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나의 혼인잔치

오늘은 연중 제2주일입니다. 성탄 시기가 끝나고, 두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동시에 오늘은 우리 본당이 축성되고 설립된 본당의 날이기도 합니다. 1978년 오늘 바뇌의 성모 마리아를 주보 성인으로 모시고 우리 당감성당이 축성된 날입니다. 지난 주 수요일 1 15일에 바뇌의 성모님을 기념하며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오늘 우리 본당의 축일을 맞아 우리 본당 모든 신자들의 가정에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길 함께 기도합니다. 동시에 2028년이면 우리 본당이 설립 50주년을 맞이합니다. 우리 본당 공동체 모두가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또한 외적으로도 더 나은 성전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카나에서 혼인잔치가 있었고, 성모님도 그 잔치에 참석하였고, 예수님 역시 제자들과 함께 초대받아 그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잔치에는 어련히 술이 빠질 수 없는데, 카나의 잔치에서는 그만 술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술이 떨어지면 잔치가 끝나기 마련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께 술이 없다고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지만, 물독의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주십니다.

인생의 고비 고비에서 맞는 축제와 잔치는 고달픈 삶 속에서도 인생의 기쁨과 희망을 드러냅니다. 혼인잔치에 예수님께서 초대받으시고 참석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도 우리 인생의 기쁨과 희망을 축복해 주심을 뜻합니다. 뿐만 아니라 물을 술로 변화시켜 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기쁨과 희망이 더욱 커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전해주듯 우리가 마련한 포도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 인생의 기쁨과 희망은 우리가 준비한 포도주로는 한계가 있음을 오늘 복음은 말해줍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포도주가 있어야만 우리의 잔치는 계속될 것이고, 우리 인생의 참다운 기쁨과 희망이 계속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기쁨이요 희망이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마련한 포도주로 우리 인생의 더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성모님의 역할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혼인잔치에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가장 먼저 느끼고 알아차립니다. 성모님은 잔치가 끝나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 알립니다. 그렇게 성모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에 동참합니다. 성모님 역시 우리가 기쁨과 희망 속에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슬픔과 아픔을 가장 먼저 느끼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부족함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시며, 그것을 예수님께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분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본당의 주보 성인이신 바뇌의 성모님께서 우리의 어려움과 아픔을 누구보다 먼저 아시고, 우리를 위해 주님께 기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마련한 포도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주님의 포도주로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포도주로 참된 기쁨을 누리도록 성모님께서는 주님께 청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슬픔과 아픔을 가장 먼저 아시는 성모님께 우리의 삶을 의지하며, 특별히 바뇌의 성모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님께 빌어 주시길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내려오시고 하느님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를 통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 선언되고 표명됩니다. 예수님의 세례로 이제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도 우리 위에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원래 세례는 유다교의 정결례 예식 중의 하나입니다. 세례라는 말은 물에 잠기다또는 물로 씻다는 뜻으로써 몸과 마음의 정화를 상징합니다. 복음서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식사 전에 손 씻는 예식을 하지 않았다고 시비를 거는 장면이 있는데, 이 손씻는 예식 역시 정결례 예식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례는 유다인 가운데 큰 죄를 지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벗기 위해서 또는 유다인이 아닌 사람이 유다교로 개종할 때 거행하는 예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거행한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날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하고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메시아의 오심을 회개하며 준비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를 통해 모든 죄를 씻고 새로운 메시아의 백성이 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면서 세례의 의미는 새로워집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세례 때에 예수님 위에 비둘기 모양으로 성령께서 내려오십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구약의 예언에 따라 메시아의 사명을 부여받았음이 드러납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이가 성령을 받는 성령 강림이 예고됩니다. 또한 예수님을 두고 하느님께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선언되고 표명됩니다. 동시에 이 말씀으로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의 사슬을 끊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고, 성령의 은총을 받으며,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1 코린 10,1-2)는 그리스도인의 세례를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 바다의 세례를 거쳐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세례성사는 우리 각자 개인에게 일어나는 출애굽 사건이고, 죄와 죽음을 건너가는 파스카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를 통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리를 괴롭히는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고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새로 시작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가 생길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세례성사로 우리가 새롭게 태어났으며, 하느님의 자녀로 우리 삶을 새로 시작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삶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더럽혀 지고, 세상 안에서 새로움이 무디어져 가기도 합니다. 세례성사의 은총을 매일 체험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고해성사와 견진성사가 있습니다. 고해성사는 우리를 세례성사의 은총으로 회복시킵니다. 부족함과 욕심으로 일그러진 우리 자신의 모습을 세례성사 때의 모습으로 회복켜주는 것이 바로 세례성사입니다. 견진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성령을 받습니다. 세례 때 우리에게 내려오신 성령께서 다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우리를 열어놓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다시 우리를 감싸고 우리의 삶을 지탱하게 하는 것이 바로 견진성사입니다.

오늘 주님의 세례 축일에 우리 자신이 세례 때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묵상하고 감사드리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말씀을 품은 어머니 마리아

