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례지 소개

동래부동헌

가톨릭부산 2016.05.19 14:28 조회 수 : 444

동래부동헌

소 재 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56

□문화재지정: 부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1호(1972.6.26)

동래부 동헌은 조선시대에 동래부사가 공적인 업무를 보던 것이다. 동헌은 일명 아헌(衙軒)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수령이 직접 공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이청(吏廳), 무청(武廳), 향청(鄕廳) 등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동래부는 정3품 당상관(堂上官)이 부사(府使)로 임명되고, 국방 및 대일외교상 중요시되었던 곳이므로 관아시설도 위용을 갖출 필요가 있어 다른 고을에 비해 규모가 컸다.

아헌인 충신당에는 그 부속건물로 좌우의 연심당(燕深堂), 독경당(篤敬堂)과 대문, 외대문인 독진대아문(獨鎭大衙門), 그 바깥 문루인 망미루가 있었다. 그러나 서익랑은 파괴·철거되었으며, 망미루와 독진대아문은 지금의 금강공원 입구와 금강공원 안으로 옮겨 세웠다. 충신당만은 본래의 위치에 외롭게 보존되어 있으나, 부지(敷地)는 축소되었고, 원래 떨어져 있었던 동익랑이 충신당에 너무 가까이 이건되어 갑갑한 느낌을 준다.

현재의 동헌 건물은 1636년(인조 14) 동래부사 정양필(鄭良弼)이 창건하여 1711년(숙종 37) 부사 이정신(李正臣)이 충신당이라는 편액(扁額)을 붙인 뒤로 충신당이라 일컬어졌는데, 조선시대 말까지 동래부와 동래관찰사의 아헌으로 사용되었다.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인 충신당은 우리나라 고유의 목조기와 단층집으로 원래는 방과 마루가 함께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건물 앞면에는 각 칸마다 분합문(分閤門)이 부착되어 있지만 이 역시 원래 모습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동헌은 일제시기부터 관청 건물로 사용되면서 벽면, 평면구조, 천장, 마루 등이 많이 개조된 데다 보수를 거치면서 목재 등의 재료가 대부분 교체되어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고 있으나, 부산에 남아있는 조선시대 유일한 동현이며,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관아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이정식은 가족들과 함께 기장으로 피하였다. 그 뒤 1868년 봄에는 울산으로 이사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동래 포졸들은 갑자기 없어진 사람들에게 의심을 품고 그들의 종적을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마침내 울산에서 이정식 회장을 비롯한 아들 이월주(프란치스코), 며느리 박소사(마리아), 조카 이관복(베드로) 등 일가족 4명과 교우 이삼근(야고보), 차장득(프란치스코), 옥소사(발바라)를 찾아내고 말았다.

울산에서 체포된 7명은 곧 동래부사의 관아로 압송되었다. 동래부사는 그들을 47일간 옥에 가두어 두고 여러 번 심문하고 형벌을 가하였지만, 그들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자 동래부사는 그들을 경상좌수사였던 구주원(具胄元)에게 넘겨 사형시키도록 하였다. 수영으로 옮겨진 이튿날 좌수사 구주원은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형벌을 가한 다음 배교하기를 강요하였다. 그들 중 세 사람은 심한 형벌에 못 이겨 배교하고 방면되었다. 그러나 이정식 등 8명은 참수형을 받고 수영 장대로 끌려 나가 영화로운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가운데 이정식 회장의 가족은 친척들에게 거두어져 부산 가르멜 수녀원 뒷산에 묻혔다. 그러다 도시계획으로 인하여 1977년 9월 17일에‘오륜대 순교자 성지’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1988년에는 순교지인 수영장대에 순교자 기림비를 세웠고, 1989년에는 부산교구 순교자 현양위원회가 주관하여 부산대 의과대학과 사학자 등이 묘를 파내어 네 분의 유골을 감정하기도 하였다. 현재도 거의 매일같이 교우들은 순교자 묘지를 참배하고 있다. 부산교구는 이정식을 시복청원 대상자로 올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복자 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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