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 소개글

가정이 파괴되고 공동체가 와해되며
탐욕과 기만이 판치는 세상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중심을 잡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위치를 알고 좋은 길잡이를 찾아야 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길잡이,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수 있는 길로 이끄시는 가르침,
인간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며, 성화시키시는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 길을 배우고 익히고,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친교를 나누며,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곳.
천곡성당은 천곡, 달천 지역의 기도 장소이자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만남의 장소입니다.

코로나라는 엄청난 역병이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우리는 잘 싸워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무의미와 불합리의 병패는 지금도 우리를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크고 힘든 고통을 함께, 그리고 전능하시고 사랑 가득하신 하느님과 함께 이겨 나가시길 초대합니다.

저는 이번에 천곡성당으로 부임한 이요한 십자가의 요한 신부입니다.
부임하자 천곡 신자분들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가 코로나로 성당을 오지 못하게 된 신자분들의 영적 안전과 심리적 고통의 문제였습니다.
그 마음을 받들어 이렇게 펜을 들고 여러분께 편지를 씁니다.
인간이 가진 특징 중 하나가 '사회성' 입니다. 
그런데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가 한 마음으로 움직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인류 역사 안의 모든 공동체는 여러 갈등 안에서 움직였습니다.
사람 자체가 이기심, 탐욕, 질투, 시기와 같은 내적 요소를 내포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최근의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오던 것입니다.
세상과 교회는 천국, 연옥, 지옥이 섞여 있는 곳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지요.
이런 현실을 받아 들여야 공동체 안에서 상처 받는 일이 줄어듭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우리를 받아 들이시고,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몸소 인간이 되시고 그 무의미와 불합리에 스스로 들어오셔서 
의미와 정의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에게도 벗어나 자유롭게 될 수 있는 길을 지금도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혼란속의 세상에서도 하느님과 함께라면 길을 찾고 중심을 놓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제가 찾은 길을 열심히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공동체가 우리에게 주는 긍정적 요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체는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우리는 공동체를 통해 자기 욕구를 충족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대부분의 기쁨, 행복감, 즐거움은 인간 관계를 통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자유의 소중함, 즐거움의 배가와 다양성의 경험과 같은 살아있는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개인적 이해 관계가 얽히지 않은 성당 안에서의 인간관계는 사회생활에서 생긴  인간관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소박한 기쁨을 주기에 신앙 생활은 심리적으로도 우리를 치유해 줍니다.
그리고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도 사람을 피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에게 편하고 좋은 사람만 만난다면 심리적 편식이라는 부작용을 가지게 되어 성장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처럼 소박한 기쁨과 자기성장, 그리고 영적 안정과 무엇보다 강력하고 사랑 가득한 하느님과 성모님의 은총과 보호를 얻을 수 있는 보물 창고.

천곡성당으로 다시 여러분을 초대 합니다.
문을 활짝 열고 여러분을 기다리겠습니다. 
                              
                                           매미소리 울리는 성당에서 
                                                                 
                                                                               이요한 신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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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5월 18일 폴란드 바도비체(Wadowice)에서 탄생한 카롤 요제프 보이티와(Karol Josep Wojtyla)는 1978년 10월 16일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아버지 카롤 보이티와와 어머니 에밀리아 카초로프스카의 둘째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1929년에 세상을 떠났고, 의사였던 그의 형 에드문트는 1932년에 사망하였다. 폴란드 육군 하사관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194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9살 때 첫 영성체를 하고 18살 때 견진성사를 받았다. 바도비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크라쿠프(Krakow)의 야겔로니카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39년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 세력이 대학을 폐쇄하자 젊은 카롤은 독일로 징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광산과 솔베이 화학 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사제 성소를 발견한 카롤은 1942년부터 아담 스테판 사피에하 대주교가 운영하는 크라쿠프의 지하 신학교에서 비밀리에 사제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또한 카롤은 지하 극단인 ‘랩소디 극장’을 후원하기도 하였다.

종전 이후 카롤은 다시 열린 크라쿠프 신학교와 야겔로니카 대학교 신학부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1946년 11월 1일 크라쿠프 교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러고 나서 사피에하 추기경은 그를 로마로 보냈고 그는 1948년 십자가의 성 요한의 작품에 드러난 신앙을 주제로 쓴 논문으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때에 그는 방학이 되면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에 있는 폴란드 이민들을 대상으로 사목 활동을 하였다.

1948년 폴란드로 돌아온 그는 크라쿠프 근처의 니에고비치 본당과 성 플로리아노 본당에서 보좌 신부로 일하였다. 1951년까지 그는 대학교 교목으로 있으면서 철학과 신학 연구를 계속하였다. 1953년 그는 루뱅 대학교에서 “막스 쉘러의 윤리 체계를 바탕으로 한 그리스도교 윤리학 성립 가능성에 관한 성찰”을 주제로 한 박사 논문을 제출하였다. 그 후 그는 크라쿠프의 신학교와 루뱅 대학교의 신학부에서 도덕 신학과 윤리학과 교수가 되었다.