2025년 새로운 한 해가 오늘 시작됩니다. 새로운 한 해의 첫날을 교회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경축합니다. 또한 매년 11일은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정한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성모님의 보호에 우리를 의탁하면서 그리고 우리 가정과 온 세상에 주님께서 평화를 주시도록 기도하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성모송을 바칠 때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여하며 성모님을 부릅니다. “천주의 성모라는 말은 곧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천주의 성모 또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신앙고백은 마리아가 누구인지에 대한 교리이기 보다는 실상 마리아가 낳은 아기가 누구인지에 대한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성탄 대축일이 1주일이 지난 후, 우리는 1주일 전에 태어난 아기,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기가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그분이 바로 참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1장을 보면, 하느님의 말씀이 한 처음에 있었고, 그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있었고, 그 말씀이 곧 하느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과 함께 있었던 하느님의 말씀이 마리아를 통해 사람이 되었고, 그 말씀은 곧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이 바로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그 분이 바로 참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고, 하느님은 우리 인생을 감싸고 있는 분이시며, 하느님이 바로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신앙고백은 우리가 어떻게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마리아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리아는 참으로 그리스도인의 모범이자 원형입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모범은 그녀의 어머니됨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어머니됨은 단순히 출산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삶의 자세와 태도로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목자들이 전한 말에 놀라워하며, 그 일들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히 되새깁니다. 루카 복음 전체를 통해, 마리아는 항상 하느님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합니다. 아기를 가질 것이라고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 잃었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되찾았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 이 모든 말씀들을 마리아는 마음 속에 간직했다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 태중에 품고 사는 어머니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어머니입니다. 실로 말씀을 품은 어머니의 모습은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자기가 품고 있는 그 말씀에 순명하여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의 위협을 이겨내고 불의와 싸우며, 어떤 그리스도인은 물질문명에 저항하여 가난을 선택하고, 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온 삶을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데 바칩니다. 말씀을 품고 사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힘이 내립니다. 말씀을 품고 사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용기와 평화, 하느님의 능력이 일어납니다.

오늘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에, 우리 모두가 하느님 말씀을 품고 사는 어머니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용기와 평화, 하느님의 능력과 축복이 되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맞이하는 새로운 한 해가 하느님 말씀으로 새로워지고, 온 세상의 평화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과 기도를 모아,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지난해를 감사드리며 새해에 마리아와 함께

오늘은 2024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는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송년감사미사를 봉헌합니다.

오늘 송년감사미사를 봉헌하면서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로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에 대해 잠시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는 노벨상 수상 강연에서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이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말합니다. 저자의 이러한 질문과 문제의식은 그리스도교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제는 어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제는 언제나 오늘 안에 살아있고, 오늘은 여전히 내일 안에 살아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언제나 자기 민족의 과거 역사를 되돌아보며 하느님의 뜻을 찾아냈습니다. 또한 자기 민족의 오늘을 바라보며, 미래를 예언했습니다. 어제는 오늘 안에 살아 있고, 오늘은 내일 안에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과 살아있는 이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를 위해 도움을 준다는 것이 모든 성인의 통공이 말하는 바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과거와 역사의 결정체이며 동시에 다른 모든 이들의 도움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찰 없는 삶은 어리석은 삶이며, 감사하지 않는 삶은 교만의 삶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밤 우리는 송년감사 미사를 봉헌하며, 오늘까지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동시에 우리의 삶이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성취와 결과를 얻어야만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함께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이고 모든 이들의 도움입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는 송년감사 미사를 봉헌하면서 동시에 새해의 첫날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는 우리가 성모송을 바칠 때마다 외우는 구절입니다. 이 표현이 뜻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마리아가 천주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마리아에 대한 교리를 훨씬 넘어섭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교리와 전례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참으로 인간이시며 참으로 하느님이시라는 신앙고백입에 있습니다. 마리아는 참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어머니됨은 하느님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하는 데서 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목자들이 전한 말에 놀라워하며, 그 일들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히 되새깁니다. 비단 오늘 복음만이 아니라 루카 복음 전체를 통해, 마리아는 항상 하느님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합니다. 아기를 가질 것이라고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 잃었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되찾았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 이 모든 말씀들을 마리아는 마음 속에 간직했다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 태중에 품고 사는 어머니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어머니입니다. 마리아의 이런 모습은 그리스도교의 기도와 영성의 원형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넣고 되새겨 묵상하며, 그 묵상한 말씀에 순명하여 실천하는 것이 기도요 영성입니다.

오늘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에, 우리 모두가 하느님 말씀을 품고 사는 어머니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용기와 평화, 하느님의 능력과 축복이 되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맞이하는 새로운 한 해가 하느님 말씀으로 새로워지고, 온 세상의 평화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과 기도를 모아,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저는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주님의 성탄 대축일이 지나고 처음 맞이하는 주일을 교회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로 지냅니다. 모든 사람이 비슷비슷하듯이, 예수님 역시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서 양육받고 성장했습니다. 한 사람이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태어나서 1-2, 길게 잡아도 6-7년의 시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 시기 동안 아기는 엄마 품에서 사랑으로 느끼며, 최초의 성격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가정은 우리 모두에게도 그러하듯이, 이제 갓 태어난 예수님에게도 가장 중요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가정이 다 그렇듯이, 시련과 고통없는 가정 역시 없을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을 보면, 헤로데 임금은 유다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그 유다인의 왕을 없애기 위해 예루살렘 근방의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죽입니다. 주님의 천사는 요셉에게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명하고, 요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족을 이끌고 이집트로 피신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무 말없이 자신들에게 들이닥치는 온갖 어려움과 괴로움을 받아들입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과 마음을 보여줍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그들의 가정을 지키고 그들의 자녀를 지키기 위해 쏟아야 하는 땀과 눈물을 요셉과 마리아가 보여줍니다. 특별히 오늘 가정과 자녀를 지키기 위해 쏟는 세상 모든 아버지의 땀을 응원하고, 세상 모든 어머니의 눈물을 위로합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우리가 묵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오늘 복음에서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 예수님께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하고 말하자, 예수님은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양아버지 요셉이 아니라 성부 하느님께 속해 있음을 은연 중에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모든 자녀들은 부모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마찬가지로 자기 부모를 떠나 하느님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부모들이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나자렛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가진 자녀들입니다. 이 세상에 부모 없는 사람은 없으며, 자녀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부모에게 어떻게 대하며 살았으며, 지금 부모에게 어떻게 대하며 살고 있는지도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맞아 우리 본당 신자들과 모든 가정에 주님의 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도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의 기도와 보호가 있으시기를 빕니다. 시련과 고통 속에 있는 가정에도 주님께서 용기와 위로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우리들의 자녀들에게도 주님께서 그들의 인생을 이끌어 주시고, 그들의 삶을 감싸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 모든 가정을 위해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오늘은 성탄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들은 하느님의 말씀, 요한복음은 성탄의 의미에 대해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우리 가운데 오심을 뜻하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오늘 복음은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려줍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은 세상이 생기기 전에 계셨고, 실상은 세상은 하느님과 그분 말씀으로 나왔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세상 만물이 하느님과 그 말씀을 통해서 나왔으니, 바로 그분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줍니다. 세상을 비추는 그 빛이,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그 빛이 이제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생명을 당신 아들을 통해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고, 당신의 빛을 당신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동시에 오늘 말씀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도 알려줍니다. 세상 만물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듯이 인간 역시 하느님에게서 왔습니다. 인간은 하느님 생명을 나누어 받아 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인간은 하느님 생명의 빛을 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인간의 삶이 비루하고 허무하게 느껴질 때라도, 우리의 삶은 하느님 생명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우리의 삶이 부조리하고 세상이 악한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우리는 하느님의 빛에 비추어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하느님 생명이 숨쉬고 있으며, 인간 삶이 하느님의 빛으로 인도받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 아름다울 수 있고, 더 거룩해질 수 있으며,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하느님 빛이 있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을 때, 더 의미있고 더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음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니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존재는 더 빛나고 더 완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 생명의 빛이 이 세상에 왔습니다. 이 빛이 우리를 더욱 환하게 비추어 줍니다. 우리가 이 빛을 따라 살 때,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오신 빛,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 생명의 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줍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은 이제 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지만, 우리에게 오신 그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제 하느님 곁에 그리고 하느님 안에 있게 됩니다. 하느님 생명이 빛이 우리에게 비추입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은총으로 우리의 삶이 새로워집니다. 우리의 삶을 은총이 감싸고 있고,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십니다. 엄마의 사랑을 깨달은 아이와 깨닫지 못한 아이의 삶이 다를 수밖에 없듯이, 하느님의 은총을 깨달은 사람의 삶은 그렇지 못한 삶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삶은 새로운 의미와 가치로 가득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시련과 아픔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요 슬픔과 절망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심으로써 하느님 생명의 빛이 우리를 비추고 있으며,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삶 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신비입니다.

