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의 의미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고 성소주일입니다. 성소란 거룩한 부르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그리스도인의 사명, 이 모두가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여 사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성소주일을 맞이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함께 묵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로, 하느님은 우리 각자를 부르십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그 때 그 당시에는 느낄 수 없고 몰랐었지만 돌아다보니 그 때 하느님이 우리 자신을 이끌어 주셨음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실상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된 과정은 다양한 계기와 동기들의 결과이겠지만, 근본적으로 다양한 계기와 동기를 통해서 하느님이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내 삶을 계획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이 내 자신이라고 생각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나의 계획과 실행 너머에서 하느님의 부르심과 보살핌이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이런 저런 봉사를 하고, 이웃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우리 마음의 뒤에는 하느님이 부르심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치도 오늘 복음에서 양들이 아버지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잠깐 바오로 사도의 부르심에 대해서도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눈이 멀어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면서 주님의 자녀로 주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바오로는 자신을 신앙인으로 또 사도로 이끌어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과도 같이, 우리 자신이 신앙인이라는 사실,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 이 모두가 하느님의 부르심,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하느님의 은총 안에 살고 있습니다.

둘째로, 오늘 성소주일을 맞아 특별한 부르심에 대해서도 함께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신앙인으로 부르심 받고 사는 사람이지만,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나라의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수도자, 평생을 하느님 백성에 대한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제가 그들입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 역시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인 베네딕도와 프란치스코, 이냐시오가 이러한 특별한 부르심에 충실했던 분이었습니다. 이들의 삶이 교회를 쇄신하고 신앙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들의 삶과 기도의 모범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으며, 우리의 영혼을 아름답게 또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성소주일에 수도자와 사제들이 자신이 받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더욱 깊이 깨닫고 그 부르심에 더욱 충실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의 방식을 따르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더욱 많아지도록 함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소주일에 우리의 부르심에 대해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임을 깨닫고, 또한 사제와 수도자 역시 하느님의 부르심을 더욱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청원을 모아,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부활의 선물

부활대축일 이후 계속해서 주일미사와 평일미사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참으로 주님의 부활은 부활하신 그분을 만남으로써 이해되고 납득되는 체험의 사건이고, 믿음으로써 이해되는 신앙의 사건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오늘 복음을 비롯해서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에 관한 복음을 묵상해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엄청난 부활의 선물을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주신 선물, 오늘날 우리도 체험하는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 그 선물에 대해 오늘 잠시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첫째로,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선물은 평화입니다. 복음서에서 여러 차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며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주님의 이런 말씀과 인사는 부활 이후에만 나옵니다. 평화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사실 이러한 평화는 이미 주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 27-28). 주님께서 약속하신 이 평화가 주님의 부활로 성취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 존재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평화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가끔씩 기도할 때 이런 평화를 체험합니다. 어떤 감정이나 어떤 외부적인 감각도 이런 평화를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우리 존재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의 평화는 분명히 부활하신 그분의 선물입니다. 이런 평화는 절대적인 평화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평화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없애 주시고 용기를 가지게 하며 희망을 북돋아 줍니다. 주님의 평화는 제자들을 변하게 만들었고, 오늘 우리를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하고 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이 책으로, 말씀이 글자로 머물지 않습니다. 성경의 말씀과 글자는 성경을 읽는 사람과 함께 자라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체험이 오늘 우리가 그분을 체험하도록 인도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제자들의 용기가 우리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킵니다. 성경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실현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세번째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성체성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시고,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고, 제자들과 함께 빵을, 오늘 복음에서는 물고기를 잡수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빵은 제자들과 주님을 일치시켜 주시고, 제자들 서로를 결합시켜 주시며, 모든 제자들이 하나가 되도록 해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이 일치의 식탁에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이 식탁에서 우리는 주님과 하나되고, 사도들과 하나됩니다. 성체성사는 주님과 하나되고 사도들과 하나되는 놀라운 선물입니다. 성체성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놀라운 선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 부활의 은총을 우리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우리가 더욱 굳세어 지고, 주님께서 성경을 밝혀 주시어 성경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 당신 몸을 주시어 우리가 주님과 교회와 하나됩니다. 주님 부활의 선물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더욱 성장시키기를 청하며, 오늘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부활의 체험

예수님의 부활은 생물학적으로 또는 의학적으로 입증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은 깨달음의 사건이고 신앙의 사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의 부활을 깨닫고 믿게 되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깨닫고 믿게되는 것은 그것이 체험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분이 부활하실 것이라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게 된 것은,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곧 부활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체험은 몇몇 사람이 비밀스럽게 부활하신 분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은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졌고, 그들의 체험은 복음서에 남겨져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그리고 그 원초적 체험은 지금 여기에서도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부활의 체험을 불러일으킵니다. 작게는 우리들의 마음 안에서 주님 부활이 체험되는가 하면,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위대한 성인들의 체험을 통해 교회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부활은 체험으로 이해되고 깨달음으로 이어지며 신앙으로 전해지는 사건입니다. 지난 주 부활대축일 이후 우리는 복음서 안에서 계속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체험을 전해 듣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 부활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제자들의 체험을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장면을 묵상해보면 첫번째 성목요일 밤의 마지막 만찬이 우리 마음 안에 떠오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엠마오로 향해가던 제자들과 동행하십니다. 처음엔 몰랐지만, 제자들은 그분과의 식사 자리에서 그분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바로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체험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에서도 제자들은 티베리아스 호수가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 먹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첫번째 성목요일 밤 만찬의 식탁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성목요일밤의 만찬, 바로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체험하게 됩니다.

