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례지 소개

충렬사

가톨릭부산 2016.05.19 14:27 조회 수 : 326

충렬사

소 재 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345 충렬사

□문화재지정: 부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7호(1972.06.26지정)

충렬사는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순절하신 부산지방 순국선열의 영령을 모신 곳이다. 
현재의 충렬사는 1605년(선조 38년)에 동래부사 윤훤(尹暄)이 동래읍성 남문 안에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을 모신 송공사(宋公祠)를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1624년(인조 2년)에 선위사 이민구(李敏求)의 건의로 『忠烈祠』라는 사액을 받고 부산진성에서 순절한 충장공(忠壯公) 정발(鄭撥)을 모시게 되었다.
그 후 1652년(효종3년)에는 충렬사를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선열의 충절과 학행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강당과 동서재를 지어 안락서원이라 하고 사우(祠宇)15 와 서원(書院)으로서의 기능을 갖추었다. 
1709년(숙종35년)에는 충렬공과 충장공이 순절할 때 함께 전사한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동래교수 노개방(盧蓋邦), 유생 문덕겸(文德 謙), 양조한(梁潮漢), 비장 송봉수(宋鳳壽)와 군관 김희수(金希壽), 겸인 신여로(申汝櫓), 향리 송 백(宋 伯), 부민 김 상(金 祥) 등의 위패를 모신 별사를 옛 송공사 터에 건립하였다.
1736년(영조12년) 별사에 모셨던 분을 충렬사에 합향하였으며 1772년(영조48년)에 다대첨사 윤흥신(尹興信)공을 추배하고 임란 때 송상현공과 정발장군을 따라 순절한 금섬(金蟾)과 애향(愛香)을 위해 충렬사 동문 밖에 사당을 세웠다.
충렬사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와 보수를 하여 현재는 93,823㎡의 경역에 본전 외 15동의 건물이 있으며 부산지방에서 순절한 93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5월 25일 부산 시민 모두의 정성을 모아 제사를 지내고 있다.

 

1) 충렬사 안락 서원

소 재 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1동 838

□문화재지정: 부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7호(1972.06.26지정)
□배향인물:
송상현(宋象賢) 정 발(鄭 撥), 윤홍신(尹興信), 조영규(趙英圭), 노개방(盧蓋邦), 문덕겸(文德謙), 양조한(梁潮漢), 송봉수(宋鳳壽), 김희수(金希壽), 신여로(申汝櫓), 송 백(宋 伯), 김 상(金 祥)
□창건연도: 1605년(선조 38)
□사액연도: 1624년(인조 2)
□향 사 일: 5월 25일