오늘 주님의 성탄 대축일에 우리 본당 모든 신자분들이, 그리고 오늘 세례를 받으시는 우리 예비신자들이 하느님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고 하느님 은총 안에서 살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오늘은 성탄 대축일입니다. 오늘밤 우리가 들은 하느님 말씀은 루카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탄생과 목자들이 주님 탄생을 알게된 경위에 대해서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로마 황제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예수님 탄생 시기의 로마 제국의 황제는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입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첫번째 황제이기도 합니다. 원래 로마는 오늘날의 국회와 비슷한 원로원이 권력을 가진 공화제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 원로원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리고 지중해 주변 지역의 온갖 내란과 전쟁을 평정함으로써 이른바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이룬 사람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비롯해서 중동 지역 역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파견한 로마 총독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제국에 반항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에게는 십자가형이라는 처형으로 지중해 세계를 제압했습니다. 로마의 평화라고 하지만, 실상 로마 제국의 눈으로 볼 때 그렇지, 실상은 군사력과 폭력으로 이루어 놓은 강요된 평화였습니다.

반면에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계획과 뜻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보여줍니다. 당시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서 보자면, 변방 가운데 변방에서, 온갖 힘센 제국들의 틈바구니에서 겨우 겨우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그리고 다윗 왕가의 자손이라고는 하지만 아이 낳을 방 하나 구하지 못한 가족들에게 하느님의 계획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새로난 아기는 포대기에 싸여 가축들의 여물통에 눕혀집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그리고 가장 연약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그 아기의 탄생의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이들은 밤새 들판에서 양떼를 지켜야했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오신 하느님을 알아보는 이들 역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천사는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을 찾지 않았고, 목자들에게만 구세주의 탄생 소식을 알립니다. 천사의 알림과 더불어 목자들은 영광의 빛을 보고, 하늘 군대의 찬양노래를 듣게 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이렇게 오늘 복음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하느님은 세상의 중심에서 모두가 우러러보는 가운데 오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가장 낮은 곳에, 가장 연약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풍요로운 삶이 있음을 가르쳐 주시고, 그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경제적 능력이나 군사적 권력에서 이룰 수 있는 로마의 평화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입니다. 주님의 평화는 힘으로 얻거나 힘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목자들과 같은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이렇듯 가장 낮고 초라한 구유 앞에서 또 가장 가난하고 작고 약한 아기 앞에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혀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더욱 낮아지고 가난해지도록, 그래서 가장 낮고 초라한 곳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오늘 주님의 성탄 대축일을 맞아, 우리의 마음이 목자들의 마음으로 채워지길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쁨과 희망이 구유에 잠든 아기의 꿈으로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더 강하게, 더 채워서, 더 편하게 살고자 했던 내 마음과 화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을 때, 우리는 가장 약한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만나고, 주님이 주시는 더욱 충만하고도 영원한 평화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밤 모든 신자들과 그 가정에 주님께서 주시는 참다운 평화가 충만하기를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대림 시기의 네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에 대해 전해줍니다.

엘리사벳은 젊어서도 아이가 없었고 이제는 늙어 자식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이를 가집니다. 그 아기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사회적으로 그리고 율법상 아이를 가져서는 안되는 여인이었습니다. 이 두 여인은 각자의 배 안에 아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출산을 도우려 먼 길을 찾아왔습니다.