둘째로, 오늘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나타나셔서, 당신 손의 못자국을 보여주시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라고 하십니다. 그제서야 토마스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고백하며 부활하신 주님을 강렬하게 체험하게 됩니다. 토마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곳은 바로 예수님의 고통과 아픔, 십자가의 상처 속이었습니다. 모두가 비껴가려고 하는 그곳, 모두가 넘어가려고 하는 그곳, 그 아픔과 상처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주님 십자가 고통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가 다른 이들의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져줄 수 있을 때, 그들의 아픔과 상처를 나의 것으로 삼을 수 있을 때, 그래서 우리가 성금요일의 고통 속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당신 수난의 성금요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첫번째 부활절의 아침이 밝기 전, 아직 어두울 때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모두가 배신하고 외면하고 도망갔던 바로 그 자리로 마리아 막달레나는 찾아갑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죽음은 가장 허무한 사건이요 무덤은 가장 쓸쓸한 자리이지만, 우리가 죽음의 신비를 깊이 묵상할 때 오히려 부활이 체험됩니다. 첫번째 성토요일의 어둠이 아직 물러가지 않은 무덤을 지키던 마리아가 가장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당신 무덤을 덮고 있던 성토요일 어둠 속으로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자리는 성목요일 밤의 만찬 안에서, 성금요일의 당신 상처와 고통 안에서, 그리고 성토요일의 당신 무덤 앞에서 입니다. 주님의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 각자의 고통과 아픔을 견뎌내고 이겨낼 때, 그리고 끝까지 침묵과 어둠의 주님 곁을 지키고 있을 때, 바로 그 때 우리 역시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 역시 체험하는 사건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부활의 깨달음

인생을 살다 보면, 이전에 모르고 그냥 지나쳐왔던 일들이 일순간에 이해가 되고 해명이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오늘 겪었던 어떤 일이 과거에 몰랐던 것을 알게 해주는가 하면, 지난 과거를 다시금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수도 있으며, 그래서 지나간 과거가 마냥 지나간 것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내가 자식을 낳고 키워보니,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랑이 다시 느껴지기도 하고, 어머니의 그 말씀과 행동을 그때는 이해못했는데 지금 이해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머니와 나의 관계는, 이미 지나가버리고 종결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새롭게 펼쳐지게 됩니다. 과거의 어머니가 이해되고 과거의 내가 새롭게 해명됩니다. 과거는 과거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에 살아있고, 오늘은 과거를 참으로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미래는 오늘 여기서 내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냥 넘어간 일들을 새롭게 해명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미래의 눈으로 볼 때 오늘 나의 삶은 더 깊이 이해되는 법입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더라도 제자들 역시 주님께서 부활하실 것이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무덤이 비어있고, 예수님의 시신을 싸고 있던 아마포가 잘 개켜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누군가가 주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도, 베드로 조차도 빈무덤의 의미를 완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아직 어두울 때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아직 제자들은 눈부신 아침을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직전의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새로운 일들이 펼쳐집니다. 오늘 복음의 다음 구절부터는 마리아를 시작으로 해서 주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일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야,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의 참다운 의미를, 주님께서 왜 그렇게 고통스럽게 십자가에 매달리셨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나서야, 제자들은 자신들의 지난 과거가 이해되고 자신들의 삶이 해명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야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에 압도되고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야 참다운 평화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생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입증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었던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 부활의 눈으로 내 삶의 의미와 내 인생의 신비를 깨닫게 되는 사건입니다. 오늘 있었던 어떤 일로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와 나의 관계가 새롭게 이해되고 내 삶이 새롭게 해명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깨닫게 되고 더 나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때, 내 인생은 새로운 의미와 가치로 충만하게 됩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온갖 어려움과 고통이 주님 부활의 눈으로 이해되기를 기도합니다. 지금 내가 당하는 억울한 일들을 통해 주님이 나를 어디로 이끄시는지, 주님 부활의 눈으로 이해되기를 기도합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누리는 모든 것들이 주님 부활의 눈으로 판단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부활로 우리의 삶을 감싸고 있고 우리의 인생을 떠받치고 있는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 인생의 깊은 신비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오늘 특별히 세례를 받는 이들이 주님 부활로 인생의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깨닫고,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의 평화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와 갈망을 모아,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파스카의 의미

오늘 밤은 주님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신 밤,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신 밤, 주님의 파스카 성야입니다. “파스카라는 말은 넘어가다”, “건너가다는 뜻입니다. 실상 이스라엘의 역사도 파스카의 역사이고, 우리의 인생도 파스카의 역사입니다. 오늘 파스카의 의미에 대해 함께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볼 수 있는 첫번째 파스카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의 해방되어 홍해바다를 건너간 사건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나가려 하지만, 이집트의 왕 파라오는 거듭해서 모세를 막아 세웁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집트에 많은 재앙을 내리시고, 마지막에는 죽음의 재앙을 내리십니다. 이집트 안의 모든 사람과 짐승의 맏배를 죽이시는 재앙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 말씀대로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대문에 바릅니다. 죽음의 재앙은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을 건너갑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아무도 죽은 이는 없었습니다. 어린양의 죄없는 죽음으로 이스라엘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을 넘어가고홍해바다를 건너가서이집트에서 해방됩니다. 이것이 첫번째 파스카입니다.

둘째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의 탈출, 다시 말해 이집트에서의 파스카를 기념하여 파스카라는 이름의 축제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춘분이 지나고 첫 보름달이 뜨면, 그들은 한 주간 동안 파스카 축제를 지냈습니다. 파스카 만찬 때는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을 기억하며 누룩없는 빵과 쓴 나물을 먹었습니다. 파스카 축제 전날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죽었던 어린양을 기억하여, 오후 3시에 어린양을 잡아 성전에 봉헌했습니다. 이것이 두번째 파스카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파스카 축제 며칠 전에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그 기간 중에 당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셨습니다. 누룩없는 빵을 들고 당신 몸이라 하셨고, 포도주를 들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 쏟으실 당신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 이후에 잡혀가시고, 파스카 축제 전날 성전에서 어린양을 죽여 봉헌하는 그 시간, 오후 3시에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접하고 나서야, 그분이야 말로 세상의 죄를 대신해서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음을 택한 파스카 어린양이시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죽음을 넘어 하느님의 생명으로 건너가도록 스스로 피를 쏟으신 파스카 어린양이십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건너 생명으로 건너가심,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심, 이것이 바로 주님의 파스카입니다.

