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체를 통한 하느님과의 만남
요한 6, 51-58/ 2023. 6. 11.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우리는 친한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고, 술도 나누어 마시며, 커피도 한잔 합니다. 당연히 우리들의 식사와 술자리는 단순히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것도 아니요 목마름을 축이기 위해서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상대방을 좀 더 새롭게 만나고 새롭고도 더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 생각과 삶을 나누게 됩니다. 그러기에 격식과 예의만 차리다 끝나버리는 식사만큼 불편한 것은 없습니다. 삶을 나눌 수 없는 식사 자리는 인간적이지도 못하고 메마르고 불행한 자리가 됩니다.
복음서 여러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과 식사를 하셨습니다. 루카 복음을 보면, 사회 지도층 사람들은 예수님을 “먹보요 술보”라고 비난하는가 하면 창녀와 세리들과 어울린다고 비난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들을 새롭게 만나기를 원하셨고 새로운 관계를 맺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의 전날 밤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식사는 일상의 식사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러하겠지만, 마지막을 의식하고 하는 말과 행동은 특별한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가르치고 행동해온 모든 것을 총괄적으로 보여주십니다. 한편으로는 당신의 철저한 희생이고, 다른 편으로는 그분의 희생으로 얻는 새로운 생명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를 당신의 생명을 나누는 자리요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자리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나누어 주시는 빵을 세상 사람들을 위해 죽어야 할 당신의 몸으로 이해하십니다. 그분께서는 포도주를 세상 사람들을 위해 쏟아야 할 당신의 피로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식사를 당신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절정의 순간이며 하느님과 맺는 새로운 계약의 완성으로 생각하셨습니다. 나눔의 절정, 관계의 완성은 바로 자기를 희생하여 이루는 사랑입니다. 바로 이 사랑으로 세상 사람들과 예수님의 새로운 깊은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피로 맺는 관계입니다. 이 피로 하느님과 새로운 이스라엘의 계약이 이루어집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 하느님과의 새로운 계약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생명을 줍니다. 그리스도의 생명, 부활의 생명을 줍니다. 이 생명은 매일 먹는 밥이나 빵으로 살아가는 생명이 아닙니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장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그리스도 역시 그 사람 안에 머물게 됩니다. 성체 성사를 통해 주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주님 안에 있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도 서로의 건강을 기원하며 잔을 들 것이며, 서로의 사랑을 나누며 음식을 먹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식탁은 더 깊은 만남과 더 새로운 관계를 지향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의 만찬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 만찬에서 하느님과 더 깊은 만남과 더욱 새로운 관계가 맺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과의 만찬 안에서 ‘너희도 이를 행하라’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세상 사람을 위해 주님처럼 자신을 내놓을 결심을 할 것입니다. 이 만찬 안에서 우리는 ‘내가 마실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하신 주님의 질문을 매일 매일 새롭게 새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이 질문에 이렇게 응답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열 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보내시다
마태오 9, 36-10, 8/ 2023. 6. 18. 연중 제11주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열 두 사람을 불러 제자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명을 주어 파견하십니다. 오늘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파견하신 의미에 대해 함께 묵상합시다.
첫째로 열 둘의 의미입니다. 마태오 복음을 보면 이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을 먼저 부르셨습니다. 어부들이었던 이들에게 “사람낚는 어부로 만들겠다”하시며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포함해서 열 둘을 뽑으십니다. 요한 복음을 뺀 세 복음서와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의 이름이 나와 있는데 모두가 열 둘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난 유다 이스카리옷의 자리를 마티아가 채웁니다. 열 둘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시고 계획하신 숫자이고 이를 제자들이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왜 열 둘에 의미를 부여하셨을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열 둘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상징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온 세상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뽑으심으로써 새로운 이스라엘이요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려고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열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원하신 교회의 모습이요 또한 예수님께 불린 제자로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열 두 명의 면면을 살펴보면 각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직업으로는 어부도 있고 세금을 거두는 세리도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로마에 적대적인 열혈당원도 있고 로마에 친화적인 세리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따른 사람도 있지만, 예수님을 단돈 몇 푼에 팔아 넘긴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모으시고자 하셨습니다. 다양한 직업과 다양한 정치적 성향, 다양한 사람을 모아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를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 역시 다양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나이도 직업도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정치적 성향도 다양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를 불러 주신 분은 주님이시고, 주님이 우리의 다양성을 훼손하지 않고서 오히려 그 다양성을 통해서 일치를 이루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나와 다르다는 것이 우리의 일치를 방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 안에서 한 몸이고 하나입니다.