‘서원’이라는 것은 이름 있는 현자(명현)를 기리며 제사를 지내고 청소년을 모아 인재를 기르는 사설기관이다 . 우리보다 먼저 있었던 현자들에게 제사 지내는 ‘사’와 자제를 교육하는 ‘재’를 합하여 설립한 것이다.
서원은 명목상으로 성리학을 연구하고 먼저 있던 현자들을 위해 제사를 지낸다는 설립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 밖에도 지방 선비나 무인 집안의 지위를 강화해 주는 기능도 있었다. 유학의 성현들을 모시는 사당16  또는 사묘17 의 역할 그리고 향촌의 자치 규약인 향약18  등의 향촌 질서를 정하고 백성들을 가르치고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학문 연구와 발전의 기능을 하는 연구소 역할을 담당했다.
안락서원은 1605년(선조 38)에 동래부사 윤훤(尹暄)이 임진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조선시대에 부산 지역의 수군을 거느려 다스리던 군직인 부산첨사19  정발(鄭撥), 다대첨사 윤홍신(尹興信) 등 부산지방의 선열을 모시기 위하여 동래읍성의 남문에 송공사단(宋公祠壇)을 건립한 것에서 비롯된다. 1624년(인조 2)에 선위사 이민구의 청에 의하여 충렬사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임진란 때 전사한 부산첨사 정발(鄭撥)의 신주를 서원에 모시게 되었고, 1652년(효종 3)에 동래부사 윤문거(尹文擧)가 송상현의 학덕과 충절을 높여 소중히 여기며, 이를 계승하기 위하여 내산 및 안락리(현 충렬사자리)에 이전하여 강당과 동서양재20 를 지어서 교육기관으로 삼게 한 것이 안락서원의 기원이다. 
그 후 1709년(숙종 35)에 동래부사 권이진이 송상현과 정발이 순절할 때 함께 순절한 사람들을 모시기 위해 읍성 안에 있는 충렬사의 옛 터에 별사를 세우고 정부에 알린 후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동래교수 노개방(盧蓋邦), 유생 문덕겸(文德謙) 및 비장 송봉수(宋鳳壽)와 김희수(金希壽), 겸인 신여로(申汝櫓), 향리 송백(宋伯), 부민 김상(金祥) 등을 모시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1735년(영조 11)에는 경상감사(관찰사) 민응수(閔應洙)가 임금에게 청하여 1736년에 별사에 모셨던 이들을 안락서원의 충렬사에 함께 모셨다. 동시에 임진란 때 순절한 다대첨사 윤홍신을 다시 모시고 또 남편과 운명을 같이 한 송상현의 첩 김섬과 정발의 첩 애향을 충렬사의 동문 밖에 정려(旌閭)21 를 지어 기념하고 있다.
이처럼 안락서원은 임진란 때의 충신열사를 모셨기 때문에 뒷날 흥선대원군이 단행한 서원철폐 때도 헐리지 않고 근년까지 그대로 내려오다가 1977년 정부의 충렬사 성역화 방침에 따라 그 경계를 확장하여 사당과 기념관 등 건물을 새로 짓고 그 보존과 관리에 힘쓰고 있다. 안락서원은 창건 이래 몇백년 동안 지방민을 교화하여 충군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이 고장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긍지를 갖게 하는데 큰 이바지하고 있다. 안락동의 이름도 충렬사 내에 있었던 이 안락서원에서 유래되었다.

서원 철폐령
고종 때 흥선대원군은 서원에 대한 모든 특권을 철폐, 서원의 누설을 엄금한 것이다(1864년). 영조11년 (1735) 경상감사 민응수(閔應洙)가 서원에 무신인 유응부(兪應孚; 사육신)의 예가 있어 순절한 자에게까지 문무관(文武官)의 차별을 하는 것은 온당치 않으니 별사를 없애고 9위를 다시 ‘래산서원’(萊山書院; 안락서원의 별칭)으로 옮길 것을 상소로 청하였는데, 임금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이듬해인 1736년 별사를 파하고 충렬사의 이름을 다시 사용토록 할 것과 첨사 정발을 함께 제사지내도록 하였는데, 이때 순절공신 전 훈도 양조한(梁潮漢)은 호조정랑으로, 양통한(梁通漢)은 호조좌랑22 에 각각 증직23 하고, 24공신에게도 증직하였다. 한편 부사 송상현과 첨사 정발의 첩인 김섬과 애향은 속서이열각(束庶二烈閣)에, 기왓장을 깨고 싸웠던 두 여인은 이촌녀각(二村女閣)에 각각 모셨다.
(※ 동래부사 윤문거(尹文擧)가 충렬사를 안락서원으로 고쳐 부른 것을 이때 다시 충렬사의 명칭을 사용하라는 조정의 명령은 있었으나, 안락서원(安樂書院)을 파하라는 명령이 없었기 때문에 아마 사우(祠宇)의 명칭으로 사용될 때는 <충렬사>로 서원의 명칭으로 각각 사용되었다고 짐작된다)