죽음의 재앙이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넘어서 건너간 밤, 주님께서 십자가 죽음에서 하느님의 생명으로 건너간 밤, 이 밤에 교회는 주님 부활을 기념하며 파스카 성야미사를 봉헌합니다. 이 미사를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파스, 주님의 파스카를 기억하고 거기에 참여합니다. 그래서 오늘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계속 해서 들었습니다. 하느님이 우주 만물과 사람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하느님이 어떻게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는지, 하느님이 어떻게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고 당신 백성을 돌보시는지, 그리고 하느님이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영을 당신의 영으로 채워주시는지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 밤에 주님께서 어둠과 죽음을 물리치고, 새로운 생명 하느님의 생명으로 건너가십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의 생명으로 건너가심으로써 우리에게도 죽음을 건너 생명으로 건너가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밤은 우리들의 파스카 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무너진 마음이 주님의 파스카로 새로운 희망으로 건너갑니다. 넘어지고, 상처받고, 길을 잃은 우리의 인생이 주님 파스카로 새로운 용기로 건너갑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 안에 부활이 숨어 있었듯이, 우리의 고통과 슬픔 속에 우리의 부활이 숨어있음을 믿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오늘에 절망하지 않고 미래를 희망합니다. 바로 오늘밤에 우리의 삶이 주님의 평화와 하느님의 생명으로 건너갑니다. 오늘밤이야말로 우리들의 파스카입니다. 아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인간 본연의 됨됨이를, 그 성품과 인격의 진면목을 가장 잘 알아볼 수 있을 때는 그가 가장 어려운 처지에 내몰렸을 때입니다. 체면이나 명성, 재력이나 인맥 등이 다 무의미해지고 떨어져 나가 이른바 사회적 지위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때 한 사람을 가장 잘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한 사람이 자신이 해온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는 듯하고, 더욱이 그가 자신의 비극적 죽음을 명백히 예견하고 있다면, 그 때 그의 말과 행동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더구나 그의 말과 행동이 그 인생의 마지막 말과 행동이 된다면, 그것은 그의 삶의 총괄이요 그의 마음과 정신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던 당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마지막 말과 행동이고, 그러기에 예수님의 삶의 총괄이요 예수님 마음과 정신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마지막 말과 행동을 전해줍니다. 주님 마지막 말씀과 행동은, 첫째로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이고, 두번째는 사랑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오늘 요한복음은 만찬 때의 일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신 일을 전해주지 않습니다. 대신 그 만찬의 의미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뜻한다는 것을 오늘 제1독서와 제2독서가 전해줍니다. 주님의 마지막 만찬은, 주님의 죽음이야말로 죽음과 멸망을 눈 앞에 둔 인간을 구하기 위한 죽음이며, 주님의 몸과 피야말로 생명의 하느님과 새롭게 맺는 약속과 계약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마지막 만찬 안에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사 중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하고 노래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성체성사를 통해 첫번째 성목요일 밤의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죽음과 멸망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하느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게 해주십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하신 첫번째 성목요일, 그날이 바로 성체성사가 세워지고 사제의 직무가 태어난 날입니다. 오늘밤 우리는 그 밤을 기억하고 그 밤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주님의 마지막 말씀과 행동은 발씻김입니다. 주님의 발씻김은 주님 죽음의 의미, 주님 마지막 만찬의 의미, 그리고 성체성사의 의미를 밝혀줍니다. 발씻김에서 드러나는 성체성사의 근본적인 정신은 무엇보다도 먼저 헌신과 봉사입니다. 자신의 몸을 바쳐 이웃과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파스카 만찬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헌신과 봉사는 사제의 헌신으로, 세상을 위한 하느님 백성 모두의 봉사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 따라, 강론이 끝나면 발씻김 예식이 있을 것입니다. 이 발씻김 예식에 우리 본당의 사제들만이 아니라, 우리 본당 모든 신자들이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는 의미로 사목위원들도 함께 할 것입니다.

발씻김은 또한 정화를 의미합니다. 물로 씻는 것 자체가 정화를 뜻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는 것은 세상의 헛된 가치에서, 탐욕과 욕망에서 정화되어 하느님의 숨결로 우리 생명을 채우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발씻김은 치유를 의미합니다. 신발을 제대로 신을 수 없었던 옛 사람들의 발은 언제나 상처투성이였습니다. 험한 세상과 평탄치 않은 길에서 얻은 상처가 고스란히 우리의 발에 담겨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난 발을 보듬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발씻김은 비뚤어지고 상처난 우리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시는 것입니다.

첫 번째 성 목요일의 밤, 주님께서는 당신의 피로 우리를 하느님 백성이 되게 하시고, 당신의 몸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죽음과 희생을 기억하며 우리가 서로 헌신하고 봉사하며 살라고 명하시고, 세상의 가치에서 정화되고 탐욕과 욕망에서 해방되라고 가르쳐 주시며, 우리 마음 속에 숨겨진 상처를 치유해 주십니다. 첫번째 성 목요일의 밤, 주님은 당신의 마지막 말씀과 행동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도록 당신 생명의 성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오늘밤 우리를 정화시켜주시고 치유해주시는 예수님의 발씻김 속으로, 당신의 몸과 피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생명을 주시는 첫번째 성목요일 밤의 마지막 만찬 속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거행하는 발씻김 속에서, 우리가 거행하는 성체성사 안에서 첫 성목요일 밤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현존해 계실 것입니다. 아멘.