둘째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게 하셨습니다. 이 일들은 사실 주님께서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무엇보다 먼저 제자들에게 머물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보면, 제자들은 치유자가 되기 전에 치유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헛된 것을 쫓아가는 마음에서 해방시켜 주셨으며, 아프고 병든 마음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당신 곁에 가까이 불러 머물게 했습니다. 주님의 힘이 그들의 힘이 되고 주님의 마음이 그들의 마음이 되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 역시 주님 곁에서, 주님 가까이에서 우리의 마음이 치유되고 온갖 나쁜 마음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행하신 일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루어진 일들을 세상 속에서 행하도록 명하십니다. 우리가 받은 평화와 위로를, 우리가 얻은 용서와 치유가 온 세상 모든 사람들과 만물들에게 베풀라는 명령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부르시고 또 그들을 파견하십니다. 열 두 제자는 바로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이자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가 각자 다른 사람이지만 서로가 이해하며 하나가되도록 주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모두 주님 안에서 평화와 위로를 얻고 그것을 세상 속에 전하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오늘, 온 세상 모든 만물이 주님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주님 안에서 평화를 얻고 주님을 통해 용기를 얻기를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화해와 일치
마태오 18,19-22/ 2023. 6. 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오늘은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73년째 되는 날입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서,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불신과 미움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았고, 또 많은 이들이 고향을 떠나고, 가족과 헤어지며, 전쟁의 공포가 트라우마로 남아있습니다. 바로 이 날 한국천주교회는 이러한 미움과 공포, 불신과 아픔의 트라우마를 사랑과 용서로 승화시키도록 특별히 기도합니다. 따라서 오늘 교회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에, 미사 독서와 복음은 참다운 용서와 화해에 대해 묵상하도록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묵상할 것은 용서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우리 자신들에게 잘못한 사람을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일흔일곱 번은 실상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과는 달리 실제로 우리 나약한 인간에게 용서는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내 마음 편하기 위해서라도 용서하고 싶지만, 용서는 참으로 힘든 일이고,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도움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용서에 대해 가르치기 전에, 기도에 대해 먼저 가르치는 것입니다. 정말로 마음을 모아 주님께 기도할 때에, 주님의 힘을 받아야만이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참으로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우리가 용서에 대해 묵상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늘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하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내 자신이 용서의 주체, 즉 용서를 베풀어야 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나에게 잘못한 그 사람,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그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우리 고민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 우리가 용서받은 것처럼 서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이미 누군가에게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실상 우리 모두는 누구나 용서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내 부모님께 용서받으며 살아왔고, 내 배우자와 가족들에게 용서받으며 살아갑니다.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약성경의 시편이,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리이까”하고 노래하듯, 주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따지고 든다면, 주님 앞에 온전히 서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우리의 이웃에게 그리고 하느님께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인생 안에서도 온갖 전쟁을 체험합니다.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우리는 이웃과 전쟁할 뿐 아니라 나 자신과도 전쟁을 합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오롯이 내가 다 받아 안고 살아갑니다. 이런 마음으로 사는 건 사실 사는 게 아닙니다. 용서하고 화해하고 평화로이 살아가는게 진짜 사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하느님께 용서받고 사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기도하며 이웃과 화해할 수 있기를 빕니다. 오늘 하느님의 용서와 위로, 주님의 평화와 사랑이 우리 신자 모두의 마음 안에서 자라나기를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교황주일, 베드로 사도의 직무 묵상
지난 주에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지냈고, 그날과 가장 가까운 주일인 오늘 교회는 교황주일로 보냅니다. 오늘 교회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과 교회를 위해 특별히 기도합니다. 오늘 교회의 최고 목자인 교황님과 그 직무에 대해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우리는 2주 전에 열두 사도들을 뽑으시는 대목의 마태오 복음을 읽고 묵상했습니다. 그 때의 묵상을 잠시 되살리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뽑으시며 그들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열두 사도를 통하여 교회를 건설하기를 의도하셨던 것입니다. 이를 사도행전에서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베드로 사도가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며 마티아 사도를 뽑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 받게 해 주십시오(사도 1, 24-25).” 베드로 사도와 다른 사도들은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의 자리에 마티아를 뽑아 유다의 직무를 계승하고 열두 사도의 자리를 채우게 했습니다. 열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며, 온 세상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열두 사도를 통하여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할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제일 앞자리에 베드로를 세우셨습니다.
또한 마태오 복음을 보면, 베드로는 가장 먼저 예수님께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신앙고백했던 사도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사람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복음에서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번에 걸쳐서 “내 양을 돌보아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사도들의 으뜸으로 삼으셨습니다. 사도들 가운데 으뜸이라는 이 특별한 지위는 초대 교회 안에서도 명백히 확인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유다인이 아닌 사람이 세례를 받을 때, 유다인의 관습을 따라야 하는지 아니면 따르지 않아도 되는지에 대해 논쟁이 일어납니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를 예루살렘의 베드로 사도에게 파견하여 이 문제를 논의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느님의 구원은 유다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 민족에게 주어지고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 것이라는 취지의 연설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에 사도들이 모여 회의를 할 때에도 베드로 사도의 특별한 지위를 모두가 존중하였습니다.
이후에 베드로 사도는 당시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에서 하느님 말씀을 전하다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다른 지역의 교회들은 로마 주교의 으뜸의 지위를 존중하였고, 자기 지역 교회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로마 주교에게 의사를 타진해 왔습니다. 로마 교회의 주교의 권위는 바로 사도 베드로의 직무에서 나오는 권위였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사도들 가운데 으뜸이었듯이,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로마 주교가 다른 모든 주교들 가운데 으뜸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지역의 교회가 로마 교회와 일치하여 있다는 것은 교회 전체와 일치해 있다는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로마의 주교인 교황은 전 세계 가톨릭 신자의 일치의 상징이며, 신앙의 스승입니다.