두 어머니 모두 자신의 임신을 숨기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루카 복음서는 엘리사벳이 임신 후에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냈다고 말합니다. 마리아 역시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릴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두 어머니 모두 비슷한 처지에 있었으니, 서로의 처지를 서로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고,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가 자신들을 감싸고 있으며 하느님의 힘이 그들을 이끌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러기에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도 복되십니다하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지는 않지만, 엘리사벳의 인사에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뛴다고 화답합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두 어머니를 통해 서서히 드러나고, 하느님의 약속은 성취를 향해 서서히 전진하고 있음을 오늘 복음은 전해줍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표면적으로는 두 어머니의 만남을 전해주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두 여인의 아들들의 만남을 전해줍니다. 마리아의 태중의 아들을 본 엘리사벳의 태중 아이는 즐거워 뛰놀기 시작했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엘리사벳의 태중의 아들, 세례자 요한은 구약성경의 예언전통 전체를 대표합니다. 그는 광야에 살았으며, 주님 심판의 날을 선포했으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 예언자가 다시 왔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구약성경을 대표하는 요한이 신약성경을 대표하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즐거워 뛰놀기 시작합니다. 두 어머니의 만남을 통해 요한의 길이 예수님의 길로 이어지고 있고, 구약의 예언이 신약의 성취를 향해 전진합니다. 두 어머니의 만남은 구약과 신약의 만남을 상징하고 있고, 구약이 신약에서 비로소 이루어질 것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 두 어머니의 만남은 두 아들의 만남을 보여줍니다. 두 아들의 만남은 구약과 신약의 만남을 상징합니다. 이 만남은 이제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을 암시하고 상징합니다. 마리아 태중의 아들의 이름을 마태오 복음은 임마누엘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이제 곧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실현되고,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를 감싸게 될 것이며, 하느님의 구원이 우리의 인생을 이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만남은 믿는 이들에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신앙이 이 만남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엘리사벳이 외치며 말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주님의 오심을 이틀 앞둔 오늘, 우리가 굳건한 믿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대림시기의 세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주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에게 우리를 인도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시기에 앞서서 주님의 길을 닦은 예언자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살면서 기도하며 수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와 수행의 결과로 주님의 날이 다가왔음을 그리고 하느님이 보내시는 메시아가 곧 오실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요르단 강 인근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며 회개의 세례를 베풉니다. 세례자 요한이 가르치듯,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란 삶의 방향 전환을 뜻합니다. 그러나 막상 우리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어떻게 어디서부터 방향 전환을 해야 하는지 막막합니다.

이런 맥락 안에서 오늘 복음은 군중들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군중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요한은 두 가지 실천을 요청합니다. 첫째로 요한은 군중들에게 여벌의 옷과 음식을 가난한 사람과 나누라고 요청합니다. 두번째로는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말 것을, 그리고 군인들에게는 다른 이의 것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 것을 요청합니다. 한마디로 세례자 요한이 요청하는 회개란 자선을 베풀고 정의를 세우라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사실 자선과 정의는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의 요청이자 그리스도교 전통이 가르치는 바이기도 합니다.

자선은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가장 구체적인 형태입니다. 자선은 단순히 자신이 가진 것의 일부를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참다운 자선은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의 자리 그들의 입장에 함께 서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다운 자선은 사회적 연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자선은 자신의 소유를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선은 우리가 현세 사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어 줍니다. 더 나아가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실상 나만의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참으로 자선은 자선이라는 행위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가 자선의 의미를 더욱 묵상하면 할수록, 자선은 정의의 요청에 맞닿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거나 강탈하거나 갈취하는 마음으로 자선을 행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의 몫을 돌려주지 않는 정의란 거짓 정의에 불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선과 정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덕목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사랑의 두 얼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기 위해 회개를 요청합니다. 회개란 자선을 베고 정의를 세우는 일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한국교회는 대림 2주일을 인권주일 및 사회교리주간으로, 그리고 대림 3주일을 자선주일로 보냅니다. 자선을 베풀고 정의를 세우는 일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묵상하고 실천해야 하는 덕목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더 잘 이해하고 우리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주님께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성찰과 회개

오늘은 대림 제2주일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대림 시기에 우리 삶의 과제에 대해서 함께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두 개의 과제가 놓여있습니다. 첫째는 생존의 과제입니다. 먹고 살아야 하는 과제입니다. 둘째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의 과제입니다.

먼저 생존의 과제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사실 우리가 하는 거의 모든 일은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직장을 다니고 돈을 벌고, 자식을 낳고 가르치고 키우는 모든 것이 생존을 위한 일에 들어갑니다. 생존을 위해 우리는 더럽고 치사한 일도 온갖 수모도 견디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있어도 하는 수 없이 하는가 하면, 양심이나 인간적 도리 또는 체면을 일정 부분 포기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게 다 생존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존재는 생존만으로는 만족도 행복도 느끼지 못합니다. 뭔가 부족하다고 여깁니다. 실상 동물과 인간이 다른 점이 바로 이점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삶의 또다른 과제는 의미 있는 삶 그리고 가치 있는 삶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당위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삶을 원하고 추구합니다. 인간의 존재가 그런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신앙적으로 표현해 보자면,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는 생존의 문제를 넘어서서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본성이 자리잡고 있고, 이는 결국 인간 존재가 하느님을 향해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은 실상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하느님을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기도 하고, 이런 저런 봉사를 하기도 하며, 명상과 기도의 삶을 살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일은 생존의 과제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이런 것을 합니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가장 근원과 핵심은 바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참다운 자기 자신을 찾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장 좋고 아름다운 모습, 참다운 자기 자신을 찾으려는 노력입니다. 그것을 찾을 때, 우리의 인생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으로 변하고, 우리 자신은 참으로 행복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찾는 여러 힘과 방법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힘은 성찰의 힘입니다.

성찰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능력입니다. 자신의 맨 얼굴을 보는 용기입니다. 성찰은 쉽게 말하자면 거울을 보는 능력입니다. 거울을 보아야 자기 얼굴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거울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입니다. 인간과 가장 닮은 침팬지는 학습을 통해 거울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만, 인간만이 거울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자기를 되돌아볼 수 있을 때, 자기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을 가장 잘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성찰하는 힘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고, 인간이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수 있도록 도와주는 힘입니다.