성지주일 묵상

예수님의 일생은 30년 남짓 됩니다. 그러나 그 30여년 세월의 대부분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 잠깐 그리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활동하신 1년 남짓, 요한복음에 의하면 길어야 3년 남짓한 기간의 활동만 복음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네 복음서 모두 예수님의 죽음 직전의 2-3일의 일들을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실상 복음서가 우리에게 가장 전하고 싶었던 내용은 바로 이 2-3일에 일어난 일들이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증언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르코복음의 주님 수난기는 파스카 축제일 이틀 전 그리고 예루살렘 성문 바깥의 첫 마을 베타니아에서 있었던 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들어서자 한 여인이 예수님 머리에 아주 귀하고 값비싼 향유를 부어드립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집에 들어오면 손과 발을 씻는 관습이 있었고,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시면 하인이 손님의 손과 발을 씻어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귀한 향유를 부어 드리는 일은 참으로 이례적인 일입니다.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긴 하지만, 이 여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예수님을 맞이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예수님께 존경과 사랑의 예를 갖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일을 두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비싼 향유를 허투루 쓴다고 비아냥거리지만, 죽음을 눈 앞에 둔 예수님은 이 일이 바로 당신의 장례를 앞당겨 치루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상 예수님은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져 돌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오늘 수난기의 두번째 장면은 유다의 배신입니다. 이미 율법학자들과 수석 사제들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예수님 제자 가운데 한명인 유다가 그 음모에 가담합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는 온갖 구실과 모략과 음모가 한곳에 모여듭니다. 하나의 이유, 하나의 원인이 아닙니다. 각자 나름의 이해관계, 갖가지 미움과 악한 마음과 죄악의 결과들이 하나의 사슬로 연결됩니다. 숨겨져 있던 인간의 온갖 악과 미움과 교만이 폭로됩니다. 들킬세라 두려워 드러내지 못했던 온갖 미움과 증오와 폭력이 세상 밖으로 드러납니다. 우리 모두의 죄와 악이 이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는 음모로 모여듭니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가장 핵심적인 것, 바로 주님 죽음 직전 2-3일동안 있었던 일이 오늘 시작됩니다. 한편에는 주님께 대한 극진한 존경과 사랑의 행위가,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온갖 음모와 죄악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도망도 반항도 변명도 없이 당신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오늘 주님은 당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걷기 시작하십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주일이고, 오늘부터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교 전례에서 가장 경건하고 거룩한 주간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복음서의 증언이 이번 주간 전례 안에서 재현됩니다. 이번 주간 주님의 십자가 길에 우리 모두 동반하기를 청합니다. 주님과 함께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삶과 죽음, 우리의 삶과 죽음을 묵상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헌신을 새롭게 하고, 우리 안에 자리잡은 미움과 악한 마음과 온갖 음모에 대항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이번 주간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다짐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예루살렘에 오십니다.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을 왔다갔다 하시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깨우쳐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오십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예루살렘은 다른 때와는 다릅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비슷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어떤 시간은 우리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번 예루살렘 방문은 그런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여러 차례 나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하신 분이 이제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실상 당신의 십자가 죽음이 눈 앞에 도달했음을 직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할까?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당신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 될 이 때를 받아들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 당신이 영광스럽게 될 때를 받아들이시며, 우리에게 당신 죽음의 의미를 깨우쳐 주십니다.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씨앗의 껍데기를 벗고 싹이 트고, 싹이 자라 열매를 맺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이 말씀으로 당신의 죽음으로 많은 열매가 맺을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오히려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는 결정적인 순간이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가 새롭게 살게 됩니다. 그 새로운 삶은 바로 하느님의 생명을 뜻합니다.

더 나가서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 목숨과 생명이 여러 차례 언급됩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사람의 목숨이 여러 개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목숨 또는 생명이라고 말할 때, 새로운 차원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이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측면도 있지만, 영적인 측면도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이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고 그에게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숨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한편으로는 흙의 모습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숨, 하느님의 생명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육체적인 것, 물질적인 것만으로는 충만하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고통이 있고 물질적으로 어려워도, 그것이 의미있는 것이면 인간은 그것을 견뎌냅니다. 반대로 물질적으로 풍부하더라도 그 의미를 찾지 못하며 인생 자체는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더 많이 사랑하면서 살 때, 참으로 풍요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존재이고, 가장 깊은 곳에 하느님의 숨결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 죽음의 의미를 밝혀주시고, 우리 가장 깊은 곳에 하느님의 생명, 영원한 생명이 살아있음을 깨우쳐 주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감싸여 있음을,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생명으로 떠받쳐져 있음을 깨우쳐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의 순간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하느님의 생명과 영광에 감사드리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올린 것처럼