한 때, 중세의 어느 시기에 교황의 권력이 세속을 압도했을 때, 교황이 자신의 베드로 직무보다는 세속적 이익을 탐하며 살기도 했습니다. 교황과 교회가 부패하고 무너지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가 세번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충실히 주님을 따랐듯이 오늘의 교회는 예전의 잘못에서 벗어나 충실히 신앙을 전파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역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살아가며, 교회에 대해 실망할 수도 있고, 교회의 약함과 결점들을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번이나 배반했던 사람입니다. 약점과 결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베드로의 약점과 결점은 오늘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베드로의 약점과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직무는 소중한 것이며, 우리들의 약점과 결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일치를 이룰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서로의 약점과 결점을 보완하고, 서로 사랑하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를 비판하기 보다는 교회를 더 사랑할 수 있도록, 교황에서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사도적 직무를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더욱 거룩해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이런 우리의 마음과 기도를 모아,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철부지에게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내시니
마태오 11, 25-30/ 2023. 7. 9. 연중 제14주일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가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말씀으로 당신의 공적 생활을 시작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구약성경의 영향을 받은 단어입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면서, 예수님은 지상 천국을 건설하거나 천년왕국을 세우시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 나라를 하느님의 구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이 율법 속에 감추어진 것도 아니고, 죽어서야 갈 수 있는 곳도 아니며, 머나먼 미래 속에 있는 것도 아님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구원은 예수님과 더불어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시작된 현실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고,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음을 당신의 기적으로 보여주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은 기적 그 자체보다는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알리는 상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 하느님의 능력과 권능이 기적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열번에 걸쳐 나병 환자를 고치시고, 호수의 풍랑을 가라앉히시며, 마귀를 쫓아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는 등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마음이 완고하여 자기 생각대로만 살고, 자기 살던대로만 살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지혜와 슬기를 가졌다고 여겨지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순박하고 가난하며 욕심없는 이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받아들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신비는 철부지들에게, 철부지와 같은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신비입니다. 복음서가 표현하는 철부지, 어린 아이, 가난한 사람은 철이 안든 사람, 나이 어린 사람,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느님말고는 아무것에도 의지할 수도 없고, 의지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바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알고 깨닫게 되는 것은 세상의 지식과 지혜와는 다릅니다. 세상의 지식과 지혜는 쉽사리 권력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근대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은 힘이다”하고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그런 지혜가 아니며, 오로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이들에게만 드러나는 신비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대한 지혜는 권력이 아니라 참된 안식을 가져다 줍니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평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샘솟는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기적을 통해서 하느님의 신비를 보고 듣고 알며 깨달은 사람은 새로운 기쁨과 평화와 위안을 얻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철부지요 어린 아이이며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오늘 주님의 말씀 새겨 들으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마태오 13, 1-23/ 연중 제15주일(농민주일)
오늘 우리가 함께 들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이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성장하고 열매 맺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 또는 신앙을 씨앗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하느님 말씀을 뿌려놓으시고 신앙을 뿌려놓으십니다. 그러나 씨앗으로 뿌려놓으십니다. 씨앗은 결과물이 아닙니다. 씨앗이 곧바로 열매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씨앗이 의미하는 것은 시간을 두고 자라나서 열매가 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필요하고 과정이 필요합니다.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은 단지 시간만 채워서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햇볕도 받아야 하고, 때로는 어둠 속을 홀로 지내기도 해야 하며, 또 어떤 경우에는 찬바람과 맞서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씨앗은 싹을 틔우고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습니다. 신앙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신앙의 씨앗을 뿌려주셨지만, 신앙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시간도 필요하고 과정도 필요합니다. 예비자 교리를 6개월이나 하고 나서 세례를 주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나치게 결과에 집착하면서 과정을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음이 빠른 시간 안에 어떤 결과물을 가져다주거나, 기도가 하루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라서는 안됩니다. 하느님 말씀은 우리 안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 안에서 키워나가기 위해서, 신앙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좋은 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시며,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한 사람에게 하느님 말씀은 오래 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쉽게 타협하는 사람은 하느님 말씀의 숨을 막아놓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이나 좋은 땅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의 상태를 뜻할 수도 있고, 또는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단계나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길가는 우리 영혼의 첫 단계를 뜻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지긋하게 머무르지 못하여 온갖 잡념과 생각들이 하느님 말씀이 영혼 안에 스며드는 것을 방해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바위틈과도 같아서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끈기가 없어서 말씀이 영혼 깊은 곳까지 이르지 못하기도 합니다. 가시덤불은 우리의 온갖 어려움과 상처를 상징합니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인생의 온갖 어려움과 시련이 하느님 말씀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합니다. 고통과 절망 앞에서 우리의 영혼이 참고 기다리지 못하면 하느님 말씀은 쉽게 숨이 막혀 버립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떨어진 말씀은 크고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처음부터 좋은 땅은 없고, 처음부터 좋은 열매를 맺을 씨앗도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길과 바위틈의 단계를 이겨내고, 또 가시덤불의 시련을 거치면, 좋은 땅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우리에게 씨앗으로 주어집니다. 처음부터 열매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씨앗을 열매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씨앗을 잘 성장시킬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의 양식을 주시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가라지와 겨자씨가 의미하는 것들
마태오 13, 24-43/ 2023. 7. 23. 연중 제16주일
마태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시며 당신의 공적 생활을 시작하십니다. 하늘나라란 곧 하느님의 구원을 뜻하며, 하느님의 구원이 우리 가까이에 있음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가 어떤 것인지 당신의 행동과 말씀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의 기적들이 바로 당신 행동으로 하늘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늘나라란 아픈 이들이 치유되고, 악령에 덮힌 사람이 평화를 얻으며, 하느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 가득차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당신 행동으로, 당신의 기적으로 하느님의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으로 하느님의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밝혀주십니다. 먼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하느님이 씨를 뿌리시지만, 밭에는 좋은 씨만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밭에는 밀도 자라지만 가라지도 자랍니다. 그러나 씨뿌리는 사람은 당장 가라지를 뽑아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라지를 뽑다가 밀알도 뽑힐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를 묵상하다 보면, 하느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장 가라지를 뽑아버리지 않고 끝까지 기다십니다. 하느님은 기다리고, 기다리며, 또 기다리는 분입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는 밀이기도 하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가라지 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우리가 하나의 밀알이 될 때까지 끝까지 기다리십니다. 루카 복음의 ‘탕자의 비유’에서도 아버지는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작은 아들을 끝까지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천년도 당신 눈에는 하루와 같으시니, 우리의 천년이라도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두번째로 주님은 겨자씨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 작지만, 그것이 자라면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자랍니다. 이 비유 역시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구원과 생명이 어떤 것인지 밝혀줍니다. 하느님은 우리 마음 안에 작은 씨앗 하나 뿌리셨습니다. 그 씨앗은 서서히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되고 큰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기다리시는 분이듯이, 우리 역시 하느님의 씨앗이 우리 자신 안에서 성장하도록 기다리고 견뎌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크고 좋은 열매를 한 순간에 눈깜짝할 새에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것을 우리가 성장시켜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구원과 생명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 생명의 씨앗을 뿌려 놓으셨고, 그것이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더 많이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라지와 같은 것이 우리의 성장을 방해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내가 가라지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정말 좋은 하나의 밀알로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이제 주님께서 주신 것에 우리가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더 많이 하느님을 닮아야 하고, 더 많이 성장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를 더 많이 성장시켜 주시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솔로몬이 듣는 마음을 청하다
1열왕 3,5-12/ 2023. 7. 30. 연중 제17주일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솔로몬 임금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느님은 솔로몬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묻습니다. 하느님이 나에게 이렇게 물으신다면 나는 무엇을 청할까 생각해보며, 오늘 솔로몬의 대답에 대해 함께 묵상하도록 합시다.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은 블레셋 족의 침략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첫 임금으로 오릅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고, 하느님과의 계약의 상징인 십계명을 넣은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고 그곳에 계약의 궤를 모십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과 솔로몬 임금 시대는 가장 번성한 시기였고, 특히 솔로몬 시대는 더욱 더 번성한 시기였습니다.