오늘 대림 제2주일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를 촉구하는 장면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성찰을 신앙의 언어로 바꾸어 표현하자면, 회개입니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 힘이며, 우리 자신을 참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야 말로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오시도록 기다리고 준비하는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성찰과 회개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힘입니다. 성찰과 회개가 우리의 삶을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인도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

오늘은 대림 제1주일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4주간 동안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며 기다립니다. 오늘 대림시기를 시작하며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점은, 무엇보다 먼저 성탄은 달력에 나와있는 12 25, 단순히 2000년 전에 탄생하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탄은 달력 위의 그날 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가 대림시기 동안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은 바로 달력 위의 그 날짜가 아니라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입니다.

대림시기 동안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오신 그 주님을 기다리고 준비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주님은 과거의 주님만은 아닙니다. 주님은 미래에 오실 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림시기는 미래에 오실 주님, 우리 각자의 삶의 마지막 날에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은 과거에 오신 분만도 아니고 미래에 오실 분만도 아닙니다. 주님은 과거의 주님이시고 미래의 주님이시며, 동시에 지금 현재의 주님입니다. 대림 시기에 우리가 기다리고 준비할 가장 중요한 점은 지금 현재 여기에서 우리에게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대림 제1주일의 복음은 미래에 오실 주님에 대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의 자연적이고 우주적 재앙에 대해 예고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은,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하는 가운데에서도 주님께서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도, 우리의 모든 희망이 붕괴되는 것 같아도, 우리 삶의 모든 의미가 무너지는 것만 같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모든 절망과 두려움을 짓밟고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 속에 빠져 지내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까지 늘 깨어 기도하여라는 말씀입니다.

깨어 있음은 단순히 잠들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언제나 기억하고 생각하고 의식하고 있을 때, ‘깨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림 시기 동안 우리에게 오시는 가장 첫번째 준비는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냥 시간을 보내고 생각 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나의 가장 깊은 갈망과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기다리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기도하는 삶이 주님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중요한 태도입니다. 기도의 핵심은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이고 성령께서 나를 어디로 이끌고 가시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깨어 기도할 때, 과거에 오신 주님이 그리고 미래에 오실 주님이 현재 나에게 오시는 주님이 됩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을 깨달을 때가 옵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 삶의 온갖 어려움과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절망과 슬픔 속에 있는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며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깨어 기도할 때, 주님께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오시게 됩니다. 그때가 바로 우리들의 성탄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오시길 늘 깨어 기도하며, 오늘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오늘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교회의 전례로 보면, 오늘은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이며 다음 주부터는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합니다. 새로운 한 해는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대림시기로 시작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기를 기다리며 준비하기 전에, 오늘 우리는 주님이 누구이신지 어떤 분이신지 먼저 묵상하며 지냅니다.

구약성경의 사무엘기를 보면, 이스라엘의 판관이자 예언자인 사무엘에게 사람들이 찾아와 이스라엘의 임금을 세워달라고 청합니다. 사무엘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을 세우게 되면 임금이 백성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전쟁도 일으키고 강제 노역을 시킬 것이며 딸들을 데려다 하녀로 삼을 것이라 경고합니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임금을 원합니다. 임금이 있어야 주변 민족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으며, 번영과 부귀를 누릴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사무엘은 사울이라는 젊은이를 뽑아 도유하여 임금으로 축성합니다. 그러나 임금이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법을 지키고 하느님이 주신 권한만을 행사해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의 왕 가운데 우리가 기억하는 사람은 다윗과 솔로몬 정도에 불과합니다. 다윗은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왔고,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어 그 계약의 궤를 성전에 모십니다. 그 이후의 왕들은 다산과 풍요를 기대하여 우상숭배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고, 다툼과 분열 가운데 있었습니다. 결국은 이스라엘 전체가 바빌론 제국에 함락되어 다윗의 왕조는 끝나버립니다. 실패와 좌절 가운데 에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이 새로운 왕을 보내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새로운 왕은 부귀와 번영, 다산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왕이 아니라, 하느님의 참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분이리라 여겨졌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언자 이사야는 하느님이 보내 주시는 왕은 임금의 모습이 아니라 스스로 백성의 죄를 뒤집어쓰고 고난 받고 죽어가는 종의 모습으로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부귀와 번영을 가져다줄 왕의 모습과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의 왕은 구약성경 안에서 뿐 아니라, 신약성경 안에서도 서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빵의 기적 이후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자 했습니다. 백성들은 빵이 보여주는 풍요와 번영을 추구한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도 제자들은 예수님께 영광의 때에 자신들이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마실 잔을 마실 수 있느냐?”하고 되물으시며 거절하십니다. 신약성경에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귀와 영광의 하느님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어쩌면 그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왕이 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실 때, 빵과 권력과 명예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쳤습니다. 예수님은 빵과 권력과 명예를 이용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모든 이들이 빵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족쇄에서 자유롭게 해방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께서는 가장 약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가장 낮은 이들의 자리에, 가장 아픈 이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풍요가 아니라 하느님의 참다운 생명을 보여주셨고, 빵과 권력과 명예로 얻을 수 없는 참다운 행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참다운 자유를 얻고, 또 다른 행복을 맞보며, 하느님 앞에서 참다운 생명을 얻습니다. 주님이시야말로 온 누리의 임금이시요 참 생명을 주는 참다운 왕이십니다.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며, 주님만이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는 참다운 왕이심을 기억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오늘 우리가 함께 들은 하느님의 말씀은 마르코 복음 13장의 후반부입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 13장 전체를 함께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마르코 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다 허물어질 것이라고 예고하시면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가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마치도 장사꾼들과 강도들의 소굴로 변해버린 성전을 목격하시고는 그들을 다 쫓아 버리십니다. 이 모습을 본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는 이제 마지막 강을 지나버린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 건너편 올리브 산에서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장사꾼들의 소굴로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예루살렘 성전은 경건한 유다인들의 삶의 중심이요 신앙의 중심입니다. 그들에게 성전의 붕괴는 자신들의 삶과 신앙의 붕괴이고,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정체성이 허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시작으로, 전쟁과 기근이 발생할 것이며, 제자들에 대한 음모와 박해가 계속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큰 환란에 뒤이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성전의 붕괴, 전쟁과 음모, 박해와 기근과 같은 환란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라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온갖 환란과 재앙이 이 세상의 마지막이 아니라, 이런 환란과 재앙을 딛고 역사는 앞으로 나가고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뜻을 지닌 사람의 아들이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의인들을 모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온 세상의 의로운 사람들을 다시 모을 때까지 어떤 환란과 역경에도 굴하지 말고 견디어 내라는 말씀이요, 마지막 시간에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이 새롭게 드러날 것이라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 말씀의 핵심은 멸망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영광 속에 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온갖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더라도 그것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일깨워 줍니다. 지금의 아픔과 슬픔이 우리의 눈을 가리게 해서는 안됩니다. 성전의 붕괴와 전쟁, 온갖 음모와 환란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듯, 우리 인생의 어려움과 고통이 마지막 끝이 아닙니다.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고 역사는 진전하며, 이 모두가 주님께서 다시 오실 희망의 시간을 향해 서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참고 견디면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불러주시겠다는 희망의 시간을 예고하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주님 말씀은 우리 인생의 마지막 시간, 우리 삶과 인격의 궁극적인 완성에 대해 묵상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인생의 마지막 종착점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리고 그 종착점에서 우리 모두는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짐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창조된 모든 것이 소멸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인간이 자기 자신의 마지막 시간으로 걸어가는 것이 파멸과 멸망의 길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차고, 때가 되면 주님께서 권능과 영광으로 오셔서 우리를 불러주실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성전의 파괴, 온갖 재앙과 환란에서도 우리에게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인생의 온갖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길을 걷는 우리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는 말씀이며, 우리가 걷는 길의 마지막 종점이 주님의 만나는 곳이라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현재 삶이 우리의 눈을 가리지 않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첫째가는 계명