간혹 길을 가다 보면, 응급차에 새겨진 지팡이와 뱀의 상징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응급차뿐 아니라 세계보건기구를 비롯하여 보건과 의료 단체와 기구에는 어김없이 뱀이 지팡이를 감싸고 있는 상징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상징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의술의 신이라 불리는 아스클레피우스가 뱀이 물어다 준 약초로 사람을 치유했다는 신화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뱀은 한편으로는 독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해독제나 약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보다 더 오래전에 기록된 구약성경의 민수기(21,4-9)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이런저런 불평을 하게 됩니다. 노예살이에서 해방되었지만, 광야에서 그들은 물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 ‘차라리 이집트 노예살이가 더 나았다하며 불평을 합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샘물도 찾게 해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불평합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며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언가 간절히 바라던 것을 얻으면, 그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살지 않습니다. 하나를 얻으면 또 다른 하나를 갈망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불뱀을 보내어 백성들을 벌하십니다. 불뱀의 독 때문에 죽어가는 백성들을 보다못한 모세는 하느님께 그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합니다. 모세의 간청을 들어 하느님은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놓으면, 뱀에 물린 이들이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모세는 그렇게 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 위로 들어 올려져야 함을 뜻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 매달리는 것의 의미는, 마치도 모세가 들어올린 뱀과도 같다는 뜻입니다. 불뱀에게 물려 고통받는 이들이 모세가 기둥 위에 달아놓은 구리뱀을 보며 치유를 받았듯이, 십자가 위에 들어 올려진 예수님을 바라보면 모두가 치유를 받고 생명을 얻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야말로 곧 하느님이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들어 올려짐으로써 하느님의 생명과 구원 그리고 하느님의 빛이 드러납니다. 십자가 사건은 한편으로는 엄청난 부조리와 모순의 사건이지만, 바로 그 부조리와 모순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과 구원이 드러납니다.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짐으로써 인간은 죄와 죽음에서 치유를 받고 하느님의 생명을 얻고 하느님의 빛 안으로 나가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죽음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뱀을 쳐다보며 치유받았듯이, 우리 역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고통과 슬픔에서 치유를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억울하고 불합리하며 모순적인 일 때문에 고통받고 있지만,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하느님의 생명과 구원이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아픔과 고통을 어떻게 해서든 피해가려고 애쓰지만, 실상 그 고통 속에서 십자가의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의 슬픔과 아픔 속에 주님이 계시고, 그 슬픔과 아픔을 견디어 내는 우리의 노력 속에 주님의 부활이 숨어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의 십자가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생명과 빛이 우리에게 내려오시기를 청하며, 오늘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사순 제3주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이른바 성전정화사건에 대해 전해줍니다. 성전정화사건이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안의 환전상들과 장사꾼들을 내쫓으신 사건을 말합니다. 그러고나서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유다교 성전의 종말을 고하시고, 당신이 바로 성전이심을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성전에 대해 함께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영도 아래 이집트의 억압에서 탈출하여 광야에서 머물게 됩니다. 광야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은 계약을 맺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야훼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계약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계약의 징표로 하느님은 십계명을 돌판에 새겨주십니다. 모세는 이 돌판을 궤에 넣어 보관하게 됩니다. 이 궤를 계약의 궤라고 부릅니다. 이 계약의 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금 여기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표지가 됩니다. 모세는 진영 한 가운데 천막을 치고 그 속에 계약의 궤를 넣어두었습니다. 이 천막을 만남의 천막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바로 성전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동할 때, 하느님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 천막을 비추시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었습니다. 모세는 만남의 천막 안에서 하느님께 기도하였고, 이 천막 안에서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천막이야말로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며,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이끄시는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떠나 가나안 땅에 이르러, 다윗 임금이 계약의 궤를 자신의 성 안에 모셨습니다. 그로써 다윗은 하느님의 가문이 되었고, 지혜로운 왕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어 계약의 궤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방에는 회당을 지어 하느님 말씀을 들었고, 수도 예루살렘에는 성전을 두어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바빌론의 침략으로 이스라엘 성전은 허물어졌고, 성전 안에 모셔둔 계약의 궤 역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후에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성전을 재건하였지만, 사실 재건된 성전 안에는 계약의 궤를 모시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재건된 성전조차도 주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서기 70년에 로마 제국의 군사들에 의해 허물어졌습니다. 오늘날에는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우는 서쪽 벽만 남아있어, 유다인들이 그 벽에 머리를 치며 통곡과 탄식의 기도를 올리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미 하느님 현존의 자리가 아니라 장사꾼들의 집으로 변해버린 성전의 종말과 붕괴를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 당신이 바로 하느님이 현존하는 성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계시고 당신을 드러내시는 장소는 어느 산, 어느 건물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바로 예수님 안에서 온전히 드러나시며, 주님의 말씀 안에 온전히 현존하십니다. 이제 하느님이 계시는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 이십니다. 예수님 이야말로 하느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님 자신이 바로 성전이심을 선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성전에 대해 묵상하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하느님이 계시고, 성체성사로 주님과 일치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이 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우리는 살아있는 하느님의 성전”(2코린 6,14)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라면, 오늘 복음은 우리 자신 역시 정화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우리 안에 환전상과 장사꾼들의 탐욕과 욕망 역시 정화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실 때 우리는 참다운 하느님의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는 오늘 우리 자신이 정화되어 살아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될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오늘은 사순 제2주일이고,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사건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신 주님께서 찬란한 영광의 모습으로 변하십니다. 주님 곁에는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자를 대표하는 엘리야가 함께 서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 위 구름 속에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고 울리는 하느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제자들은 한편으로는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쁨과 감격에 가득차 있습니다. 두려움과 기쁨, 이는 신적인 존재가 드러날 때 인간이 보편적으로 체험하는 사실입니다. 이제 제자들 앞에 주님께서 하느님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곧 하느님과 같은 분이심이 천명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변모의 전후 사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의 활동을 마무리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그 여정길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으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자,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당신께서 고난을 겪을 것이고 죽음을 맞이할 것이며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특히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반박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이 가야할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며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모두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이 말씀 후에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시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시며, 당신이 바로 생명이신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그리고 당신 부활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앞당겨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보면, 주님 변모 사건의 의미가 더욱 밝게 드러납니다. 주님은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후에, 그리고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신 후에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주님의 거룩한 얼굴을 보는 것은 고통과 십자가를 통해서 입니다. 고통과 십자가야 말로 참으로 하느님의 생명과 영광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말이지만, 십자가와 죽음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이 드러납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모든 희망이 붕괴되고 나서야, 그리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음을 절감할 때, 바로 그때 하느님은 하느님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당신 부활이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위로와 용기입니다. 스승의 십자가와 죽음을 눈 앞에 둔 제자들에게, 그리고 자신들의 고통과 죽음을 예감하는 제자들 앞에서 주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우리 자신에게도 말합니다. 우리 각자가 지고 살아가는 고통과 십자가, 매일 매일 겪는 절망과 죽음 안에 바로 하느님의 생명이 싹트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주님의 거룩한 변모가 우리를 위로합니다. 우리가 안고 살아야 하는 고통과 십자가 너머 바로 참다운 생명과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우리를 위로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의 힘든 삶을 위로해 주시고 용기를 주시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광야, 사탄, 그리고 천사

오늘은 사순 제1주일입니다. 지난 수요일 우리 머리 위에 재를 얹음으로써 사순시기가 시작되었고 앞으로 40여일 동안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게 됩니다. 사순시기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우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찰하며 참회의 시간을 갖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순시기는 자기 자신을 만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꾸며지지 않은 우리 자신의 민낯을 볼 수 있어야 하고, 포장되지 않은 우리의 발가벗은 모습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순시기는 바로 광야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광야 한가운데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 역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기 직전, 광야에서 자신을 만나십니다. 오늘 복음은 광야에서 40일을 보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은 예수님께서 악마에게 세가지 유혹을 받으신 것을 전해줍니다. 그러나 오늘 마르코 복음은 단 두 문장으로 예수님의 광야 생활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40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았고, 둘째는 천사의 시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빵과 힘, 명예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은 광야에만 머물지 않았고, 예수님의 삶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수난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베드로를 향해서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빵의 기적 이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으나, 예수님은 단호히 거부하며 그들을 피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못박혔을 때, 지나가던 사람들은 광야에서의 사탄과 똑 같은 말로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 27, 40).”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우리 역시 평생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진실되게 우리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대면한다면, 우리를 괴롭히는 사탄의 유혹이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좀 더 솔직하게 바라다보면, 우리 인생 전체에 걸친 유혹과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괴롭히는 유혹의 실체가 무엇인지 찾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광야, 이번 사순시기에 우리가 성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동시에 천사의 시중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사나운 들짐승과도 우정을 나눕니다. 유혹과 위험 한 가운데서도 천사의 시중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삶의 곳곳에서 기도하며 하느님과 함께 있었으며, 당신 죽음의 순간에도 하느님께 기도함으로써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의 온갖 유혹이 우리를 손짓하여도, 모든 희망이 다 무너져 내릴 때에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만 같은 때에도,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를 감싸고 있으며 우리의 삶을 천사들이 떠받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광야 한 가운데서도 하느님이 함께 계심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사순시기 동안 성찰하고 묵상해야할 부분입니다.

유혹과 고통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은총 가운데서도 여전히 악마의 유혹이 있다는 것도 깨달아야 합니다. 이번 사순시기 동안 덧없고 부질없는 것들을 피해서 우리 자신의 얼굴을 솔직히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유혹의 실체도 깨달아야 하지만, 나를 감싸는 하느님의 은총도 깨달아야 합니다. 사순시기야 말로 우리들의 광야입니다.