특별히 솔로몬 임금은 지혜의 상징으로 유명합니다.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듯이, 두 여인이 한 아기를 데려와 서로 자기 아이라고 우기는 일이 있었습니다. 솔로몬 임금은 그 아기를 칼로 베어 두 동강을 내어 절반씩 나누어 주라고 시킵니다. 한 여인은 그 아기의 절반이라고 가져야겠다고 말하고, 한 여인은 울며 그 아이를 살려달라고 말합니다. 솔로몬은 그 아기를 살려달라고 말한 여인 이야말로 그 아이의 어머니라고 판결을 내립니다. 이 판결은 이스라엘 전체에 퍼져 나갔고, 사람들은 솔로몬 임금의 지혜와 공정함을 길이 길이 칭송했습니다. 또한 솔로몬은 구약성경의 “코헬렛,” 예전에 우리가 전도서라고 불렀던 코헬렛을 썼다고 여겨질만큼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더 나가서 솔로몬의 지혜는 비단 구약성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의 쿠란에도 솔로몬은 지혜로운 왕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솔로몬 임금은 기브온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고, 꿈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은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솔로몬은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자신을 위해 장수나 부를 청하지도 않고, 원수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았으니,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솔로몬 임금의 지혜와 분별력은 하느님이 주신 은총이요 선물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솔로몬의 청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듣는 마음”을 달라고 하느님께 청했습니다. 참으로 지혜와 분별력의 시작이자 뿌리는 듣는 마음, 들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참으로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 외부에서 울리는 공기의 진동을 인지하는 것을 듣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듣는 마음이란, 말하는 이를 깊이 이해하고, 그의 마음에 공감하며, 그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내와 수고도 필요하고, 열린 마음도 필요합니다. 이해하고 공감하며 아픔을 나누는 마음이야말로 참으로 “듣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야말로 인간 관계를 포함한 모든 관계의 시작입니다. 이런 마음이야말로 지혜와 분별력의 뿌리입니다. 더 나아가서 “들을 수 있는 마음”이야말로 신앙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 17)하고 가르칩니다. 참으로 듣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미사 독서에서 “무엇을 바라느냐?”하신 하느님의 물음에 솔로몬 임금은 “듣는 마음”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오늘밤 꿈에 하느님이 똑 같은 질문을 하신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달라고 청할까요? 오늘 독서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거룩한 변모의 의미: 용기, 희망, 위로
마태오 17, 1-9/ 2023. 8. 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이고, 오늘 미사의 복음 역시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몇몇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으로 오르시어, 당신의 거룩하고도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산 위에서의 예수님 모습은 영락없이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영광 중에 빛나는 얼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계신 모습, 그리고 구름 속에서 울려퍼지는 아버지 하느님의 음성, 이 모두가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과 같은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고, 이 모습이야말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주님의 거룩한 변모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께서 언제 그리고 왜 당신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셨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언제 거룩하게 변하셨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주님 공생활의 시기들을 살펴봐야 합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활동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갈릴래아에서의 복음 선포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까이에 다가왔다고 선포하시며, 많은 이들을 치유해 주시며 하느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기적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두번째 부분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를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중에 있었던 일들입니다. 이 여정 중에 예수님께서는 세 차례에 걸쳐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이 두번째 시기는 당신 수난과 죽음에 앞서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훈련시킨 시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부분은 예루살렘에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십니다. 제자들은 이전에 예수님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온전한 신앙을 가지지 않았지만,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나서야 주님을 온전히 이해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또한 묵상하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예수님의 활동 두 번째 시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제자들이 당신 수난을 잘 준비하도록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두번째로, 우리가 좀 더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할 점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당신의 수난과 제자들의 십자가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오늘 복음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나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시어, 당신의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고, 주님의 얼굴을 보는 것은 수난과 고통, 자기 십자가를 통해서 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부활의 모습을 앞당겨 보여주심으로써, 이제 곧 예루살렘에서 당신의 수난을 함께 겪을 제자들에게 위로를, 그리고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할 제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고자 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제2독서 베드로서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때 사도들의 강렬했던 하느님 체험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날이 밝아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의 삶이 여전히 어둠 속에 있고, 우리에게 밝은 날이 언제 올지 막막하더라도, 끝까지 희망과 믿음을 잃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견디고 이기라는 사도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사도들에게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사도들에게 주셨던 그 선물을 주십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오늘 우리들이 넘어지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시고, 오늘 우리가 겪는 시련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해주시며, 오늘 우리의 아픔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수난과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빛나는 얼굴을 만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와 위로를 주시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으시고