율법학자 한 명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질문합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이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먼저 예수님은 첫째 가는 계명을 구약성경의 신명기를 인용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 신명기에도 그대로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입니다. 마음과 목숨, 정신과 힘은 인간 존재의 전체를 뜻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신명기는 이 계명을 말하기 전에, “이스라엘아 들어라하고 먼저 말합니다. 오늘날에도 경건한 유다인들은 이스라엘아 들어라하며 시작하는 신명기의 이 계명을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로 바칩니다. 매일 두번씩 이 계명을 되뇌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계명을 인용하시며, 율법학자의 질문에 훌륭히 대답하십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은 율법학자의 질문에 충분히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굳이 레위기 19 18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덧붙이십니다. 사실 구약성경에서는 이 두 계명이 전혀 연결지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두 계명을 덧붙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두 계명을 덧붙이신 이유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람이 실상은 하나이고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나가 없으며 다른 하나를 이룰 수 없음을 간파하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사랑은 너무나 쉽게 독선과 독단, 아집으로 변해버립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 유럽에서 가톨릭을 믿는 나라와 개신교를 믿는 나라가 30년 동안 전쟁을 합니다. 물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유가 없지는 않지만, 표면적으로는 종교 전쟁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 사랑은 너무 쉽게 독선으로 변합니다. 또한 하느님 사랑은 너무 쉽게 자기 과시로 변하기도 합니다. 주위를 헤아리지 못하고 한 방향으로만 질주하다 보면 목표와 목적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사람을 헤아리지 못하면 하느님 사랑을 제대로 이루지 못합니다.

인간의 사랑 역시 쉽게 부패합니다. 사랑은 너무 쉽게 소유욕, 지배욕, 질투와 뒤섞이고 너무 쉽게 변해버립니다. 말은 사랑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자기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집착과 애착인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사랑을 자기 안에 가두어 놓으면 너무 쉽게 욕망으로 변해버립니다. 이웃사랑을 온전히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도 멀리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의 목적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굳이이웃사랑을 첨가함으로써,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적 관계를 분명히 깨닫도록 우리를 일깨워 주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통합을 우리는 요셉 성인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요셉 성인은 율법에 충실하고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마음과 목숨, 정신과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됩니다. 루카 복음을 보면, 요셉 성인은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조용히 파혼하기로 결심합니다. 요셉은 법대로, 율법대로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약혼녀 마리아를 최대한 배려하고 존중했다는 뜻입니다. 처녀 마리아가 율법에 의해 단죄 받지 않도록, 마리아의 인격과 체면이 손상 받지 않도록 배려했습니다. 그 결과로 마리아는 구세주를 낳게 되고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게 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두개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샘에서 나오는 두 개의 물줄기입니다. 이웃사랑 없는 하느님 사랑은 맹목적이고, 하느님 사랑 없는 이웃사랑은 부패합니다.

오늘 우리 역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마음과 목숨, 정신과 힘을 다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예리코 소경

복음서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면, 1부는 갈릴래아 호수가에서 있었던 일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으며, 2부는 예수님이 갈릴래아 호수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 중에 있었던 일을 전합니다. 그리고 제3부는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제2부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리코라는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소경과 예수님의 만남을 전해줍니다. 오늘 복음으로 마르코 복음의 제2부는 끝나고 제3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좀 더 깊이 묵상하기 위해서는 복음의 제2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 중에 있었던 일을 좀 더 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가에서의 복음선포를 중단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이 여정 중에 예수님은 세차례에 걸쳐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수난당하고 죽임을 당하실 것이며 부활하실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세차례의 수난 예고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받을 보상이나 영광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사실 첫번째 수난 예고 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반박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하시며 꾸짖으십니다. 두번째 수난 예고 직후에,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를 놓고 서로 다툽니다. 예수님은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수난 예고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청을 들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제자들은 영광의 날에 하나는 예수님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들의 청원에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하고 되묻습니다. 이렇게 보면 제자들은 세번에 걸친 수난 예고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에 대해 눈을 뜨지 못했으며, 예수님의 참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세번째 수난 예고에서 예수님의 질문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에 잠시 우리가 집중하고 머물러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번째 수난 예고에 곧바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당신 수난과 죽음의 장소에 예루살렘 직전에 계십니다. 그곳 예리코에서 소경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경에게 제자들에게 했던 똑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이 대답에 그 소경은 다시 볼 수 있기를 청합니다. 그 청원대로 그는 눈을 떴고, 곧바로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알아보자 마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여정에 동반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리코의 소경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리코 소경 가운데 참으로 예수님에 대해 눈을 뜨고,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고 본 사람은 누구인지 우리에게 묻습니다. 참으로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누구인지, 예수님을 참으로 따라나선 사람은 누구인지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복음은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이자 예리코 소경에게 하신 질문, 바로 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오늘 예수님의 이 질문에 우리 역시 예수님을 알 수 있게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도록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시어, 우리 가운데 활동하시는 주님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복음의 기쁨