오늘 광야 한가운데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묵상하며 우리 역시 은총의 사순시기를 보낼 수 있도록 주님께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나병 치유

오늘은 연중 제6주일이며 동시에 프랑스 루르드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셔서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신 날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루르드 성모님의 첫번째 발현일에 세계병자의 날로 정해 의료인과 병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 역시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해주신 사건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지난 주 강론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치유의 참다운 의미를 깨달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체적 치유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말씀하고 계시고 더 깊은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십니다. 오늘 나병환자의 치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묵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 레위기를 읽어보면, 전염병을 가진 이는 부정한 사람으로 선언되고 열 두 지파의 진영 바깥에 혼자 살아야 합니다. ‘부정하다는 말은 전례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이며, ‘진영 바깥에 혼자 살아야 한다는 말은 격리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당연히 전염병이 나으면 전례에 참여할 수 있고, 진영 안 공동체로 복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코로나19를 뼈저리게 겪어보았기에 충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질병은 질병 자체로도 무서운 것이지만, 그 질병이 가져다주는 낙인과 편견, 배제와 소외가 사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인간을 괴롭힙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무엇보다 먼저 육체적 치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주시고 그에게 말씀하시니, 그가 나병에서 치유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그를 공동체에 복귀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를 일상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십니다. 실상 질병에서 벗어나고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러나 고통 가운데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 역시 은총이며, 우리의 일상의 삶을 하느님이 감싸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큰 은총입니다. 우리는 우리 일상의 삶이 얼마나 귀중하고 감사한 것인지 코로나를 통해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우리의 삶을 하느님이 받쳐 주시고 우리의 인생을 하느님이 감싸주시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은총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 치유의 마지막 단계는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깨끗하게 되다는 말은 첫째로는 육체적으로 깨끗하게 된다는 말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 앞에서 깨끗하게 된다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회복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육체의 회복을 넘어서 하느님이 우리를 처음 창조하실 때의 모습, 본래의 참다운 자아로 회복하도록 해주십니다. 우리 자신 안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 안에 우리가 존재하는 바로 그 모습으로 우리를 되돌려 주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나병 환자를 치유하시는 모습을 묵상하며,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성찰해 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질없는 욕심 때문에 우리가 더럽혀 졌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고, 온갖 상처를 안고 살고 있으며, 차마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숨겨놓고 살아갑니다. 실상 우리가 나병환자 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주셔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시고, 우리의 아픔을 고쳐주시며,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깨끗한 모습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깊은 갈망과 기도를 모아,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함구령

복음서를 보면,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치유의 은총을 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 주십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죽은 이를 되살려주시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또 다른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몰려드는 병자들을 경계하시고 그들과 거리를 두십니다. 군중을 피해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는가 하면, 군중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작은 배 위에서 그들을 가르치시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여러 차례 병자를 치유하신 후, 치유의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시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마귀들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왜 치유받은 이들과 마귀들이 당신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하셨는지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함구령은 치유와 구마의 참다운 의미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병고를 피할 수 없고, 나이들고 늙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누구나 늙고 아프기 마련입니다. 물론 우리는 병고에서 치유되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 치유 받은 그들이 그 이후로 어떤 질병도 없이 살았던 것도 아니요 그들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산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지금의 병고가 지나간다고 해서 앞으로 질병 없이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질병의 고통에서 치유되는 것도 큰 은총이지만, 사람이 평생을 건강하게만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늙지 않고 살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도 은총이며, 지금 여기서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도 큰 은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치유와 구마의 참된 의미는 우리 육신이 늙어가고 병들어도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 바로 참되고도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들고 늙어가는 것도 참으로 인생의 신비이며 그 신비 가운데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늙음과 병듦 속에서도 우리는 주님의 손을 잡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큰 은총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함구령은 당신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당신의 사명의 참다운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병을 고쳐주시고 빵을 많게하여 풍요와 번영을 약속하는 메시아를 거부하십니다. 많은 이들이 칭송하고 우러러보는 왕을 거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우리를 하느님께 향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을 참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빵이나 명예와 위신이 아님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죽음과 포기, 희생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변화되기를 원하셨고, 죽음과 고통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치유받은 이들의 소문을 듣고 몰려든 군중의 마음이, 마귀들의 입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정체가 혹여 예수님의 참모습과 당신 사명의 참 의미를 오해하지 않도록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마음이 육체의 건강과 물질의 풍요로움에만 머물러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경계하시고 우리와 거리를 두실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치유와 구마의 참다운 의미를 묵상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육체적 건강과 물질적 풍요에만 머물러 있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늙음과 병듬 가운데 하느님을 깨닫고, 고통과 희생 가운데서 드러나시는 하느님의 참다운 생명을 깨닫기를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갈릴래아에서의 선포와 활동

예수님의 공적 활동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갈릴래아 호수가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악령을 쫓아내시며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며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시며 돌아가시고 부활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활동의 첫번째 부분의 어느 하루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과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곧 하느님 자신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은 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구원과 은총은 우리에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가 죽어야만 도달하는 그런 곳도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회개하고 받아들이면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이 우리 안에서 실현됩니다, 우리 안에서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악령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치유하신 것은 하느님이 이제 우리 안에서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시고,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 이었습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장면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악령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쳐주시는 활동은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해서 알아들어야 합니다. 고대 팔레스티나 지역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오늘날 우리와 같은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악령은 인간 바깥에서 인간을 짓누르고 괴롭히는 모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난과 결핍은 최고의 물질문명을 누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간 바깥에서 인간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소외와 배제 역시 인간 밖에서 인간을 괴롭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시며 그들과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짓누르는 모든 것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자선주일을 지내면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자선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활동을 우리가 이어받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병자의 치유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여전히 부질없는 집착과 탐욕 때문에 병들고, 불안과 두려움으로 아파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부터 우리를 병들게 하고 억누르는 모든 것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해방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의 구마와 치유는 하느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의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참다운 자아로, 하느님이 숨을 불어넣어 주셔서 하느님의 숨으로 살아가는 참다운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려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갈릴래아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과 활동을 묵상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다시 말해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이 우리 가까이에 있음을, 하느님이 우리의 삶을 감싸고 있으며 우리 인생을 떠받치고 있음을 깨닫도록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해주시고 해방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과 은총이 우리 자신 안에서 실현되기를 희망하며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모아,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사람 낚는 어부