마태오 14, 22-33/ 2023. 8. 13. 연중 제19주일
오늘 복음은 호수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전반부가 갈릴래아 호수가에서 이루어졌으니, 예수님은 호수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호수 위를 걸으시는 모습을 오늘 복음인 마태오 복음만이 아니라 마르코 복음과 요한 복음 역시 전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오 복음의 다른 구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수를 건너가시다가 돌풍을 만났고, 두려움에 휩싸인 제자들 앞에서 파도와 바람을 잠잠케 하시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호수는 온갖 파도와 바람 속에 놓인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라면 우리는 파도와 바람을 이겨내고 우리의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합니다. 복음서는 바람과 파도를 제압하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이시고, 돌풍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 타고나는 배가 바로 교회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다른 복음들과는 달리 특별한 점이 있다면, 베드로 사도 역시 물 위를 걷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주님께,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오라고 하시니,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다가갑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과 전적인 신뢰로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걷습니다. 신앙은 우리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배에서 내려 위험천만한 물 위로 발을 옮길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신앙은 위험 한가운데서도 우리가 용기를 가지고 살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고, 물에 빠져 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대한 신앙과 의탁으로 어떤 위험과 시련도 감수할 용기를 가지지만, 또 다른 한편 세상과 인생에서 만나는 거센 바람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고, 그 두려움은 우리를 물 속에 빠뜨려 놓습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넘어지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요,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서 자주 겪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 사도 안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그리고 우리의 모습이 들어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처럼 믿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합니다. 모두가 그리스도를 주님이시라 고백하기도 하고, 배신하기도 합니다. 아주 강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아주 약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러하고, 우리 인생의 경험이 그러하듯, 베드로는 물 위를 걷기도 하고 물 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과 신뢰는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줍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우리를 물 속에 빠뜨립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물에 빠진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붙잡아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물 위를 걷기도 하지만, 우리가 물 속에 빠져들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고 우리를 붙잡아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넘어질 때 일으켜 주시고,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새로운 길을 알려주시는 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손을 붙잡아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만을 믿고 의탁할 때,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세상의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당신 손을 내밀어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예수님께 의탁하며 살아가도록 결심합시다. 그리고 언제나 손을 내밀어 주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오늘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마리아
루카 1, 39-56/ 2023. 8. 15. 성모 승천 대축일
가톨릭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만큼 사랑받고 공경받는 성인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성모님의 역할이나 위치로 볼 때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성인보다도,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보다도 더 많은 호칭을 성모 마리아가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 바다의 별, 상지의 옥좌 등 성경 안에서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서, 교회의 교리를 통해서, 또는 마리아께 기도하면서 받은 특별한 체험과 은총을 통해 마리아의 호칭이 나오게 됩니다. 마리아의 많은 호칭 가운데, “영원한 도움”이라는 호칭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 호칭은 원래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그려진 성모님의 이콘 성화의 이름입니다. 15세기에 로마의 상인에 의해 로마로 옮겨지게 되었고, 지금은 로마의 구속주 수도회의 성당인 성 알폰소 성당에 모셔져 있습니다. 이 성화를 가지고 온 상인은 죽기 전에 친구에게 이 성화를 주었고, 그 친구의 딸의 꿈 속에 성모님이 나타나셔서 “영원한 도움”이 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이후에 이 성화를 보며 기도하는 이들에게 성모님께서 나타나셔서 많은 도움과 은총을 베푸셨다고 합니다. 사실 복음서의 성모님의 모습에 대해서 묵상해 보면, 성경에 나오는 성모님께 이 호칭,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이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가장 큰 협력자요 도움이었고, 예수님에게도 큰 도움이 된 분이며, 예수님의 사도들에게도 도움이 되신 분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묵상하자면, 하느님께 대한 마리아의 도움없이는 주님의 탄생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가장 큰 순명과 결단으로 하느님의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도 성모님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과 제자들의 뒤바라지를 묵묵히 하셨습니다. 루가 복음사가는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의 여러 구절에서 성모님과 여러 여인이 예수님과 사도들을 뒷바라지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루카복음 8장을 보면 많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24장에서 예수님의 친지들과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여인들이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물론 이름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성모님께서 예수님과 사도들을 따라다니며 뒷바라지 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 성령께서 내려오실 때, 성모님이 사도들과 함께 기도에 전념했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교회의 출발에서부터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고 활동했으며, 사도들에게 도움을 주시는 분으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의 이러한 도움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주어집니다. 참으로 성모님은 “영원한 도움”이십니다.