오늘은 전교주일이고, 교회는 모든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미사를 봉헌합니다.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복음이 전해지고, 모든 이들이 복음을 기쁨을 누리도록 함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복음이라는 말 자체는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선포하셨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치유와 용서가 넘치고, 하느님의 생명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이 우리 가운데 있음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바로 복음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복음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기쁘고도 복된 소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복음을 기쁨으로 여기기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나치게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문화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문화는 인간의 기본 욕구를 외부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만 충족시키고자 합니다. 물론 인간의 기본적 필요는 채워져야 하지만, 문제는 인간의 욕망은 한계가 없다는 점입니다. 맛있는 음식도 그러하고, 재물도 마찬가지이며 성적인 욕망도 그러합니다. 이러한 욕망은 결핍이 충족되었다고 멈추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욕망은 한계를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즉각적이고 외부적이고 물질적인 문화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 안에서 서서히 그러나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기쁨을 쉽게 찾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겪고 있는 가장 큰 불행이자 위험입니다.

그럼에도, 복음은 기쁨입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들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실망과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기쁨이 끊임없이 샘솟게 됩니다. 이런 기쁨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고 또한 수행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이 사람을 사로잡으시고 그 사람 안에서 살아 계시며 일하신다는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인내와 수행이 필요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복음의 기쁨은 우리의 삶을 바꾸어 줍니다. 이제까지 살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고 체험하게 해줍니다. 복음의 기쁨은 삶을 새롭게 살 수 있게 해줍니다.

복음의 기쁨은 잠깐의 기쁨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세상에 실망하고 사람에 실망한 우리에게 희망이라는 새로운 힘을 줍니다. 인생에서 실패하거나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는 힘을 줍니다. 험한 세상을 나름의 방식대로 꿋꿋하게 살아갈 용기라는 힘을 줍니다.