갈릴래아 호수는 길이 21km 그리고 그 폭이 13km가 되는 큰 호수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는 종종 이 호수를 바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호수에서는 물고기도 많이 잡혔기에, 여기서 잡은 물고기들이 이스라엘 전체로 팔려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이 호수 주변에는 작은 도시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카파르나움, 코라진, 벳사이다, 게라사, 티베리아스 등 우리 귀에 익숙한 도시들의 이름이 이 호수를 둘러싸고 발전한 마을들입니다. 그리고 이 호수 주변의 사람들은 대개 어부들이었습니다. 어부들은 도시의 부자들은아니었지만, 그나마 자신들의 노동으로 먹고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어부들을 당신의 첫번째 제자로 불러 주십니다. 오늘 첫 제자들의 부르심에 대해 함께 묵상하며, 우리 자신들의 부르심에 대해서도 함께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주님께서는 어부들을 보시고 나를 따라 오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부르심의 주인공은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은 준비된 사람이거나 자격이 있거나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에 불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르심 자체가 실상 은총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깨닫고, 교회로 불리우고, 세례를 받은 모든 것이 가장 근원적으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 발로 성당에 나왔다 하더라도, 내 마음과 내 발을 교회를 이끈 근본적인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또한 우리가 자격을 갖추었거나 선하고 의롭기 때문에 불린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불러 주셨고, 우리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주님의 사랑과 그 은총을 갑작스럽게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실상 은총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기도 했지만, 동시에 은총이 주님의 부르심을 깨닫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은총은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둘째로 주님께서는 그저 그런 평범한 어부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사람 낚는 어부라는 표현이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일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불러 주시면, 우리의 일상과 우리의 일이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은 거룩한 것으로 변하고 우리의 일은 세상을 위한 일로 드높아 집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깨달으면 깨다를수록, 우리의 삶은 더 거룩해지고 더 아름다워지며 더 큰 가치로 충만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묵상해 볼 것은 제자들의 응답, 곧 우리의 응답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 바뀌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의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포기를 배워야 합니다. 첫번째 제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릅니다.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릅니다. 어부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려둡니다. 심지어 아버지까지 버려두고 주님을 따릅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릅니다. 우리가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는 없겠지만, 우리도 버리고 포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움켜지고 집착하는 손을 놓아야 합니다. 쉽게 용서하지 못하고 갚아버리고 말겠다는 내 마음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돋보이고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 일상이 더 큰 의미와 가치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일상의 것들을 버리고 포기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제자들을 부르시듯,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주님 부르심은 더 의미있고 더 가치있는 삶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우리의 일상의 것들을 버리고 포기함으로써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응답을 기쁘게 받아주시도록 기도하며, 오늘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첫 제자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이 주님께 불림 받은 일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원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두 사람이 주님의 제자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 우리가 신앙을 가지게 되고 신앙이 깊어지며 주님 제자로 성장해가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주님의 두 첫 제자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에게 예수님을 가리켜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 일컬으며 주님을 따르게 합니다. 그리고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시어 두 사람에게 무엇을 찾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의 첫번째 물음은 우리가 참으로 갈망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끔 합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인생을 통해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지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찾느냐?”는 예수님의 첫번째 질문에 두 제자는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고 되묻습니다. 제자들은 주님 계신 곳에 함께 있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 마음의 갈망을 성찰해보면, 가장 깊은 곳에서 갈망하는 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가장 표면적으로는 안정적인 삶의 조건, 육체적인 건강, 용서와 화해 등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실상 내 힘만으로, 내 의지만으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음도 깨닫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마음의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면,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갈망하고 있음도 깨닫습니다. 그러나 은총과 축복의 본질이야말로 하느님과 함께 있음입니다. 우리가 성모송을 기도할 때마다 되풀이하듯이, 하느님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인사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은총도 축복도 하느님과 함께 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제자들의 물음,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는 물음은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의 갈망과 기원을 드러냅니다.

제자들의 되물음에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아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서 그분과 함께 그날을 보냅니다. 우리가 우리 삶과 신앙의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주님과 함께 머물러야 합니다. 주님에 대해서 듣고 아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느님도, 신앙도, 예수님도 모두가 신비입니다. 듣고 배운다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신비 안에 잠길 때, 그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계신 곳에 가서 보고 머물러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머무를 수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은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 신비의 영역 안으로 들어갑니다.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신비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세례성사는 무엇을 찾느냐?”하신 주님의 첫번째 물음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주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고 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와서 보아라하시면, 우리는 주님 계신 곳에 가서 머물러라 합니다. 성체성사는 주님과 함께, 주님을 모시고, 주님 안에서 머무는 것입니다. 영성체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천막 안에 머물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들어오고,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과 함께 머물게 됩니다. 이제 하느님의 신비가 우리의 삶을 감싸고,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인생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머물면, 주님께서 우리의 깊은 갈망을 이루어 주시고, 우리의 일상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시며, 우리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주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묵으시는 곳에 함께 머물도록 우리를 불러 주십니다. “와서 보아라.”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습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2주 전 성탄 대축일로 시작된 성탄 시기는 오늘 주님의 공현 대축일로 마무리됩니다. 원래 공현이라는 말은 거룩한 것 또는 신적인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공현은 메시아의 존재 또는 하느님의 거룩함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 역시 동방 박사를 통해 주님의 탄생이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과정에 대해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안에서 우리는 별을 쫓아 메시아를 찾아온 박사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별의 인도를 받아 동방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왔고,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 와서 마침내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는 성경의 전체 흐름과는 완전히 다른 아주 특별한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 전체는 메시아를 향해 서 있고 그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분의 길을 닦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는 순명으로 메시아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만나는 동방 박사들은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었고, 구약성경도 모르며 이사야 예언자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별을 쫓아 메시아를 찾아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의 신비와 그 뜻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을 드러내 줍니다. 최초의 우주 비행사였던 옛 소련의 유리 가가린(Yuri Gagarin)은 첫 우주 비행 후에 우주는 암흑이며 나는 신을 보지 못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우주 비행사 보만(Borman)은 우주 비행 후의 인터뷰에서 태초에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성경을 말씀을 되뇌었습니다. 실로 하늘은 물리학적이고 천문학적 하늘 이상의 것을 드러내 줍니다. 그래서 시편 말씀은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창공은 그 분 손의 솜씨를 알리네”(시편 19,1)하고 노래합니다. 하늘과 창공은 거룩함과 하느님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참으로 갈망하는 이에게는 하느님이 드러나십니다.

