 탈출기 3장의 말씀은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고통에서 울부짖는 이스라엘을 이끌어 주실 것을 약속하시며, 하느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십니다. 모세가 하느님을 만난 이 체험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원초적인 하느님 체험을 담고 있습니다. 모세의 하느님 체험과 그 분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은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여 계속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기억을 되새기도록 합니다. 오늘 특별히 하느님의 이름 야훼와 그 의미에 대해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당신 이름을 계시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나는 있는 나다입니다. 더 단순하게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느님의 이름은 나는 나다입니다. 이 이름의 첫번째 의미는 하느님은 스스로 존재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로부터 존재하며, 주변의 다른 존재의 도움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둘째로, 하느님은 그냥 그분일 뿐, 어떤 인간의 말과 생각도 그분을 규정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존재와 사유 너머에 계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당신이 말하시는 그대로 그냥 입니다. 이 말이 히브리말로 바로 야훼입니다. ‘야훼라는 말뜻이 그냥 나는 나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당신 이름을, 하느님이 당신 자신이 야훼라고 밝혀 주신 부분이 구약성경에서 세 차례 등장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좀 더 묵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자신들에 입에 올리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이름을 말해야 할 때, 야훼 대신에 히브리어 아도나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도나이나의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도 진한 고딕체 글짜로 주님이라고 쓰여진 부분이 바로 아도나이, 나의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오로지 야훼 하느님께만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님은 바로 야훼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에게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바로 야훼 하느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깊게 체험하면,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강력한 체험 하나는 예수님이 어두운 밤에 풍랑이 이는 호수가를 걸어오신 사건입니다. 마태오 복음 14장을 보면, 제자들은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겁에 질려 유령이다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마치도 모세 앞에서 당신을 드러내시듯이,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다나는 곧 있는 나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해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하고 외칩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못 자국을 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던 토마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고 말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하느님과 같은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모든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동시에 예수님 역시 하느님과 같으신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을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자비로운 아버지

오늘 복음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바로 자비로운 아버지에 대한 비유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 자신의 몫을 챙겨서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몫이 바닥이 나자,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되고,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자 염치불구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전혀 탓하지 않았고, 오히려 잃었던 아들을 되찾았다고 여기며 큰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그러나 아버지 곁에 있었던 큰아들은 동생도 못마땅했지만, 그 동생을 너무나 기쁘게 맞이해주시는 아버지도 못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동생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고 하시며 함께 기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어떤 신학자나 철학자보다도 더 명확하게, 어떤 설교나 강의보다도 더 감동적으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자비가 얼마나 넓고도 크신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작은아들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지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 가운데 자기 몫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탕진하고 나서야 제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입고 있는 모든 옷을 벗고 나서야,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을 벗고 나서야 초라한 자기 모습을 발견합니다. 인간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자기 죽음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나서야, 자기 모습을 되돌아보고, 아버지를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고 매달립니다.

큰아들의 모습 역시 또 다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큰아들이 화가 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큰아들의 화는 아버지를 향해 쏟아부어 집니다. 그는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동생보다 아버지께 더 많이 인정받고 더 많이 사랑받고자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재산 가운데 자기 몫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에 대해서는 자기 몫을 요구한 셈입니다. 시기와 질투, 더 많은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 역시 큰아들의 마음을 흐리게 만듭니다. 큰아들은 언제나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실상은 작은아들처럼 아버지를 향해 가는 길을 잃어버린 셈입니다.

두 아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아버지께로 향하는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두 아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우리의 모습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고, 두 아들 모두를 아버지의 잔치로 데려옵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이 잔치에 함께 하여 즐기고 기뻐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각자의 방식대로 이 잔치에 참여하기를 언제나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얼굴을 다시 되돌아 보고, 동시에 분노에 더디시고 자비와 사랑이 충만하신 아버지의 마음에 의탁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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