오늘 교회는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하늘에 오르셨음을 경축하고 기념합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참다운 신앙인의 마지막 운명을 보여 줍니다. 모든 신앙인들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하느님 안에 하느님 곁에 머물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하느님께 가는 이 여정 가운데, 이미 하느님 곁에 계시는 성모님이 우리 신앙인에게 “영원한 도움”이 되어 주십니다. 세상의 온갖 유혹 중에도 성모님은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고, 어떤 시련과 고통 가운데에서 우리를 도와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가 마지막 날에 성모님처럼 하느님 곁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영원한 도움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걱정, 우리의 시련과 어려움 모두를 오늘 영원한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께 맡겨 드립니다. 성모님이 우리의 영원한 도움이십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가나안 여인의 믿음
마태오 15, 21-28/ 2023. 8. 20. 연중 제20주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이방인 여인과의 만남에 대해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으로 옮겨 가셨고, 거기서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을 만납니다. 이 여인은 간절하게 자기 딸을 구해달라고 청하지만, 예수님은 거부하십니다. 처음에는 여인의 호소를 듣고도 못들은 척하셨고, 나중에는 예수님 당신 사명이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위한 것이라 말씀하셨으며, 마지막으로는 이방인을 개에 비유하여 자녀들의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끈질기고도 간절한 간청에 예수님은 그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시고, 그 여인의 큰 믿음을 칭송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 두 가지 의문이 듭니다. 첫째는 왜 예수님은 평소의 예수님답지 않게 이방인을 “개”에 비유하며 이방인 여인의 청을 거절했을까, 둘째로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바꾼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먼저 오늘 예수님의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오늘 복음에 앞선 부분을 읽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지역에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지만, 유다인들과 계속적으로 충돌하였습니다. 특히 오늘 복음에 앞선 부분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식사 전에 손을 씻어야 하는 유다인의 전통과 관습을 어겨서 다시 한번 유다인과 충돌합니다. 예수님은 유다인들의 전통이 하느님의 계명을 가로막고 있다고 한탄하시며,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대목에 이어서, 오늘 복음은 곧바로 에수님께서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으로 가셨다고 전합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은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유대인들의 전통과 관습, 민족을 가르는 경계와 담에 부딪치셨는데, 바로 그러한 경계 너머에서 딸의 불행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한 여인의 간절한 마음과 전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의탁하는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 여인이 지역으로 보나, 민족으로 보나, 그리고 종교로 보나, 유다 민족의 경계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시키고 강조하십니다. 이러한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전통과 관습의 울타리 안에서 예수님을 거부하는 유다인과 예수님만을 믿고 간청하는 이방인 가운데 누가 참 신앙인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오늘 우리에게도 도전과 질문이 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우리가 이 이방인 여인처럼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으며 온전히 의탁하고 있는지 예수님은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태도와 마음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여인의 간절한 마음과 믿음을 보아야 합니다. 이방인 여인은 지역, 민족, 종교를 넘어서서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와 의탁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말고는 아무도 자기 딸을 고쳐줄 수 없다는 간절함에서 나오는 그녀의 청원을 예수님을 거부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녀의 간절하고도 끈질긴 청원은 우리가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간절하고도 끊임없는 기도야 말로 하느님의 마음을 바꾸고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합니다.
실상 유대인인지 아닌지, 이방인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것은 사람의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인간의 일을 넘어서고, 하느님의 마음은 인간의 생각을 넘어섭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간절한 마음과 온전한 의탁입니다. 오늘 우리의 간절한 마음과 주님께 대한 온전한 의탁으로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마태오 16,13-20/ 2023. 8. 27. 연중 제21주일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의 대답이자 신앙고백을 듣고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베드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시고, 베드로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천명하십니다. 물론 교회라는 인간 공동체가 역사 안에 등장한 것은 주님 부활과 승천 후 성령강림 이후의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주님의 계획과 의도 안에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에서 뚜렷이 드러나듯이, 교회는 주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이렇게 처음부터 사도들에게서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을 묵상하며, 교회의 네 가지 본질적 특성에 대해 함께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교회를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온다”고 고백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는 거룩합니다, 거룩한 교회입니다. 물론 교회라고 하는 인간의 공동체는 현실 사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고, 옳지 않은 판단도 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또한 교회는 인간들의 공동체이기에 현실적으로 인간적이고 사회적이며 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그렇게 인간적인 것으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하느님이시고 참으로 인간이시듯, 교회 역시 인간적인 동시에 영적인 하느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거룩합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의 지상의 교회, 인간의 공동체, 죄많은 공동체는 천상 교회인 영적인 교회를 향해 길을 걷는 순례자이자 나그네입니다. 교회 역시 하느님 앞에서 새롭게 태어나서 새롭게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교회, 주님의 몸인 교회는 언제나 거룩합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하나의 교회입니다. 물론 지금 여기서의 교회가 역사적으로 여러 개의 교회로 갈라져 있지만 교회는 본성상 하나이고, 주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라는 말은 교회가 보편적이라는 말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민족이나 언어나 인종에 따라 갈라질 수 없으며, 보편적인 교회입니다. 한국 교회는 한국인만으로 구성된 교회가 아니라 한국에 있는 가톨릭 교회이고, 당감성당은 당감동 지역에 있는 가톨릭 교회입니다.