1958년 7월 4일 교황 비오 12세는 그를 크라쿠프 보좌주교와 옴비 명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는 1958년 9월 28일 크라쿠프의 파펠 대성당에서 유게니우스 바지아크(Eu geniusz Baziak) 대주교에게서 주교품을 받았다.

바오로 6세 교황은 1964년 1월 13일 그를 크라쿠프의 대주교로 임명하였고 1967년 6월 26일에는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보이티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참석하여 사목 헌장의 마련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교황직에 오르기 전까지 보이티와는 주교 대의원 회의에 다섯 차례 참석하였다.

그는 1978년 10월 16일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1978년 10월 22일에 교황으로 즉위하여 보편 교회의 목자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교황은 이탈리아에서 146 차례의 사목 방문을 하고 로마 교구장으로서 로마의 332개 본당 중 317개의 본당을 방문하였다. 그는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모든 교회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104 차례의 해외 순방을 하였다.

그의 주요 문헌으로는 14개의 회칙, 15개의 교황 권고, 11개의 교황령과 45개의 교황 교서가 있다. 그는 또한 여러 책도 저술하였다. 여기에는 “희망의 문턱을 넘어서”(Crossing the Threshold of Hope, 1994년 10월), “은총과 신비 : 사제 수품 50주년을 맞이하여”(Gift and Mystery : on the Fiftieth Anniversary of My Priesthood, 1996년 11월), “로마 삼부작 - 명상”(Roman Triptych - Meditations, 2003년 3월), “일어나 가자”(Rise, Let Us Be On Our Way, 2004년 5월), “기억과 신원”(Memory and Identity, 2005년 2월)이 포함된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47차례의 시복식을 주재하여 1,338명을 시복하고 51차례의 시성식을 주재하여 총 482명을 시성하였다. 또한 9차례의 추기경 회의를 소집하여 231명(1명의 비밀 추기경 제외)의 추기경을 임명하고 6차례의 추기경 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는 1978년부터 주교 대의원 회의를 15회 소집하였다. 여기에는 정기총회 6회(1980, 1983, 1987, 1990, 1994, 2001), 임시총회 1회(1985), 특별총회 8회(1980, 1991, 1994, 1995, 1997, 1998 [2회], 1999)가 있다.

1981년 5월 13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 성모님의 자애로운 손길 덕분에 목숨을 구하고 오랜 회복기를 거친 다음 그는 그 괴한을 용서하였다. 새 삶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그는 영웅적인 아량을 발휘하며 사목 활동에 더욱 힘을 쏟았다.

그는 목자의 배려로 많은 교구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라틴 가톨릭 교회와 동방 가톨릭 교회를 위한 교회법전도 공표하였다. 그는 하느님 백성을 격려하는 특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구원의 해, 마리아의 해, 성체성사의 해, 2000년 대희년 등을 제정하였다. 그는 또한 세계청년대회를 제정하여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만큼 사람들을 많이 만난 교황은 없을 것이다. 매주 수요일에 있는 일반 알현(1,160회 이상) 때 1천 7백만 명 이상의 순례객이 교황을 만났다. 여기에 특별 알현이나 예식(2000년 대희년에만 800만 명), 이탈리아를 포함 전 세계의 사도 방문에서 만난 수백만의 신자들이 추가된다. 38회의 공식 방문을 통하여 많은 정부 관리도 교황을 알현하였다. 그리고 738차례의 알현과 모임을 통해 국가 원수들을, 246회의 알현과 모임을 통해 총리들을 만났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바티칸 교황궁에서 그가 제정한 하느님의 자비 주일(부활 제2주일, 사백주일) 전야인 2005년 4월 2일 토요일 오후 9시 37분에 선종하였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십시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선종한 그는 4월 8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된 장례미사 뒤에 바티칸 대성전의 지하 무덤에 묻혔다.

그리고 2011년 5월 1일, 그가 제정하고 그 전야에 선종한 하느님의 자비 주일에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가톨릭 교회 역사상 최단 기간에 복자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교황 즉위 기념일인 10월 22일로 정해졌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은 한국 가톨릭에도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1984년 5월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 중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으며,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100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식과 한국 103위 순교자 시성식을 거행했다. 1989년 10월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맞아 다시 한국을 찾은 그는 65만여 명이 운집한 여의도광장에서 남북한의 화해를 바라는 평화 메시지를 낭독했고, 5.18 광주 민중항쟁의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은 한국 교회의 비약적인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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