2) 충렬사 기념관
소 재 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1동 838
충렬사 기념관에는 동래지역 각종 군사 기구의 구성원 명단을 수록한 무청선생안을 소장하고 있다. 동래 장교였던 이정식 요한에 대한 자료들이 담겨있는 것이다. 동래지역에는 장관청, 중군청, 군관청(또는 별군관청), 교련청, 별기위청, 수첩청, 작대청 등 모두 7개 부대의 무청선생안이 전해진다. 동래지역 무임(장교)이었던 이정식 요한은 사후에 사학죄인이라는 표기와 함께 무청선생안에서 이름이 지워진 흔적이 9군데서 찾아진다. 이로써 그의 가계는 더 이상 무임직으로 진출할 수 없게 되었다. 1881년 이정식의 사촌 이희식은 그들 가계원들의 무임직 진출을 다시 허락해달라는 소지(청원서)를 세검당에 올리기도 했다.

 

3) 충렬사 군관청

소 재 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1동 838

□문화재지정: 부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21호

군관청은 조선시대 동래부 청사 건물의 하나로 군관들의 집무소였다. 군관청은 군 장관들이 업무를 보던 장관청과 더불어 이 지방의 국방을 담당하는 중심기관이었으며 대표적인 관아건물이다. 동래부는 일본과 인접한 국방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1655년(효종6)에 동래 독진이 설치되었다. 장관청과 함께 군방을 담당하는 중추기관으로 세워진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관아 건물로서의 기능을 잃고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해방 이후 주변의 도시화로 고층 건물들에 가리게 되어 좁은 공간에 다시 보수하더라도 보존과 활용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본래 수안동 신한 은행 자리에 있었으나, 1982년 충렬사 경내로 옮겼다. 현재 수안동 신한은행 자리에 비문만 남아있다. 여기서 순교자들의 고문과 형벌이 있었을 것이다. 이정식 요한이 동래장교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업무를 보았다.

별군관청선생안을 보면 이정식을 사학죄로 정묘년(1867년) 2월 당회 때 의논하여 장교였던 그 직책에서 이름을 지워버림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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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선조(先祖) 혹은 선현의 신주(神主)나 영정(影幀)을 모셔 두고 연 수차에 걸쳐 제향을 행하는 장소. 사우의 발생은 인간의 보편적 의지인 선조와 선현의 숭배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되며, 특히 우리 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발생하게 된 것은 고려 말 주자학 전래 이후의 일이다.

16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셔 놓은 집.
17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 등 4대 조상의 신위를 모신 사당.
18  조선 시대에, 권선징악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만든 향촌의 자치 규약. 중국 송나라 때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뜬 것으로, 조선 중종 때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의 주장으로 추진되어 영ㆍ정조 때까지 전국 각지에서 실시하였다.
19  ‘동첨절제사’, ‘첨절제사’와 같은 말로 조선 시대에, 절도사에 속한 진(鎭)에서 수군을 거느려 다스리던 군직(軍職)).
20  조선시대 성균관의 명륜당 양쪽에 좌우로 늘어서 있는 동재와 서재를 이르는 말. 동재와 서재는 유생이 거처하고 공부하는 곳이었다.
21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
22  조선시대 호조(戶曹)에 둔 정육품(正六品) 관직으로 정원은 3원이다. 그 중 1인은 무관(武官)으로 임명(任命)하였다. 위로 호조판서(戶曹判書: 正二品), 호조참판(戶曹參判: 從二品), 호조참의(戶曹參議: 正三品 堂上) 각 1원과 호조정랑(戶曹正郞: 正五品) 3원이 있다. 
호조좌랑의 관장(管掌) 하에 별영색(別營色)•별고색(別庫色)•주전소(鑄錢所)•사섬색(司贍色)•사축색(司畜色)•회계사(會計司)•수세소(收稅所) 등의 분장(分掌)이 있었다. 정랑을 지낸 사람은 좌랑을 제수(除授) 받을 수 없었다.[네이버 지식백과] 호조좌랑 [戶曹佐郞] (관직명사전, 2011.1.7, 한국학중앙연구원)
23  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 종이품 벼슬아치의 부친, 조부, 증조부나 충신, 효자 및 학행(學行)이 높은 사람에게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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