마지막으로, 참다운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베드로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너는 바위이다. 이제 이 바위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를 바위 삼아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말씀이며, 동시에 베드로 사도가 고백한 신앙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것을 베드로 사도가 행한 것처럼,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사도들이 행한 것을 오늘 교회는 행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또한 사도들의 교회이고, 사도들의 증언과 전통, 사도들의 신앙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교회에 대해 실망하고 어떤 경우에는 교회 때문에 상처받기도 합니다. 교회는 현실 세계 안에서 살아가고 사람들의 공동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 안에 교회의 영적 본질, 주님의 교회가 살아있습니다. 주님의 의도와 지향을 잊지 않고 새롭게 되새길 때, 교회는 더욱 교회다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가 더욱 주님 교회답게 살 수 있도록, 더욱 더 하나되고, 더욱 더 거룩해지며, 더 보편적이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모습을 간직하도록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걸림돌
마태오 16, 21-27/ 2023. 9. 3. 연중 제22주일
지난 주일 복음을 잠시 되돌아보면,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묻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바위라는 뜻의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시고, 그 바위 위에 당신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수난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부활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그러자 아직 부활에 대해 깨닫지 못한 베드로 사도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거부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방금 전에 베드로에게 바위라고, 반석이라고, 그래서 주님께서 세울 교회의 디딤돌이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이 이제 베드로에게 ‘걸림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디딤돌이자 동시에 걸림돌, 이게 베드로 사도의 모습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엄청난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고통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시고자 했습니다. 효녀 심청이 아버지 심봉사의 눈을 뜨게하기 위해 바다 속에 자신을 던져 넣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죽음은 그냥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심청의 죽음이 아버지의 눈을 살린 것처럼, 주님의 죽음은 우리를 죄에서 구합니다, 우리를 구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우리도 주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하고, 우리가 짊어지는 그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가 자기 고통과 시련을 피하려고 하지만, 실상 그 시련과 고통 안에서 우리는 우리 십자가를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평화와 구원을 만납니다. 십자가를 피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평화와 구원을 만납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고통과 죽음의 신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탄이라고 걸림돌이라고 주님께 야단맞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실상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강한 듯하지만 약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서지만 동시에 세번이나 주님을 부인합니다. 넘어지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하며, 그리스도를 고백하기도 하며 배신하기도 합니다. 디딤돌이기도 하고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로 그 사람 베드로 위에 당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우리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리저리 흔들리고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바로 우리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거룩한 이들의 공동체이기도 하지만 죄인들의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베드로 사도와 같이 걸림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찌하든 십자가를 피해서 기쁨과 평화를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안에 기쁨과 평화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나약하지만 강해질 수 있도록, 우리가 걸림돌이지만 디딤돌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 지혜와 용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화해
마태오 18, 15-20/ 2023. 9. 10. 연중 제23주일
네 복음서를 읽어보면 모두가 비슷비슷하고 공통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복음서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이고, 또한 사도들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에서 나온 것이니 비슷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네 복음서는 각각의 특징도 있고 각각의 성격도 뚜렷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오 복음서는 교리교사의 복음서라고 일컬어 집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말하는 큰 주제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산상설교 또는 진복팔단에 해당하는 부분은 그리스도인이 참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오늘 복음은 공동체의 윤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나에게 잘못한 사람과 어떻게 화해하고 어떻게 용서할 것인지를 말합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 참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에게 잘못한 사람과 화해하고 그를 용서해주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용서하지 못해서 힘들어 하고, 화해하지 못해서 괴로워합니다. 그러면서도 용서와 화해를 쉽게 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누군가가 공동체의 형제 자매에게 잘못을 했으면, 가서 그와 만나 이야기해야 합니다.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단둘이 만나서 안되면, 두세 사람이 함께 가야 하고, 그것도 안되면 공동체 전체가 나서야 합니다. 화해하고 용서하기 위해 여러 단계를 거치고 여러 번의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잘못한 그 사람에게 다가가야 하고, 그를 만나야 하며, 그와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그 과정을 포기해 버립니다. 더구나 그와 만나 이야기하지 않고, 그 사람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버립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뒷담화를 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주님 말씀처럼, 단둘이 만나고, 그와 이야기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 사람과 화해하여, 우리가 그 형제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뒷담화는 그 사람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합니다. 이런 뜻에서 언젠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하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내가 용서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 벌받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도록 청해야 합니다.
우리 성당 공동체 역시 인간 관계에 문제가 있을 수 있고, 교우들 사이에 다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가르침대로 험담하거나 뒷담화보다는 서로 만나 대화하고 이해함으로써 화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화해와 용서, 우리의 기도와 공동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깨달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좋은 형제 자매가 될 수 있기를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선교사보다 먼저 오시는 하느님
2023. 9. 17.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오늘은 원래 연중 제25주일이지만, 한국교회는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대축일을 오늘로 옮겨서 지냅니다. 오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포함한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을 기억하고 공경하며,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하나에 대해 함께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사 없이 평신도가 자발적으로 시작한 교회입니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보면, 대개 선교사가 그 지역에 가서 군주와 귀족들에게 세례를 주고 점차로 그 영향이 아래로 퍼져갑니다. 독일 지역에는 성 보니파시오가, 아일랜드에는 성 파트리시오와 성 콜롬바노가 그러했습니다. 많은 경우 위에서 시작되어 아래로 내려오는 선교였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평신도로 시작하고,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선교였습니다. 지금부터 230여년 전에 중국에 사신으로 다니던 학자들이 천주교에 관한 서적을 만나게 됩니다. 그 중에는 이태리의 예수회 선교사였던 마태오 리치 신부의 <천주실의>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풀이하자면 하느님의 참다운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교, 도교의 개념을 빌어서 하느님과 천주교에 대해 설명한 책이었습니다. 이 책을 학자들이 돌려 읽고 토론하면서 한국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이승훈, 이벽, 정약전, 그리고 처음에는 이 모임에 참여하다가 나중에는 빠져버린 정약용 등입니다. 이들 중 이승훈이 가장 먼저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돌아옵니다. 이들이 책을 읽으며 함께 공부한 곳이 지금의 경기도 미리내로 알려져 있고,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와서 공동체를 형성한 곳이 바로 지금의 명동성당 자리입니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교회이며, 아래에서부터 시작된 교회입니다.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의 자발적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신앙의 가르침을 온전히 자신들의 삶으로 실천했습니다. 신분의 차별을 넘어 모두가 형제 자매로 불리웠으며, 남녀의 차별을 넘어 모두에게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당시에 제대로된 이름조차 없던 여성들에게, 비록 외국 이름으로 지어진 세례명이긴 하지만 모든 여성에게도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표면적으로 제사 문제였지만, 당시 정치적인 소용돌이에 휘말려 네 차례의 큰 박해를 당했고, 수많은 순교자가 희생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희생 위에 오늘의 한국천주교회가 서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선교사 없이, 그리고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헌신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곰곰히 묵상해보면, 하느님은 선교사보다 먼저 오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은 선교사가 이 땅을 밟기 전에 이미 우리 민족에게 오셨습니다. 우리 안에 하늘을 공경하고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진리를 찾고 정의를 실현할 마음을 이미 주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천주교가 시작할 때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마음 속에 누구보다도 먼저 와 계십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그 이전에는 누려보지 못한 물질적 풍요 속에 살아갑니다. 겉으로 누리는 물질적 풍요와는 달리 현대인의 내면은 그 이전 어느 때보다 외롭고 힘들게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외면하고 있지만, 많은 이들은 삶의 위안을 찾으려 하고 의지할 곳을 찾고 있습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이들은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하느님의 평화와 위로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실 선교사보다 그들에게 먼저 와 계십니다. 내가 그 이웃에게 다가서기 전에 이미 하느님은 그 이웃의 마음 속에 와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내 이웃의 마음 안에 하느님이 이미 와계시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미 와 계신 하느님을 드러내는 선교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한국 순교성인들의 대축일을 지내며, 우리 모두가 선조들을 본받아 자발적인 선교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이웃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갈망하는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평화이자 위로라는 사실을 이웃에게 전해주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모아, 오늘 이 미사를 봉헌합니다.