복음의 기쁨을 체험한 이들은 세상에 자신이 체험한 기쁨을 선포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이들이 주님의 부활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언하고, 다락방에서 숨어있던 사도들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서 복음의 기쁨을 자기 목숨을 바쳐가며 전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하고 말합니다. 또한 오늘 독서에서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하고 외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의 삶을 바꾸어 주고, 우리의 삶에 힘을 더해 줍니다. 그래서 이 기쁨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오늘 전교주일에, 복음의 기쁨이 먼저 우리 모두의 마음에 가득해지기를 기도합시다. 또한 복음의 기쁨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전해지고, 모든 이들이 복음의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청년의 질문은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의 갈망에 말을 건넵니다. 우리는 먹고 자고 일하고, 또 아웅다웅 다투면서도 사랑하며,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렇게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상적 삶을 넘어서는 질문을 가집니다. 우리 삶의 참다운 가치와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인생의 참된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 삶을 에워싸고 있는 궁극적인 신비는 무엇인가? 이러한 우리 삶의 궁극적인 질문을 대변하여 오늘 복음의 청년이 주님께 질문합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계명과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이미 어릴 적부터 계명을 잘 지키며 살아왔다고 대답합니다. 계명과 율법을 잘 지키며 사는 삶은 그것 자체로 중요하고 훌륭한 삶이지만, 그것이 가지는 함정도 있고 위험도 있습니다. 계명과 율법은 인간 삶의 외적인 행동과 행위에 집중됩니다. 더구나 그것들은 많은 경우 부정적으로 표현됩니다. 살인해서는 안되고, 간음해서도 안되며, 도둑질해서도 안됩니다. 모두가 금지와 규제입니다. 그러나 살인하지 않았다고, 간음하지 않았다고 모두가 선하고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요청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요청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청년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재산을 팔아서 자선하라는 의미를 넘어서는 요청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서부터 참으로 자유로워지라는 요청입니다. 재산과 재물은 단순히 물질적인 의미를 넘어섭니다. 사람은 재산과 재물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자기 자신보다 재물과 재산을 더 앞세우고 더 사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을 떠나 재산에 얽매이고 집착하며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서 자유롭지 않으면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갈망에 제대로 응답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놀라며 말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제자들의 이 말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부족하고, 인생의 노력으로 이룬 재산도 포기해야 한다면, 과연 누가 구원받을 것인가?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가능하다입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을 채우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을 통해 이루고 쌓아올린 것으로 우리의 깊은 갈망을 채우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궁극적인 가치도, 우리 삶의 참다운 행복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존중받으며 살아가는 것 모두가 실상 하느님이 우리에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구하고자하는 영원한 생명, 제자들이 놀라 질문하던 구원, 인간이 쌓아올리고 이루어 놓은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탱하고 있고, 우리의 인생이 하느님의 자비로 채워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우리의 삶을 감싸 안아주시도록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손이 죄짓게 하면 손을 자르고, 발이 죄를 짓게 하면 발을 자를 것이며, 눈이 죄짓게 하면 눈을 빼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나치게 극단적인 말씀이며 곧이 곧대로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표현 자체에 사로잡히게 되면, 이 표현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잊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표현 뒤에 숨겨진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해보면, 주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나라가 얼마나 중요하고 귀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 삶의 중요한 일부를 희생하고 포기하더라도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단식하고 희생하며 절제하는 것도 사실은 우리 삶을 더 의미있고 가치있게 살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의 손과 발과 눈에 대해서 다시 성찰할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 몸은 이웃과 세상을 위해 일하는 도구가 될 수 있고, 하느님을 세상 속에서 드러내 보여주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경우에는 우리 몸은 자기 자신만의 이익과 탐욕을 추구하는 도구가 될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손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과 노동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손으로 만든 모든 것이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손으로 만든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손을 축복해 주시고, 우리 손이 만든 것을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손은 세상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는 탐욕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손은 이웃 사랑을 거부하고 뿌리치며 자기 자신의 것만 챙기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발은 우리 자신이 어디에 서있는지,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이 어떤 방향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발이 우리 삶의 방향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우리가 어디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지,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되돌아보고 성찰하지 않으면, 길을 잃고 헤매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내 마음과 내 손이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내가 서 있는 곳이 진흙탕 속에 있다면 우리의 좋은 마음이 드러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눈은 이웃과 세상과 관계를 가지는 첫번째 관문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해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것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눈은, 우리가 보는 것에서 탐욕의 시작이 되기도 하고, 다른 이들과 비교하고 시기하며 질투하는 마음을 낳게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몸은 이웃과 세상, 하느님을 위한 자리가 되기도 하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탐욕의 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의 손과 발, 눈을 다시 성찰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빈 손에 하느님을 담을 수 있기를, 우리의 발로 하느님을 향해 서있을 수 있기를, 그리고 우리의 눈이 사랑과 자비 가득한 시선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순교의 의미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어떤 면에서 순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000년 전 이스라엘의 변방에서 로마 제국으로 전파된 그리스도교는 엄청난 박해로 많은 이들이 순교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초대 교회의 거의 모든 교황들이 순교자였습니다. 그들은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각 민족들에게 전해질 때마다 박해와 순교는 뒤따랐습니다. 마찬가지로 200년 전 조선으로 전파된 그리스도교 역시 네 차례에 걸친 엄청난 박해가 있어서,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한국의 순교 성인들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순교란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순교한다는 말에는 박해와 핍박이 있었음을 전제합니다. 때로는 세상의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기존 질서와 이념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도전했기 때문에 박해가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의 방식은 언제나 세상의 삶의 방식과는 다른 것이었고, 그리스도인의 삶과 존재 자체는 언제나 세속의 지배자들에게는 위협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신앙인은 로마제국의 황제숭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200년 전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은 유교적 사회질서와 그 이념을 자신의 삶 안에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세상에 의문을 제기하고, 세상의 질서와 문화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제나 신앙의 도전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에 가장 큰 도전은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후로 가장 풍요롭게 살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몇 번째 손가락에 꼽힐 만큼 풍요롭게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돈이라면 모든 것을 사고 팔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돈으로 평가됩니다. 인간도 재산과 지위로 평가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결핍되고 고갈되어 갑니다. 마음과 영혼의 결핍과 고갈을 채우기 위해서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닷물을 계속 마신다고 갈증이 해소될 수 없듯이, 물질과 소비로 우리 영혼의 고독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물질적으로는 갈수록 풍요로워지지만, 우리의 영혼은 갈수록 고갈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인간은 물질로 온전히 채워질 수 없다고, 인간의 참다운 행복은 물질을 소유하는데 있지 않다고 복음은 가르칩니다. 우리의 신앙은, 인간은 재산과 사회적 지위로 평가받거나 판단받는 존재가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의 참다운 존엄과 행복은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존재임을 깨닫는 것에서 온다고 가르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목숨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예전보다 더 많은 도전과 유혹을 합니다. 순교의 본래 의미가 증언하고 증거하는 것이라면, 오늘 우리의 증언과 증거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삶의 방식, 우리의 신앙이 세상의 가치와 어떻게 다르고, 세상의 사람들에게 무엇을 증언하고 증거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오늘 우리 시대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증거할 것인지 묵상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네 개의 복음서 모두가 우리에게 증언하고 전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서의 근본적인 질문은 바로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질문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리고 나서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복음은 네 개 복음서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직접적으로 전해주고 있으니 복음서의 핵심 구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대답 이후로 예수님은 당신에 대해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리시고 동시에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이러한 어색한 상황은 예수님이 당신 자신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시는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가 다르다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주님이 걸으시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길과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길은 서로가 엇갈립니다.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구약성경에서부터 전해지는 메시아입니다. 사실 그리스도란 히브리말 메시아를 그리스말로 번역한 말입니다. 메시아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구세주 정도로 번역되지만, 엄격하게 말하자면 기름이 부어진 사람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기름이 부어진 사람은 예언자와 사제, 그리고 왕입니다. 그러나 주로 누군가 왕의 자리에 오를 때, 사제가 기름을 부어 그를 축성해 줍니다. “기름이 부어진 사람이란 주로 왕을 뜻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새로운 나라를 세워 자신들을 구해줄 다윗과 솔로몬과 같은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코 10, 36)하고 청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빵도 주고 자리도 주고 권력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길은 제자들이나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직전에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실 때, 빵과 명예와 권력의 힘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이 직감하신 그리스도의 길은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의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모든 사람을 살리는 메시아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시작으로, 예수님께서는 세 차례에 걸쳐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으로 우리가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우리 삶의 방식을 전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을 얻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하고,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으면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생명을 얻는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 사이의 긴장과 충돌은 예수님의 부활 전까지 계속됩니다. 제자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나서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온전히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떤지 스스로 물어봅니다. 내가 바라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예수님께서 걷고자 하신 그리스도의 길인지 성찰해 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다시 물어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 모두가 매일 매일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질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과연 나에게 누구이신지 다시 질문하고 묵상하면서,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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