하늘과 창공의 별이 동방박사들을 막 태어나신 주님께 인도했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보고 땅에 엎드렸고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드립니다. 그들은 동방에서 온 사람들로서 이스라엘의 경계 바깥의 사람입니다. 이들은 이방 민족의 사람들이지만 진실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메시아의 탄생은 이렇게 이방 민족 가운데 진실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게 드러났습니다. 별이 동방 박사들을 이끈 곳은 이스라엘의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고장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별은 진실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가장 작은 고을, 가장 보잘것없는 땅, 가장 작고 약한 사람, 가장 인간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주님 성탄의 신비, 공현의 신비,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비가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별 너머, 하늘 너머, 우리가 근접할 수 없는 먼 곳에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가장 작고 보잘것없으며, 가장 작고 약한 것,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일상적인 삶 안에 거룩함의 신비, 하느님의 신비가 숨어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우리의 일상 안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을 발견한 사람에게 일상의 삶은 보잘것없거나, 비루한 것이거나, 가치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일상을 드높여 주시고,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시고, 새로운 가치와 의미로 채워 주십니다. 우리의 일상이 바로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 됩니다. 동방 박사들을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곳으로 이끌었던 그 별이 오늘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품은 어머니 마리아

2024년 새로운 한 해가 오늘 시작됩니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날 교회는 이 날을 천주의 모친 마리아 대축일로 경축합니다. 또한 매년 11일은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정한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성모님께 우리 자신들과 온 세상의 평화를 주시도록 기도하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성모송을 바칠 때마다 이 구절이 있습니다. 오늘 이 표현의 의미에 대해 함께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천주의 성모라는 말은 곧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성모님을 일컬어 예수님의 어머니, 그리스도의 어머니, 구세주의 어머니라고 표현하면,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이해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말하려고 하면 설명이 필요합니다.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말하는 것은 삼위일체 교리를 전제하고서 하는 말입니다. 요한 복음 1장을 보면, 하느님의 말씀이 한 처음에 있었고, 그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있었고, 그 말씀이 곧 하느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기 이전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계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지만, 하느님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에게도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고 말하며, 하느님께만 부르던 호칭 주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교리는 한편으로는 마리아에 대한 교리이지만, 더욱 근원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에서 나오는 교리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신앙고백은 신학과 교리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목자들이 전한 말에 놀라워하며, 그 일들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히 되새깁니다. 루카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항상 하느님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합니다. 아기를 가질 것이라고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 잃었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되찾았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 이 모든 말씀들을 마리아는 마음 속에 간직했다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 태중에 품고 사는 어머니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어머니입니다. 마리아의 이런 모습은 그리스도교의 기도와 영성의 원형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넣고 되새겨 묵상하며, 그 묵상한 말씀에 순명하여 실천하는 것이 기도요 영성입니다. 오늘날 렉시오 디비나라고 불리는 기도뿐 아니라,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과 같은 전통적인 기도와 영성, 최근의 향심기도와 같은 것도 마리아의 모습을 적용한 것입니다. 실로 말씀을 품은 어머니의 모습은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자기가 품고 있는 그 말씀에 순명하여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의 위협을 이겨내고 불의와 싸우며, 어떤 그리스도인은 물질문명에 저항하여 가난을 선택하고, 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온 삶을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데 바칩니다. 말씀을 품고 사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힘이 내립니다. 말씀을 품고 사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용기와 평화, 하느님의 능력이 일어납니다.

오늘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에, 우리 모두가 하느님 말씀을 품고 사는 어머니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용기와 평화, 하느님의 능력과 축복이 되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맞이하는 새로운 한 해가 하느님 말씀으로 새로워지고, 온 세상의 평화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과 기도를 모아,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주님의 성탄 대축일이 지나고 처음 맞이하는 주일을 교회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로 지냅니다. 모든 사람이 비슷비슷하듯이, 예수님 역시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서 양육받고 성장했습니다. 한 사람이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태어나서 1-2, 길게 잡아도 6-7년의 시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 시기 동안 아기는 엄마 품에서 사랑으로 느끼며, 최초의 성격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가정은 우리 모두에게도 그러하듯이, 이제 갓 태어난 예수님에게도 가장 중요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스라엘 율법에 따라 예수님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으며 예수라는 이름을 받았고, 또한 40일이 지난 후에 성전에 봉헌되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부모님의 품에 안겨 성전에 들어섰을 때,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시메온에게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기까지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예수님이 태어나서는 가정 안에서 사랑을 느끼며, 신앙에 충실한 부모에게 보호받으며 신앙을 키우고, 의롭고 성령에 가득찬 사람에게 축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의 유년 시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예수님이 공생활에서 보여주신 이웃에 대한 따뜻한 연민, 하느님께 대한 끝없는 헌신과 봉헌, 아프고 힘든 이들에게 대한 축복이 바로 이 가정에서부터 나왔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가정이 다 그렇듯이, 시련과 고통없는 가정 역시 없을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에 의하면, 헤로데 임금의 질투와 증오 때문에 성가정은 이집트로 피신을 가야 했습니다. 주님의 천사는 요셉에게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명하고, 요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순명합니다. 성가정의 이집트 피신은 단순히 공간의 이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길도 없고, 나침반도 없이 떠나는 여정입니다. 그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과 맺어온 관계를 포기하는 것이고, 언제 돌아오지 모르지만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떠나는 길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말없이 자신들에게 들이닥치는 온갖 어려움과 괴로움을 받아들입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과 마음을 보여줍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그들의 가정을 지키고 그들의 자녀를 지키기 위해 쏟아야 하는 땀과 눈물을 요셉과 마리아가 보여줍니다. 특별히 오늘 가정과 자녀를 지키기 위해 쏟는 세상 모든 아버지의 땀을 응원하고, 세상 모든 어머니의 눈물을 위로합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맞아 우리 본당 신자들과 모든 가정에 주님의 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도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의 기도와 보호를 있으시기를 빕니다. 시련과 고통 속에 있는 가정에도 주님께서 용기와 위로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경험이 알려주듯, 우리가 쌓아 올리고 우리가 거두어들인 모든 것이 실상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우리 자신을 일으켜 주시고,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손길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성취와 결과를 얻어야만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님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가정 축일에 우리 신자들의 모든 가정에 하느님의 큰 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올 한해 우리를 이끌어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우리들의 감사와 찬미를 모아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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