포도밭 주인과 일꾼들
마태오 20, 1-16/ 2023. 9. 24. 연중 제25주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이 비유를 들으면, 일반적인 우리의 상식이나 세상의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시작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이 비유는 하늘나라의 신비에 관한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어떤 것인지 알려주시고, 우리 인생에 대해 깊이 성찰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첫번째로 우리가 묵상해볼 점은 하느님은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은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포도밭 주인은 아침부터 일한 일꾼에게도 오후 늦게 일한 일꾼에게도 똑같이 그들이 먹고 살기에 필요한 만큼의 삯을 줍니다. 포도밭 주인이 주는 품삯이 노동의 대가라고 생각한다면 세상의 이치에도 맞지 않고 정의롭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품삯은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이해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은 나의 능력과 자질, 내가 이룬 성과와 결과를 넘어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능력이나 노력 때문에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당신의 크신 자비와 사랑으로 은총을 주십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노력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견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닫고 그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둘째로 오늘 비유는 인간의 모습, 즉 우리의 모습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게 합니다. 비유에서 아침부터 일한 일꾼들은 다른 이들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그들은 처음 포도밭에 불려올 때 주인과 약속한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늦게 온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들이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우리 삶에서 다른 이와 비교하는 것은 질투와 시기를 유발합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자기 삶의 풍요로움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게 합니다. 자기 삶의 기쁨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총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다른 이들과 비교하고, 그럼으로써 유혹에 넘어집니다. 우리가 잊지 않고 깨달아야 할 것은, 하느님은 우리 각자를 사랑하시고, 우리 각자에서 필요한 은총을 필요한 만큼 주신다는 것입니다. 실상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하고 자기 자신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에 참으로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삶의 많은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물질을 넘어서는 풍요로움과 기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더욱 겸손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참다운 행복을 찾고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에 감사드리고, 우리의 못난 모습을 성찰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하며, 우리 삶의 새로운 풍요로움과 참다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과 기도를 모아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두 아들의 비유
마태오 21, 28-32/ 2023. 10. 1. 연중 제26주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두 아들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는 주인의 말에, 큰 아들은 ‘싫다’고 대답하지만 막상 일하러 나갔고, 작은 아들은 ‘가겠다’고 했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이 둘 가운데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이는 누구인지 예수님은 질문하십니다. 이 비유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것 같지만 실상 실천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언뜻 보기에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 같지만 실상 하느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될 세리와 창녀와 같은 죄인들을 칭찬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뿐 아니라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창녀와 세리가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이라는 말씀을 자주 접합니다. 세리는 로마에 협력하여 세금을 거두는 사람들이고 창녀는 윤리적 타락을 대표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율법에 의해 공식적으로 죄인으로 취급되었고, 사회적 낙인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도 죄인으로 생각했고, 그러기에 언제나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청하고 또 청하는 이들이었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스스로 선택받은 사람들이고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들이 벌거벗은 모습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께서 죄인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묵상해보면, 결국 죄인은 특정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나 어떤 특정한 삶의 방식을 따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서에서 말하는 죄인은 자신의 부족함과 죄를 깨닫고 하느님의 크신 자비에 기대는 사람입니다. 결국 죄인은 하느님을 향해 서 있는 인간의 실존과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가난한 사람이 물질을 적게 소유하고 결핍 상태에 있는 사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듯, 복음이 말하는 죄인 역시 하느님 앞에 서있는 인간의 실존을 말하는 것이며 결국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허물과 약점을 인정하고 겸허하게 용서를 청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갑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신앙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이끌어 줍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응답은 자기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면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자기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면서 세례를 받았고, 자기 입으로 배우자를 평생 사랑하겠노라 고백하면서 혼인성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입으로 하는 고백은 시작입니다. 그 응답이 입술에서만 머문다면 완성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내 삶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뿐 아니라, 내 삶이 변화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내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은, 결국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우리의 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하느님 말고는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가난한 사람, 하느님 자비 말고는 어떤 것에도 기댈 데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실존과 한계과 부족함을 깨닫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이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신앙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더 나가서 오늘 복음은 하느님 앞에 서있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가 기대고 청하고 의지할 것이라고는 하느님뿐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을 모아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